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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가 꺾인 엄마의 허벅지 둘레가 4센티미터나 줄었다. 굵고 튼실한 허벅지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시간이 알게 모르게 그녀를 데려가고 있었다. 세월이 무서운 이유는 아마도 인간에게서 소중한 존재들을 야금야금 빼앗아 가기 때문일 것이다. 가족, 젊음, 꿈 그리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은 상실과 소실의 연속이다.

그러나 인간은 절대 나약하지 않다. 인간은 상실의 순간마다 그 빈자리에 기억을 가득 들이붓는다. 기록하고 기억하며 상실한 만큼 새로이 존재를 이식해놓는다. 그렇게 굳어진 기억을 바라보며 회상에 잠기는 것은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어쩌면 추억하고 추모하는 모든 애착의 행위들은 인간이 시간에 저항하면서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잃어가는 것들을 붙잡기 위해 기억하고, 다시 그 기억을 굳혀 직면하는 일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한 일이다. 그러나 그 용기가 때로는 지난한 과거와 결별하고 내면을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연인이자 문우인 류주연 작가의 <딸의 기억>을 읽으며 깨달았다.
 
▲ 딸의 기억| 류주연 지음 |정가 14,00원| 252쪽| 140*205mm | 328g
▲ 딸의 기억 ▲ 딸의 기억| 류주연 지음 |정가 14,00원| 252쪽| 140*205mm | 328g
ⓒ 도서출판 채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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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분교 출신 어느 여성청년의 강제 자립 성장사
 
'이제 좀 살 만해졌는데, 엄마가 암에 걸렸다'.

이 책의 첫 문장이다. 

사람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으면 즉각적으로 감정이 폭발하기보다는 마취 주사라도 맞은 듯이 어찌할 줄 몰라 멍해지면서 되려 무감각해진다. 정신을 차리면 차릴수록 서서히 동요되는 감정은 묵혀놓았던 아득한 기억을 허락도 없이 불러온다. 특히 불행이라는 기억은 봉합되지 않고 벌어진 상처의 아픔처럼 도망치고 싶어질 만큼 또렷하게 또 쓰라리게 다가온다.

경상남도 산골분교의 한 소녀가 자신의 가난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 계기는 비교할 만한 타인이 단체로 등장한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었다. 무일푼으로 처음 도시에 내던져진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소녀가 벽돌만 한 수업 교재를 사며 느꼈던 것은 잠깐의 설렘과 당장의 밥벌이에 대한 당혹감이었다.

가난이라는 것은 사람을 너무나 일찍 어른으로 만든다. 그녀는 청춘의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빠르게 인식했다. 가불을 해준다는 이유로 최저임금도 주지 않던 편의점에서 '강제 자립'의 성장사를 시작했다. 생활비 마련을 위해서였다.

이어 그녀의 기억은 고시원의 남녀공용 화장실, 어린 여자라는 이유로 이유 없는 화풀이를 당하던 편의점, 손님들의 성희롱과 주방 이모들의 온정이 상존했던 맥주집, 그 와중에 겪어낸 사랑과 이별, 자신을 거쳐 간 소중한 인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생존의 배경들을 지나치며 나아간다. 
 
천천히 자라도 되는 줄 알았더라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수백 번 이야기했던 나의 이십 대를 다시 한번 기회를 준다면 더 행복해져 보겠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p.131

삶의 최전선에서 모멸적이거나 애틋하거나 중간이 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겪으며 너무나 일찍 어른이 된 그녀에게 찾아온 엄마의 암 투병 소식. 그것은 부모로부터 한 번도 보호받아보지 못해 일찌감치 놓고 살았던 '딸'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불러일으킨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이자, 상실에 맞서 늦지 않게 출발한 기억인 셈이다. 

오래된 미움은 진실한 사랑의 증거
 

책에선 자식에게 짐이 되었다는 죄책감에 아픈 몸을 이끌고 굳이 설거지를 하는 엄마의 모습과 제발 좀 가만히 있어 달라 짜증을 내며 답답함과 죄의식에 방황하는 딸의 모습이 그려진다.

딸의 짜증은 단지 엄마를 향한 미움일까. 엄마의 죄책감은 딸과 자신 중 누구를 향한 것일까. 나는 이 복잡한 질문에 쉬이 답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대목이 특히나 인상 깊었다. 과연 이러한 오묘한 감정의 골을 미래의 인공지능은 한 단어로 압축해 정리해낼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오래된 미움이라는 것은 어쩌면 오래된 사랑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사랑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먼지처럼 미움이 쌓일 시간을 주는 것이다. 미움에서 애정의 맥락을 발견해내는 것, 그것은 잃어가는 존재에 기억을 채우는 행위만큼 인간다운 일이다.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의 동물이라서 종종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현직 사서이자 작가라는 흔치않은 이력을 가진 그녀는 다소 격정적일수 있는 개인사를 담담한 어조와 절제된 시선으로 풀어내었다. 또한 어엿한 어른이 되어 가난에 의해 변색된 가족의 테두리를 다시 칠하고자 하는 분투가 잘 녹아있다. 그녀가 이 책을 쓰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는 책을 직접 읽으며 확인해보시길 권한다. 

덧붙이는 글 | 연인이자 문우文友의 이야기를 세상에 추천하면서 모종의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성 언론이 잘 다루지 않은 지방 출신 여성청년의 생존분투기이자, 딸의 굴레에서 연민과 애증의 낙차에 관해 고백하는 우리 시대 여성들의 보편성에 관한 흔친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그 희소성과 필요성에 이끌려 서평을 쓰게 되었습니다.


딸의 기억

류주연 (지은이), 채륜서(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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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근로자, 부업 작가 『연애 결핍 시대의 증언』과 『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를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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