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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한국 바스프(BASF) 독일인 공장장과 인터뷰했다. 한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두 가지를 꼽았다. 해가 떨어진 뒤에도 뛰노는 아이들과 한국의 산사(山寺)라고 했다.

당시는 왜 그게 놀라운 일인지 의아했다. 어린아이를 꾀어 자취를 감췄다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동화 탓인지 독일에서는 해가 지면 아이들을 집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그러니 아이들로 북적대는 한국의 어둑한 골목 풍경은 생경했을 법하다. 이제는 우리도 해가 지면 아이들을 볼 수 없다. 또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으며 걷는 산사 또한 놀라운 풍광이다. 우리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이방인에게는 보석이 된다는 걸 그때 알았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논란을 지켜보면서 30년 전 독일인과 인터뷰를 떠올렸다. 윤석열 당선인이 벗어나려는 청와대가 실은 소중한 보물이라는 역발상이다. 청와대는 여러 면에서 빼어난 공간이다. 우선, 산세가 수려한 북악산과 넓은 녹지대를 끼고 있어 풍광이 아름답다. 또 조선 정궁인 경복궁과 어울려 한국적 정서를 간직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다. 다른 나라 대통령 집무실과 차별화됐다. 무미건조한 회색 국방부 청사와 비교해도 특색 있다. 아마, 청와대를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갔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저런 핑계로 청와대를 떠나지 못해 안달하니 안타깝다.

윤 당선인이 청와대를 떠나려는 이유는 대략 세 가지다. 국민과 소통, 제왕적 대통령제 청산, 효율적인 국정운영이다. 윤 당선인은 국방부 청사 이전 계획에 제동이 걸리자 강수를 두었다. 취임하더라도 국방부 청사에 집무실이 마련되기까지 통의동 금융연수원에서 집무를 보겠다고 선언했다.

표면적 이유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첫째, 청와대만 벗어나면 제왕적 대통령제는 청산되는 것인지. 둘째, 한 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할 만큼 박약한 의지의 소유자인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결정할 문제다. 무엇보다 국민들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5월 10일까지 끝내겠다는 건 독단이자 불통이다.

국방부 청사는 청와대 못지않게 경비와 보안이 삼엄한 곳이다. 소통을 목적으로 이전한다면서 국방부로 간다는 건 자기부정이다. 청와대가 권위적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한다. 더욱이 대통령 집무실은 비서진과 떨어진 채 고립돼 있다. 이런 까닭에 청와대는 집단지성보다는 경직된 의사결정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역대 정부마다 청와대 공간과 집무실에 문제의식을 느낀 건 이래서다. 그렇다면 문제의식에 걸맞게 소통을 염두에 두고 청와대 공간을 재배치하고 리모델링하면 된다. 국방부 청사로 이전은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버리는 꼴이다.

집무실 이전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국민들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무속, 풍수와 연결 지어 바라보고 있다. "청와대로 들어가면 험한 꼴을 당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피하고 있다는 풍문까지 있다. 윤 당선인과 인수위는 부인하겠지만 국민들은 5월 10일로 못 박고 이전하려는 걸 석연치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무속인이나 풍수가들 말대로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없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올해 우리나라를 선진국 그룹에 포함시켰다. 또 한국은 7개국만 가입한 '3050클럽' 회원국이다. 인구 5000만 명 이상 국민소득 3만 달러 이상 국가들이다. 경제 규모도 세계 10위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현직 대통령도 끌어내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다.

그들 말대로 청와대 터가 나빴다면 가능하지 않은 성과다. 역대 대통령들이 불행한 행로를 밟은 건 그릇된 정권욕과 자기관리 소홀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정권을 연장하거나 부정부패, 국정농단, 주변 관리를 못해 불행한 최후를 맞았다. 윤 당선인이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갖고 있다면 터를 탓해서는 안 된다.

집무실 이전은 우선순위도 바뀌었다. 서민경제는 2년 넘는 코로나19 때문에 파탄 직전이다. 강원도 산불, 우크라이나 전쟁, 북한 도발 악재까지 겹쳐 있다. 집무실 이전에 앞서 국민 삶을 먼저 챙기는 게 새 정부에게 주어진 책무다.

예산 또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분명하다. 인수위는 496억 원을 제시했지만 훨씬 많은 예산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하는 게 합리적이다. 전문가들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 국방부 이전, 청와대 공원화까지 5000억 원 이상을 예상하고 있다. 멀쩡한 공간을 놔둔 채 새 집무실에 막대한 세금을 쓴다면 어떤 국민이 수긍할지 의문이다.

청와대 본관을 리모델링한다면 적은 예산으로도 가능하다. 덧붙여 "국민들에게 청와대를 돌려주겠다"고 했는데, 어떤 국민이 돌려달라고 했는지 묻고 싶다. 국민들은 필요로 하는 곳에 세금이 쓰길 원하고 있다.

국방부로 이전한다면 BASF 독일인 임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쾌적한 녹지공간을 마다한 채 회색 콘크리트 건물로 들어가는 우리를 보고 "미쳤다"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국적 정취를 살리면서 소통이란 시대흐름에 맞게 청와대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길 바란다. 윤 당선인은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소통과 통합은커녕 또 다른 갈등과 불화를 유발하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괜한 고집을 피울 게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스경제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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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 여행, 한일 근대사, 중남미, 중동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남미를 여러차례 다녀왔고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 중심의 편향된 중동 문제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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