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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 지금은 잊힌 단어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핵심 공약이 경제민주화였다는 것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헌법재판소는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경제민주화 규정에 대해, 우리 헌법의 경제질서가 단지 자유시장질서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규정이라고 한다.

우리 헌법은 국가에게 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서의 정의를 실현할 의무, 국민 각자가 실제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실질적 조건을 마련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아울러 달성하려는 것을 근본이념으로 한다는 것이다.

즉 각자도생, 죽도록 '노력'해서 '경쟁/시험'을 통과해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만 보상받고 루저는 내버려두는 국가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선택의 자유가 실질적 자유가 되기 위해 개인의 역량과 잠재력을 증진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갖춘 정의로운 국가여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경제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인 노동자가 주체로서 참여할 권리를 인정해야 하고 경제적 불평등의 피해자인 노동자에 대한 분배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확대, 정리해고 요건 강화, 비정규직 차별 해소.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같지만 박 전 대통령의 공약이었다.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경제민주화를 위해 꼭 필요한 노동정책이다.

사라진 말, 경제민주화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경제민주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당연히 노동 공약도 없었던 일이 되었다. '저성과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한 저성과자 해고 지침, 노동자 과반수나 노조의 동의 없이도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게 한 취업규칙 변경 지침,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지침으로 '노동개악'을 밀어붙였다. 당연한 결과로 비정규직은 늘고 임금격차는 악화되었다. 대규모 정리해고와 그로 인한 노동자 가정의 해체, 노동자와 가족의 죽음이 계속되었다.

촛불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노동존중 사회 실현'을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가 강행한 2대 지침과 성과연봉제 지침을 폐기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출범과 사회적 대화, 노동시간 단축,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달성,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상시적 위험 작업 사내하도급 전면금지, 산재 사망사고 절반 줄이기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높았던 기대에 비해 실적은 초라하다. 문재인 출범 이후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내몰리는 있는 비정규직, 플랫폼·특수고용노동자의 수는 크게 늘었다. 산재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음에도,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많은 허점을 안은 채 통과되었다. 코로나19로 여성, 비정규직 등 취약노동자와 무늬만 사장일 뿐 실질은 노동자인 영세자영업자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지만 보상은 턱없이 부족하다.

5명 미만 사업장에도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자는 내용을 포함한 '전태일 3법'에 대한 10만 국민동의 청원에도 정치권은 움직이지 않았다. 소득불평등, 자산불평등은 갈수록 커지고 있고 기후위기로 생명권, 건강권 등 인권을 직접적으로 침해당하는 건설·배달 노동자 등 취약노동자를 위한 대책, 탄소중립을 위한 사회적·생태적 전환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할 취약 노동자를 위한 정의로운 전환은 논의 자체가 잘 되지 않고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정부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재벌·대기업이나 국민의힘, 보수 언론의 반대와 비협조는 말할 것도 없고, 코로나19라는 악재, 경기하강, 좀처럼 늘지 않는 일자리,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약'을 걷어찬 민주노총, 앙상한 '공정' 담론을 무기로 연대보다 내 몫 지키기에 급급한 대기업·정규직 노조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합의와 공감대를 이끌어 내고 헌법적 가치를 실현해야 할 정부의 의지, 추진력, 전략이 부족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열린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통의동 제20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열린 시·도지사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인수위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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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는 '최저임금 이하로 받고도 일할 사람은 일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한 주 120시간이라도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 따위의 발언으로 노동·노동권에 대한 무지를 계속 확인시켜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맞이하게 되었다.

당선인이 재계와 만나 규제완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완화를 시사하고, 박근혜 표 노동개혁을 이끈 김현숙 숭실대 교수를 인수위 정책특보로 임명한 것을 보면 걱정이 앞설 수밖에 없다. 굳이 박근혜표 노동개혁을 복기해 본 이유기도 하다.

노동의 위기, 무엇이 정의인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우리가 처한 노동위기의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2017년부터 주로 노동 관련 기사를 쓴 전혜원 시사IN 기자가 낸 책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이 반성과 새로운 논의를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소설가 김훈은 추천사에서 저자의 문제제기 방식은 "'정의란 무엇인가?'라기보다는 '무엇이 정의인가'에 가깝다"고 썼다. 노동문제 대한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노동현실에서 적용되어야 할 '실용적이고 생활적인' 정의를 찾는다는 뜻이다.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서해문집
 

저자는 진보-보수, 선악의 이분법으로 문제를 단순하게 재단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이니 무조건 옳다거나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모든 노동자가 같은 이해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할 주제에 대한 문제제기도 피하지 않는다.

모두가 일하는 사람, 즉 노동자인 사회에서, 회사에 종속되어 회사가 시키는 대로 일을 하면서도 왜 프랜차이즈 가맹점주, 플랫폼 노동자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는가? '기술혁신', '물류혁신'이란 것이 실은 노동 착취와 약탈을 가리는 포장 아닌가?

'공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정규직이 누리는 기득권은 과연 '공정'하고 당연한 것인가? 왜 우리는 일터에서 죽을 각오를 해야 하고, 날마다 명복을 빌어야 하는가? 왜 같은 일을 해도 어디에서 일을 하느냐에 따라 보수가 달라지는가? 대기업 노조가 정년 연장을 주장하는 것은 정의로운가?

기후변화와 노동의 문제가 빠진 것은 다소 아쉽지만 현재 우리 노동현실에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더 치열하게 논쟁해야 할 주제들을 망라하고 있다. 이 물음들로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저자의 바람대로 '짠한 무엇', 우리와 무관한 '작업복을 입은 추상화된 대상'으로서의 노동이 아닌, '너와 내가 뭘 얼마나 더 부담할 수 있는지 결정해야 하는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주제'로서의 노동을 직면해보자.
 

노동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들 - 종속적 자영업자에서 플랫폼 일자리까지

전혜원 (지은이), 서해문집(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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