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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야, 큰일 났다.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도라꾸(트럭의 비표준어)에 실어 합천 쪽으로 가더라." 이웃집 사는 백종석 엄마가 백원두의 엄마 박막양에게 말했다. 박막양은 아침밥도 거르고 원두(1945년생)는 앞세우고 둘째 원상(1950년생)이는 업고 싸리문을 나섰다. 걷는 듯 뛰는 듯하는 엄마를 쫓느라 백원두는 계속 뛰어야만 했다. "엄마, 천천히 가"라고 징징댔지만, 원두의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5리(10km)를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읍내 거창다리에 도착하니 백원두의 큰고모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올케, 왜 이제 왔어! 방금 도라꾸 지나갔어." 박막양 일행은 거창보도연맹원을 태운 트럭이 지나간 합천 방향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그 트럭에는 원두의 아버지이자 박막양의 남편 백무흠(1924년생)이 타고 있었다. 

얼마 후 백원두의 할아버지와 고모부는 권빈재로 갔다. 합천군 봉산면에 있는 권빈재는 거창 읍내에서 60리(24km) 길이었다. 권빈재에는 백여 구의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들은 백무흠의 시신을 찾으려고 며칠을 헤맸으나 허사였다. 또 다른 학살 장소인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에도 가보았으나 허사였다. 백원두의 아버지 백무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경남 거창군 주상면 성기리 미기들마을의 백무흠은 1950년 7월 27일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2차로 끌려가 학살된 동생 백봉흠(1927년생)은 죽은 날짜와 장소도 알려지지 않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다

1950년 7월 19일. 양지리 구장 신순범은 "보도연맹원들은 빨리 지서로 모이랍니다"라는 신원지서 급사 정경술의 전갈을 받고 지서로 갔다. 신원지서 유치장에는 관내 보도연맹원 19명이 구금돼 있었는데 잠시 후 그들은 거창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유치장이 만원이 되자 이들은 상업은행 창고(현 국민은행 거창지점)와 농협창고에 분산 수용됐다. 신순범은 유치장 문을 나오자마자 뒷결박을 당했다. 같이 끌려온 양지리 사람을 포함한 신원면 보도연맹원들도 똑같았다.

창고에서 거창경찰서 수사계 김차갑이 "보도연맹원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은 손들어"라고 했다. 신순범은 손을 들었고 석방되었다. 그날 창고에 있었던 150명의 보도연맹원 중 살아남은 사람은 신순범과 손기두, 단 두 명뿐이었다. 대다수 거창 보도연맹원들은 7월 21일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로 끌려가 거창경찰에 의해 학살됐다. 이어 7월 27일 합천군 봉산면 권빈재에서도 집단학살이 있었다.

그런데 이 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민수(가명, 1926년생)다. 거창군 고제면 출신인 그는 해방 후 주상면에 거주했다. 마을 구장 이주택이 민애청 가입을 권유해 가입했는데, 그 일 때문에 경찰서에서 한 달간 구류를 살기도 했다. 이후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가 6.25를 맞았다.

6.25 직후 거창 농협창고에 끌려간 이민수는 권빈재로 이송되었다. 보도연맹원들을 두 줄로 세워 숲속으로 데려간 경찰들은 도랑을 지나자 신발을 벗기고 "허리띠를 빼서 앞 사람을 묶어"라고 지시했다. 허리띠로 묶인 이들이 밀착했을 때 경찰의 총구에 불이 뿜었다. 총에 맞은 덕종·윤종 형제의 몸뚱이가 이민수를 덮쳤다. 움직이는 이들에게는 확인 사살이 가해졌고 이민수는 숨을 죽였다. 이민수는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거창 보도연맹원 중 3명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 수백 명은 저세상으로 갔다. 그들은 무슨 죄를 저질렀을까. 

"어문우, 나왓!" 가조면 석경리에 들이닥친 가조지서 경찰들이 명부를 들고 보도연맹원들을 호명했다. 어문우(당시 25세)는 보도연맹원을 부르는 줄로 모르고 경찰이 자기 이름을 부르니 그냥 따라나갔다. 이후 그는 상업은행 창고에서 구금됐다 권빈재에서 학살당했다. 그런데 그는 보도연맹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 실제 석경리에는 동명이인인 또 다른 어문우가 있었다.

지리산 인근인 거창군은 한국전쟁 전부터 빨치산이 활동했다. 때문에 군·경은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중산간 지대 주민들을 괴롭히거나 불법적으로 학살했다. 전쟁이 나기 전 1949년 거창경찰서 경찰들이 신원면 사람들을 신원국민학교에 모아놓고 "빨갱이에게 쌀을 주거나 잘못한 게 있으면 자수해라. 그러면 사죄해 준다"라고 했다.

이때 신원면 덕산리 사는 김재규(당시 21세)도 손을 들었다. 1년 후 김재규는 그날 손을 든 마을 친구들과 함께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갔다. 북상면 소정리 임재만(당시 34세)은 빨치산이 마을을 습격해 짐을 져달라고 해 심부름을 했다가 부역죄로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죽임을 당했다.

독립운동가 출신과 진보인사 제거

또 일제강점기에 농민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하거나 해방 후 사회운동을 한 이들도 한국전쟁 중 제거 대상이 되었다. 거창읍 동동 출신의 신종우(당시 45세)는 일제강점기에 농민회 사건(일명 낙동강 농민회 사건)으로 진주형무소에 복역했고, 신간회 거창군위원장을 했다.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전국농민회총연맹 거창군 간사 활동을 하다가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그는 1950년 7월 21일 합천군 묘산면 마령재에서 죽임을 당했다.

신종우와 같은 마을 출신의 이구관(당시 44세)은 일제강점기에 교회 내 독서회에서 비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후에는 신원면장을 지냈고, 조선민족청년단 거창군위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6.25가 발발하자 예비검속되어 처형됐다. 그는 6.25가 발발하자 예비검속되어 한 달 동안 거창 농협창고에 구금되었다가 권빈재에서 처형당했다.

이외에도 경찰 및 우익단체 간부들과 개인적 감정 및 갈등 때문에 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도 전쟁이 나자 희생됐다. 진실화해위원회의 <거창·산청·함양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실규명 결정문>에 의하면 거창읍에서 양복점을 하던 이가 경찰들이 옷을 공짜로 수선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고 한다.

또 거창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회는 보도연맹 가입에 적극 개입했다. 한국전쟁 당시 거창군 신원면 대동청년단장은 거창면장이던 박영보였다. 1951년 2월 11일 군인들의 요청으로 신원국민학교에 모인 1천 명의 주민 중 517명에게 손가락질을 해 그들이 죽임을 당하는 데 관여한 박영보 말이다. 517명의 죽음이 박영보의 직접적인 책임은 아니지만 그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다. 보도연맹 가입도 마찬가지다.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신문에 '보도연맹원 소집' 관련 광고가 대문짝만하게 났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이 낸 광고는 '공산주의 성토 웅변대회'가 1949년 12월 4일 오전 10시에 열리며, 장소가 부산 남일국민학교에서 토성국민학교로 변경되었다는 내용이다.
 
거창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순회강연 (출처-국도신문 1950.5.6)
 거창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순회강연 (출처-국도신문 1950.5.6)
 
이 광고가 나간 5개월 후에 거창보도연맹 관련 기사가 <국도신문> 1950년 5월 6일에 실렸다. 기사는 '거창보련(居昌保聯)에서는 지난 29일부터 1주일간 지방순회 강연회를 개최하고 있는데, 전지리산지구 현지당책 및 야산대장들도 참가햐여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한다'였다. 즉, 생포된 빨치산을 동원해 순회강연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1949년 4월 서울에서 국민보도연맹이 만들어진 후 각 도와 시군에도 산하조직이 생겨났다. 경상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20일 부산시 광일국민학교에서 보도연맹원 800명을 포함해 시민 2000명이 참여한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 선포대회를 열었다.

국민보도연맹의 애초 취지는 '좌익경력자들을 전향시켜 대한민국 국민으로 보호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남한 내 좌익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포섭공작의 일환이었다. 검찰·경찰이 주도하고 우익단체가 동원되었다. 보도연맹은 처음부터 6.25가 발발하기까지 수시로 군사훈련과 반공강연을 했다. 이전의 동료들, 그리고 이념과는 관련 없는 이들까지도 가입 독려 대상이 되었다. 

다섯살 때 아버지를 잃고
 
증언자 백원두(백무흠의 아들)
 증언자 백원두(백무흠의 아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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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원두의 삶은 말 그대로 고행이었다. 봄에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거나 쑥 뿌리를 캐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엄마 박막량은 무주구천동까지 25리(10km)를 걸어가 옥수수를 떼 와 삶아서 마을을 다니며 팔았다. 박막량은 웅덩이에서 미꾸라지를 잡아 거창장에 내다 팔고, 어린 자식들은 산에서 싸리 씨, 오리나무 씨, 아카시아 씨를 따다 팔았다. 하루라도 몸뚱이를 움직이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이후에도 숱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잃은 백원두는 좌절하지 않았다. 한때 백원두는 여관업을 하다가 현재는 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거창유족회 총무를 20년간 하면서 아버지와 삼촌의 명예회복을 이루어냈다.

'거창'하면 흔히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있었던 '거창 신원면 학살사건'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외에도 보도연맹사건, 군경토벌에 의한 민간인학살 사건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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