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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올해 첫 전원회의에 참석, 개회를 알리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이 지난 5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최저임금위원회 올해 첫 전원회의에 참석, 개회를 알리는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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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5일 내년도 최저임금을 정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논의에서는 최저임금의 인상과 동결에 대해서도 말이 많지만, 특히 최저임금 차등화 도입에 대해 말이 많다. 최저임금 차등화 도입은 지역별, 업종별로 최저임금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논의는 윤석열 당선인이 현 최저임금 제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나타내며 시작되었다. 윤석열 당선인은 후보 시절인 3월 7일 경기 안양 유세에서 "자영업자, 중소기업 다 나자빠지고 '난 최저임금보다 조금 적더라도 일하겠다'는 150만 원, 170만 원 받고 일하겠다는 분 일 못 하게 해야 됩니까? 200만 원 줄 수 없는 자영업자는 사업 접으라고 해야 됩니까"라고 발언하였다. 

그렇게 시작된 최저임금 차등화 논란은 법적 근거도 있는 만큼 도입을 위해 논의하여야 한다는 사용자 측과 법적 근거 자체를 없애야 하며 최저임금 차등화 도입은 논의할 거리도 되지 못한다는 노동자 측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최저임금 차등화에 대하여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최저임금을 업종별, 지역별로 차등화한다는 것은 업종별로는 종사하는 분야에 따라 최저임금이 적어도 되는 분야가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이는 지역별로도 일하는 곳에 따라 최저임금이 낮아도 되는 지역이 있다는 것을 내포하기도 한다. 쉽게 말하자면 더 돈을 많이 받아야 하는 지역이나 업종이 있고 적게 받아도 되는 지역이나 업종이 있다고 공인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최저임금 제도의 본 취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생계비는 벌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최저임금 제도가 생긴 이유이다. 또한 최저임금 제도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를 생각하면 최저임금 차등화는 본 취지에 어긋나는 주장이다. 나아가 지역이나 업종에 따라 최저 생계비가 달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위험한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사업장 규모별로 차등을 두자는 주장이 있는데, 이 또한 규모가 작은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더 적은 최저 생계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므로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앞의 주장처럼 최저임금 제도를 이해하고 있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차등화를 하다 보면 시골과 도시, 사무직과 일용직,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최저임금이 달라진다. 여기서 우리는 임금의 차이가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모든 임금이 동일하다면 그것이야말로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한 문제는 차등이 되는 부분이 임금이 아닌 최저임금이라는 것이다. 최저임금 제도는 노동자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존속하는 제도이다. 최저임금이 다르다는 것은 최소한으로 보장받는 부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업종, 지역, 사업장 규모에 따라 계급이 생기는 것과 같은 결과를 만들 것이다.

가령 지역에 따라 도시에 비해 시골의 최저임금이 500원 낮고 사업 규모에 따라 5인 미만의 사업장은 최저임금이 500원 낮고 업종별로 사무직에 비해 일용직이 1000원 낮다고 가정하면,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시골의 5인 미만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일용직 A와 도시의 5인 이상 사업장에 근무하는 사무직 B를 비교하면 A와 B는 주 52시간을 똑같이 일해도 최저임금이 104,000원 차이가 난다. 한 달에 40만 원이 넘는 금액을 똑같은 시간을 일해도 보장받지 못한다.

이러한 것을 국가 제도로 공인한다는 것은 곧 국가에서 보장하는 삶의 질이 업종, 지역, 사업장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국가가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귀천과 경중을 나누어 사람을 차별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배운다. 하물며 초등학교의 바른생활부터 시작하는 도덕 교육에서도 직업에는 귀천이 없고 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고 따라서 직업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무시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우리는 지역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것 또한 옳지 않은 일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거기에 귀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업종, 지역 그리고 사업장 규모에 따라 더 적은 생계비를 보장하고 더 낮은 삶의 질만을 보장해도 괜찮다고 주장한다.

차별의 가장 무서운 점은 다수로 소수를 짓밟는 형태를 취하지만 결국 기준이 늘어남에 따라 차별받지 않는 사람은 극소수가 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업종, 다음은 지역, 그다음은 사업장 규모가 된다. 그다음 기준은 무엇이 될지, 나는 앞으로 늘어만 갈 많은 차별의 기준들에서 모두 다수에 속할 수 있을지 오늘도 깊게 생각해 본다.

"그들이 처음 왔을 때 공산주의자를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왜냐하면 내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는 유대인을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 노조원을 잡아갔다. 그때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는 가톨릭 신도를 잡아갔다. 그때도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개신교 신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에 내가 잡혀갈 때는 이미 항의해 줄 그 누구도 남아있지 않았다."(마르틴 니묄러, <그들이 처음 왔을 때>)

태그:#최저임금, #차등화, #차등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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