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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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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에게 게으름을 허락할 수 있는 면죄부는 바로 '워킹맘'이다. 회사에서는 직장인으로, 집에서는 엄마로, 아내로 고군분투한다는 그럴듯한 핑곗거리 덕분에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한들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많은 활동 중에 책 읽기가 취미가 된 이유는 아마도 누워서도 할 수 있기 때문이지 싶다. 그나마도 코로나가 몸을 덮친 이후로는 여의치가 않다. 한 달여가 지났지만 피로감은 여전하고 집중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책을 읽지 못하는 만큼 양분이 공급되지 않아 정서적으로 메말랐다.

책을 읽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되어 그런지, '찢어질 듯 맑은 하늘 아래 겸손한 마음'(브런치 이웃인 @비르소미오 님의 표현을 빌려보았다)이 되어 그런지 일요일에는 조금 우울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음 날이 월요일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새로 맡은 일을 근근이 해 나가고는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일에 끌려다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업무에 적응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구 구겨진 종이 뭉치처럼 잔뜩 웅크린 상태랄까. 정체, 매너리즘, 슬럼프. 이 세 단어가 마음을 덮쳤다. 쨍하니 맑은 하늘도, 꽃들을 피어내는 따사로운 햇살도, 뺨을 포근히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봄바람도 가뭄이 든 마음밭에서 겉돌기만 할 뿐이었다. 4월은 새삼스레 잔인하기도 하구나. 단비가 간절했다.

4월 둘째 주 화요일, 독서모임이 예정되어 있었다. 모임은 매 월 둘째 주 화요일, 지역 도서관에서 진행된다. 작년 12월, 2022년에 새로이 시작되는 '인문독서모임' 공고를 보게 된 것은 어쩌면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홈쇼핑을 보다가 '매진 임박'을 맞닥뜨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 들고 주문 결제를 누르듯 '선착순 5명 모집'이라는 문구를 본 순간 홀린 듯 신청을 해버린 것이다.

직장인인 내가 평일 오전 10시-12시에 진행되는 모임에 호기롭게 신청 버튼을 누른 까닭은 이러하다. 그냥 독서모임도 아닌 '인문' 독서모임인 데다 개인이 모집하는 게 아니라 지역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으므로 지적 허영심이 가득한 나의 구미를 당기기에 충분히 '있어'보였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오전 반가를 내는 것은 크게 무리하지 않아도 가능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 혼자서는 번번이 실패하는, 처음부터 15페이지 정도만 7번 정도를 읽은 <코스모스> 같은 책을 숙제하듯이라도 완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미루고 미뤄왔던 독서 모임

계획대로라면 이미 3권,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여인들의 행복백화점>(에밀졸라), <코스모스>(칼세이건)을 읽었어야 했다. 그러나 직장인이 평일 독서모임을 신청한 패기는 보기 좋게 패대기 쳐졌고, <코스모스>는 여전히 읽지 못한 채로 남아있다. 신청 후 지난 3개월 동안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1월에는 업무 일정상, 2월에는 어린이집이 휴원하는 바람에 육아를 하느라, 3월에는 코로나에 걸려서 자가격리 중이었다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이 모임에 내가 계속 이름을 올리고 있어도 되는 것인지 고민은 계속되었다. 감사하게도 언제든 참여할 수 있을 때 나오라는 회원분들의 진심 담긴 격려가 동아줄이 되어 마음에 닿은 덕분에 놓지 않고 매달려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모임에 참석을 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휴가 결재를 올릴까 말까, 모임에 갈까 말까 갈팡질팡 했다. 내가 없다고 업무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더군다나 오전 몇 시간 늦게 출근할 뿐인데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거니와 무엇보다 읽었어야 할 책을 다 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로 익히 잘 알려진 위대한 시인 푸시킨의 소설 <대위의 딸>이 이 달의 책이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대여한 게 며칠 전이었고 책의 분량도 평범한 수준이라서 평소라면 2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첫 장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안드레이 빼뜨로비치 그리뇨프, 혹은 세모노프스끼, 사벨리치, 등등이다 보니 바로바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

원서가 아닌 번역문이다 보니 물 흐르듯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고 맥이 뚝뚝 끊겨 집중해서 읽기도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글자들이 고스란히 눈에 담기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는데 코로나 후유증 때문임이 분명하다(고 탓하기로 했다). 어찌 되었든, 책을 다 읽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푸시킨이라는 위대한 작가가 우리에게 이렇게 난도질을 당하는 걸 알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초반에는 책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집중해서 읽기가 어려웠다는 의견들이 오갔다. 책을 완독하지 못한 나는 조금의 안도감을 가지고 다른 회원들의 감상을 귀 기울여 들었다.

밀도 있는 대화들이 이어졌고, 이 책이 추천된 이유와 또 청소년 권장도서라는 점에 주목하여 어떤 부분들 때문에 선정이 되었을지도 고민해보았다. 저자 푸시킨이 귀족 출신임에도 귀족인 등장인물들은 순수하면서 부족해 보이고, 하인인 인물들은 우직하고 지혜롭게 묘사된 점도 주목할 만했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각 장마다 주제와 연결 됨직한 민요나 속담 한 구절이 적혀있었다. '명예는 젊어서부터 지켜야 한다', '여보게 젊은이들 잘 들어 두게나 우리 늙은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등이었는데 누군가는 소설의 내용을 다 읽지 않고 이 구절들만 읽더라도 책을 다 읽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끝으로 번역가에 따라 같은 문장이 다르게 쓰인 것을 발견하고 각자 가진 책을 낭독하기도 했는데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집에 가서 오늘 오간 대화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처음부터 이런 식이고 보니 별로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았다. 나는 순수한 그러나 갈가리 찢어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의 달콤함을 생전 처음 맛보았고 모든 고통당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하여 앞으로 내게 닥칠 일은 접어 둔 채 평화롭게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p.172

<대위의 딸> 알렉산드르 푸시킨, 옮긴이 석영중, 열린출판 1999

오로지 책만 생각하는 모임, 그래서 좋다 

직장과 집만을 쳇바퀴 돌듯 왔다 갔다 하고, 만나는 사람들도 직장 동료 아니면 가족이다 보니 내가 하는 생각의 범위도 말하는 주제도 딱 그 정도이다. 회사에서는 회사일, 집에 와서는 집안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데다 이 나이에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나는 틀렸다.

누군가의 집이 얼마나 올랐는지, 자녀가 어느 대학에 다니는지, 직업은 무엇이고 연봉은 얼마인지는 거기 모인 그 누구의 관심사도 아니었다. 오직 책이라는 디딤돌 위에 함께 발을 디딘 사람들은 생각을 얹어 또 다른 돌을 이어 붙일 뿐이었다. 누구든 그 돌을 밟으며 자신만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게 아니지 않으냐며 다그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서로가 이해한 내용을 공유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자기의 생각에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어 붙이는 공동의 작업, 한 가지 색으로 칠해지는 그림이 아니라 색색의 종이를 오려 붙이는 모자이크로 작품 한 점을 완성해 가는 과정과 같았다. 한 권의 책에서 흩뿌려진 생각의 방울들이 다시 모여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마음을 촉촉하게 적셨다.
 
* 단톡방에 남겨진 한 줄 평 중 일부 발췌
- 내가 한 행동이 어떤 결과가 될지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싸벨리치 같이 위급한 순간마다 적당히 브레이크를 걸어줄 친구를 두고 싶다.
- 젊음, 명예, 용기, 희망 그리뇨프를 쫓아가는 여정 내내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 삶이 위급한 순간, 우연한 선행으로 그 위기를 벗어날 수 있으니 철없는 행동일지라도 베풀면서 살자!
- 현명함이든 어리석음이든, 현재의 내 행동은 미래의 나를 결정하는 것임을.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도 발행된 글입니다. 브런치 by.달콤달달


태그:#직장인이야기, #책 , #독서모임, #평일오전, #마음의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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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보았다가도 또 생각나서 찾아 읽게 되는,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지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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