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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편집자말]
남편의 별명은 '김가이버'다(드라마 <맥가이버>(1985~1992, 미국 ABC 방영 드라마)를 모른다면 이 별명의 의미가 바로 전달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결혼 전, 내가 기거했던 관사의 형광등이 오래되어 고장 났을 때, 틀까지 떼어내고 신형으로 설치하는 일련의 작업을 망치 하나만으로 해내던 남편의 손재주에 놀라 내가 지어준 별명이었다.

남편은 확실히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데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50을 목전에 둔 지금도 남편은 평소 세상 고뇌를 다 끌어안고 사는 듯한 표정으로 살다가도 필 받아 무엇인가를 만드느라 몰두할 때 가장 생기 있어진다.

만들기 좋아하는 남편과 산다는 것
 
인내는 쓰고 고통은 달아요
▲ 남편이 만든 딸의 책장과 책상 인내는 쓰고 고통은 달아요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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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솔직히 남편의 그런 취미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남편의 '장비 빨' 욕심 때문이다. 남편이 뭔가를 시작한다 싶으면 집 앞에 크고 작은 도구와 장비 배송이 먼저 시작되는 게 비단 우리 집 얘기만은 아닐 것이다.

미니멀 라이프 시대에 자르고, 두드리고, 박는 데 사용하는 용구들의 무한 맥시멀리즘을 견디려면 보통의 인내력으론 택도 없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망치 하나만으로 형광등을 새로 설치하던 '김가이버'는 어디 가고 '최고의 연장 찬양가'만 남았다.

남편의 취미가 마음에 안 드는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제작 과정의 희열은 오롯이 남편의 몫이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온갖 소음과 냄새, 먼지 등은 가족 모두가 감내해야 할 몫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목공예
▲ 남편의 목공예1 남편의 목공예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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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만들 때 몰입하는 남편의 모습이 꽤 멋있어 보이는 순간이 없는 건 아니다. 베란다에서 땀 흘리며 목제품을 만들 때만 해도 몰입하는 남편의 등을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 모든 작업이 거실로까지 연장되면서부터는 고통의 시작이었다. 목재를 절단하는 전기톱과 뚜당 거리는 연장 소리, 목재를 문질러대는 사포 소리, 그로 인해 발생되는 온갖 먼지들까지. 저렴한 비용으로 제대로 된 물건을 만들어 준다며 한 번 시작하면 완성하기까지 혼신을 다하는 남편의 열정을, 나는 차마 말릴 수 없었다.
 
거실로 들어오면 고통 분담의 시작입니다.
▲ 남편의 목공예2 거실로 들어오면 고통 분담의 시작입니다.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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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남편은 싫증을 잘 내는 사람이다. 뭘 해도 3개월을 넘기기가 어렵다. 지구력 부족 탓이겠지만, 목공에 손대는 동안 감내해야 했던 고통 분담을 생각하면 남편의 끈기 없음이 고마울 정도다. 그래도 목공은 좀 오래간다 했더니 언젠가부터 장비 소리가 멈췄다. 이제 좀 가정에 평화가 오는구나, 싶었는데... 목공을 그만둔 지 몇 달 후부터 집 앞에 다른 택배물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가죽'이었다. 남편이 사들이는 가죽은 색이나 겉 문양뿐 아니라 질감과 두께도 다양했다. 아무리 얇은 가죽이라도 가죽은 가죽. 작은 제품을 만들더라도 덧대는 부분은 바느질이 필요했다. 어떻게 손으로 가죽 제품을 꿰매나 했더니, '그리프'라는 도구로 가죽에 바늘 땀을 낸 후 린넨사나 폴리사 재질인 실로 꿰었다.
 
남편이 만든 가죽 지갑
▲ 가죽공예1 남편이 만든 가죽 지갑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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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만든 카드 지갑
▲ 가죽공예2 남편이 만든 카드 지갑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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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을 제작하는 장인의 손길처럼 남편은 진짜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했다. 테두리 작업까지 공들이는 그 모든 시간과 노력을 지켜 본 나로서는 누군가에게 그 물건들을 보내기가 아까울 정도다.

지구력은 부족한 사람이 순간 몰입력은 지구 최강이라 남편은 한 번 손댄 것을 중도에 멈추지 못한다. 처음엔 연습하느라 여러 날 잠을 줄이더니, 손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느라 새벽까지 잠들지 않았다.

"은퇴 후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니야"
 
남편은 카드 지갑 뿐 아니라 서류 가방까지 만들어 들고 다닙니다
▲ 가죽공예3 남편은 카드 지갑 뿐 아니라 서류 가방까지 만들어 들고 다닙니다
ⓒ 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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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왜 이렇게 들인 노력에 비해 제 값을 받지도 못할 아마추어 공예에 몰입하는 것일까? 나이 50을 목전에 둔 남편이 인생의 제2막을 준비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평생 뭔가가 되어 보려는 욕심이 없던 사람이 나이가 드니 드디어 삶의 성과를 내고 싶나 보다, 라고 그저 미루어 짐작했다. 그런데 남편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니 예상과는 다른 답이 나왔다.

"그렇게 가죽 공예에 몰두하는 거, 제2막, 뭐 그런 거 준비하는 거야?"
"뭔가 성과를 내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이거 팔아서 돈을 벌려는 것도 아니고."


남편의 대답에 더 아리송해졌다. 성과도, 수업 창출의 목적도 없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지? 남편은 그런 나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삶이 단순해졌을 때 행복을 느낄 만한 게 필요한 거잖아."

남편의 말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한 남자가 떠올랐다. 결혼 전(그러니까 무려 20여년 전), 부안 내소사 입구 전나무길을 함께 걸으며 나는 그에게 미래의 꿈이 뭐냐고 물었다. 그를 더 만날지 말지를 판단하기 위한 내 나름의 시험대 같은 질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던 그 남자의 답에 잠시 멍해졌다. 썸 타는 여자 앞에서 앞으로의 창창한 비전을 제시해도 부족할 판에 뭐라고? 순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 당시 내 이상형은 '미래의 꿈이 명확한 사람'이었는데,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이 남자의 꿈은 아무리 생각해도 모호했다. 그러면 뭐하나. 그 사람과 결혼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으니, 인연이란 참 묘한 것이다.

"가죽 공예를 부캐로 삼고 싶어 그렇게 열심히 한 게 아니었어?"

목표지향형 인간으로 50년을 살아온 나는, 눈에 보이는 목표가 없으면 삶의 경로가 흐트러질까 두렵다. 그래서 역시나 모호한 것을 참지 못하고 명확한 답을 달라고 하는 내게 남편은 "(돈 벌) 그런 마음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내가 말하는 '부캐'란 인생 이모작이자 또 다른 수업 창출 등의 성과를 내는 것임을 남편은 이미 간파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은퇴 후 그냥 놀면서 '진짜' 취미로 가죽 제품을 만들겠다고 한다. 여전히 가시적인 성과엔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삶의 방향은 늘 '행복'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었다. 선한 방향성이 있다면 꼭 무엇이 될 필요가 있을까.

너도 나도 부캐 만들기에 열중하는 시대에 부캐 없이 행복하게 살겠다는 남편을 이제라도 좀 응원해 주어야겠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애들 방 화장실 변기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지, 레버를 당기지 않아도 계속 물이 흐른다. 김가이버가 출동할 때가 왔나 보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에 함께 게시될 글입니다.


시민기자 글쓰기 모임 '두번째독립50대'는 20대의 독립과는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나를 찾아가는 50대 전후의 고민을 씁니다.
태그:#50대, #부캐, #중년의취미, #목공예, #가죽공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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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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