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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황산마을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양과동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황산마을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양과동정.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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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속담에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좋은 곳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인공의 운치까지 모두 어우러진 완벽한 곳을 찾기가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추어진 완전무결한 것은 없으니 얼마간의 부족한 점은 감수해야 한다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다. 뒤집어 읽어본다면 산과 물과 정자는 그만큼 잘 어울리는 완벽한 풍경을 만들어내는 '찐조합'이기에 이런 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산과 물, 계곡이 어우러진 산자수려(山紫水麗)한 곳에는 으레 소슬한 정자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옛 목조 건축물 중에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정자(亭子)는 삼국시대부터 지어지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 들어와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양과동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마을 공동 정자로 양과동 동약과 향약을 시행했던 곳이다
 양과동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마을 공동 정자로 양과동 동약과 향약을 시행했던 곳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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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집으로 지어졌고 옆면에 바람을 막는 풍판이 설치돼 있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집으로 지어졌고 옆면에 바람을 막는 풍판이 설치돼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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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지방에 유독 정자가 많은 이유는 조선 중기의 시대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사화와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 중기. 중앙 정치에서 패퇴한 수많은 호남 사대부들이 목숨을 잃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선비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낙향하여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은거했다.

고향으로 낙향한 '은일 처사'들은 현실 정치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문학과 학문으로 승화시키고 고향 후진들을 양성하면서 다소나마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문학의 흔적들은 오롯이 남아 우리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원조가 되었다. 전라남도 담양과 무등산 자락에는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정자들이 즐비하다.

세상일에서 한 발짝 물러난 처사들은 정자에서 대자연과 교섭하며 '음풍농월(吟風弄月)'과 강학으로 어지러운 현실을 잊으려 했다. 은둔의 집에 그럴듯한 이름을 붙여 놓고 본인의 철학과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정자는 사방이 탁 트여 있다. 벽 하나 없다
 정자는 사방이 탁 트여 있다. 벽 하나 없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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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기둥과 대들보 사이사이에 걸려있는 현판과 편액들을 살펴보면 그곳에 머물렀던 처사들의 인생관과 철학과 가치관 더 나아가 그가 추구했던 학문의 세계를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살펴보는 것 또한 정자 여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역 유지들 모여 향촌 규약을 논했던 정자

올여름은 무더위가 일찍 찾아왔다.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지난 9일 광주 외곽의 한 정자를 찾았다.

광주 도심에서 백운 광장을 지나 나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남구 양과동 황산마을.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낙락장송과 키 큰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마을 어귀 높은 언덕에 날렵한 정자 한 채가 서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양과동정(良苽洞亭)'이다.
  
천장은 내부 서까래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 반자 형태다
 천장은 내부 서까래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 반자 형태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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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로 둘러싸인 갑갑하고 무더운 도심을 떠나 정자에 오르니 비로소 숨통이 탁 트인다. 기둥과 마루와 지붕으로만 이루어진 정자는 사방이 탁 트여 있다. 벽 하나 없다. 당연히 방도 창도 문도 없다. 안과 바깥 구분 없이 서로 통한다.

발아래 펼쳐진 넓은 들판에서는 벼들이 날로 푸르름을 더하고 도로가 배롱나무는 뙤약볕 아래서 붉디붉은 꽃망울을 뭉텅이로 토해내고 있다. 앞으로 석 달 열흘 동안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며 마을 앞 거리를 붉게 물들일 것이다.

가끔씩 진초록의 나뭇잎새들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한줄기 햇빛은 마치 검광처럼 번뜩이며 흑백의 무늬를 만들어 낸다. 사방 어디서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도심 가까운 휴식처 중에서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다.
  
도로가 배롱나무는 뙤약볕 아래서 붉디붉은 꽃망울을 뭉텅이로 토해내고 있다
 도로가 배롱나무는 뙤약볕 아래서 붉디붉은 꽃망울을 뭉텅이로 토해내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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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자는 앞서 말한 여느 정자들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이름부터 평범하게 동네 이름을 딴 '양과동정(良苽洞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정자는 어느 개인이 유유자적하며 풍류를 즐기기 위한 정자가 아니다.

이곳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지방자치를 위한 동약(洞約)과 향약(鄕約)을 의논하고 시행했던 집회소로 사용된 곳이다. 서로 도우며 바르게 살고자 스스로 향촌의 규약을 정하고 시행하는 장소였기에 다른 정자보다 규모가 크다.

양과동에는 조선 초기에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칠석동 출신의 부용 김문발(1359~1418)이 전국 최초로 시행한 향약을 본받아 제정한 양과동 향약이 전해지고 있다. 정자에는 '양과동적입의서'와 '양과동정향약서'가 현액으로 걸려 있다. 광주 지방자치의 원형이 숨 쉬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양과동적입의서와 양과동정향약서 등 향약 관련 자료들이 현액으로 걸려 있다
 양과동적입의서와 양과동정향약서 등 향약 관련 자료들이 현액으로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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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 간 곳 없고 시문만 걸려있네

이 정자는 다른 이름으로 '간원대(諫院臺)' 또는 '고경명의 별서(別墅)'라고도 부른다. 간원대는 이곳 출신 인사들이 사헌부와 사간원의 간관(諫官)으로 많이 진출하여 이곳에서 국사를 논하고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경명의 부친 고맹영(1502~1565)은 사간원의 으뜸 벼슬인 대사간을 지냈다.

의병장 고경명은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곳에서 의병들을 모집해 출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자의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삼한시대 또는 신라시대라는 설이 있으나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고 뚜렷한 자료가 없어 정확한 건립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자의 편액과 남아 있는 각종 자료를 참고했을 때 148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짐작한다.
    
정자 정면에 ‘양과동정(良苽洞亭)’이라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현판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우암 송시열이 휘호 했다
 정자 정면에 ‘양과동정(良苽洞亭)’이라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현판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우암 송시열이 휘호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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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안에는 동약이나 향약에 관련된 현판 외에도 이곳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높은 돌계단을 올라 정자를 마주하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조선 유학의 거두로 문묘에 배향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의 현판이다.

정자 정면에 '양과동정(良苽洞亭)'이라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현판이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우암은 양과동정 외 다른 정자에도 많은 현판을 남겼다.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광주 환벽당과 담양의 명옥헌에도 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양과동정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시문이 들보 사이사이네 걸려 있다. 영사정 최형한의 시문
 양과동정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시문이 들보 사이사이네 걸려 있다. 영사정 최형한의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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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맞배집으로 지어진 양과동정 들보 아래에 영사정 최형한 (?~1504)이 지은 '제간원대(題諫院臺)'라는 시가 걸려 있다. 이 싯구를 통해서 이곳의 다른 이름이 '간원대' 였음을 알 수 있다. 최형한은 양과동 출신의 문신으로 이곳에 시문을 남긴 명사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맏형이다.

옆 마을 압보촌에서 태어난 의병장 제봉 고경명도 고향으로 돌아와 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문학에 전념하던 중 이곳을 드나들며 시 한 수를 남겼다.
  
양과동정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시문이 들보 사이사이네 걸려 있다
 양과동정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시문이 들보 사이사이네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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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의 연기는 언덕 사이에 하얗게 서려있고 / 바람에 흔들리는 주막집 가죽나무 푸르러 가네 / 수풀 우거진 곳엔 한 쌍의 새가 날아들고 / 괴목나무뿌리엔 몇 개의 술동이가 눕혀있네..."
 

조선 중기 문신으로 대사헌(종 2품)까지 올랐다가 을사사화로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 사사당한 규암 송인수(1487~1547)도 생전에 이곳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의 시를 보면 당시의 양과동정은 초가로 지어진 초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양과동정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시문이 들보 사이사이네 걸려 있다. 규암 송인수의 시문
 양과동정을 다녀 갔던 인사들의 시문이 들보 사이사이네 걸려 있다. 규암 송인수의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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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곡마을(양과동의 옛 이름)엔 뛰어난 승지도 많은데 / 우뚝 선 초정이 눈앞에 선연하다 / 흐르는 시내의 모래 예와 같이 희고 / 비 갠 뒤의 바위 산들은 더욱 푸르다..."
 

이들 외에도 성종과 연산군 시대 인물인 추암 박염, 고경명의 후손 고정봉, 임진왜란 때 고경명 장군 등과 군량미를 조달했던 회재 박광옥의 '차유곡모정운'이 걸려 있다.
 
정자를 오가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했던 하마석. 정자 입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향약관 앞으로 옮겼다
 정자를 오가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내릴 때 사용했던 하마석. 정자 입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공사로 인하여 향약관 앞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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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동정 공덕비
 양과동정 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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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 간 곳 없지만 들보 사이사이에 빼곡히 걸려있는 현판과 시문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후배님들, 어때요? 21세기의 삶은 행복하신가요?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7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다. 코로나가 다시 기승을 부린다니 걱정이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들 붐비지 않은 가까운 정자를 찾아 옛사람들과 차분하게 선문답을 나눠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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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광주 양과동정, #간원대, #고경명 별서, #양과동 향약, #남도의 정자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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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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