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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8년간의 긴 감옥생활을 끝내고 출옥한 직후의 김지하(1981년).
ⓒ 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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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자유의 시간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내외신 회견과 신문 기고를 통해 유신체제, 독재자의 악행을 폭로하면서 다시 검은 그림자가 그의 뒤를 쫓았다. 1975년 3월 13일 오전, 서울 성북구 정릉의 처갓집에서 나오다가 체포되어 중정으로 넘겨졌다. 이번에는 담당 부서가 7국이었다. 

그 사이 지난해 4월 19일 태어난 장남이 자라나 한껏 귀여움을 보이고, 아내ㆍ장모와 함께 장모님 고향을 다녀오는 등 모처럼 소소한 행복에 젖기도 하였다. 원주에서는 최근에 석방된 지학순 주교를 비롯 지인들과의 만남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정보부는 구속 사유를 내외신 기자회견과 <고행-1974>에서 인혁당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등 반국가 단체를 찬양ㆍ고무하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예의 상투적인 좌경용공의 '도깨비 방망이'였다.

중정은 처음부터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천주교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엮어서 함세웅 신부 등이 설립하여 한참 반유신투쟁을 벌이는 정의구현사제단과 재야단체 민주회복국민회의를 제거하려는 책략이었다.

정보기관은 그의 집을 샅샅이 뒤져 메모지 등 '입증자료'를 수거해갔다. 김지하는 문인답게 오래 전부터 틈틈이 메모를 해왔다. 다음은 희곡 <장일담>과 <말뚝>에 관한 구상메모와 관련 부문이다.

1975년 나의 반공법 위반 사건 내용 중에 '장일담' 구상 메모가 들어 있다. 수사관들은 장일담의 모델이 누구냐고 거듭거듭 물었고 출옥 후에도 그것을 묻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허구라고 대답해왔고, 물론 허구다. 장일담의 사상이 그러하니까. 허나 영상으로서의 모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밝히겠는데 그가 바로 정일담이다. 

정일담은 연동의 전설적인 영웅이며 목포 건달세계의 신화적인 인물이다. 흔히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까지도 그저 '일담이', '일담이'하고 불렀던 그는 한마디로 그 무렵 연동과 목포민중의 영웅이었다. 숙부와 쌍벽이라고는 하지만 숙부보다는 나이도 위였고 한 차원이 높은 큰 우투리였다. 그는 어릴 적 이후 지금껏 가장 절친한 나의 한 불알친구의 숙부이기도 하다. (주석 1)
1975년 2월 중순, 지학순 주교(가운데 꽃다발 쓴 이)와 김지하 시인(지 주교 오른쪽)이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을 향해 가두행진 중이다.
 1975년 2월 중순, 지학순 주교(가운데 꽃다발 쓴 이)와 김지하 시인(지 주교 오른쪽)이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을 향해 가두행진 중이다.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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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사건의 담당 변호사 홍성우의 증언이다.

김지하 집을 수색하여 확보한 소위 <장일담>, <말뚝>이 두 가지의 작품메모를 문제삼게 됩니다. 작품구상을 하면서 김지하가 끼적거려 놓았던 메모, 쪽지에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적어놓은 것, 쪽지의 뭉텅이입니다. 이 메모를 찾아 압수해 왔습니다. 장일담이나 말뚝이라는 희곡, 담시 형식의 희곡을 쓸려고 준비해놓은 메모였어요. 그 메모를 보니 소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려고 한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 메모는 이적표현물 제작을 위한 예비행위다. 이게 공소사실 1항이 됩니다. (주석 2)

두 가지 '메모'에는 그가 옥중에 있을 때 가끔 수첩에 적은 '사회주의' 라는 용어를 떼내어 공산주의자로 엮는 전략이었다. 인혁당사건에서도 써먹었던 수법이다.

초점은 역시 사회주의였다. 옥중수첩에 사회주의 관련 어휘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으니 그들은 그것을 가장 유력한 증거물로 들이댔다. 그들의 주장은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라는 것이고, 내 주장은 '일종의 민족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의 모색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또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모색 과정에 있는 사람이 나처럼 그렇게 확신에 차서 용감하게 투쟁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으니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불교를 끌어들이듯 내가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에 가톨릭을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들과 교황들의 노동회칙, 제3세계 회칙 등을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주석 3)

유신정권은 날이 갈수록 포악성이 더해갔다.

야당 대통령후보이던 김대중 납치, 서울대 교수 최종길 고문치사, 인혁당사건 관련자 8명 사형집행, 독립운동가 장준하 암살 등 문명국가에서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 이어졌다. 그들에게 시인 하나쯤 공산주의자로 엮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주석
1> <회고록(2)>, 78쪽.
2> <홍성우변호사의 증언, 인권변호 한 세대 대담, 한인섭>, 128쪽, 경인문화사, 2011.(이후 <홍성우 증언> 표기)
3> <회고록(2)>, 39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지하, #시인김지하평전, #김지하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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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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