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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엄마, 이 바지 이제 좀 작은데 똑같은 걸로 새로 하나 만들어줄 수 있으세요? 바지 밑단은 고무줄 넣어서 만들지 말고 고무단으로 만들어 주시면 좋겠어요."
"알았어. 내일 재단해서 만들어 줄게. 대신 처음부터 고무단을 붙이면 니가 더 컸을 때 바지 길이를 늘릴 방법이 없으니 일단은 지금 키에 맞는 길이로 만들고 가을쯤 니가 더 크면 그때 고무단을 붙여서 조거팬츠로 입는 걸로 하자."


지난 주말, 14살 아들과 나눈 대화다. 내가 만든 옷을 입은 가족들의 모습을 보는 즐거움을 연료삼아 바느질을 해온 지 어언 14년, 이제 바느질은 내 생활의 루틴으로 자리잡았다. 주말엔 별 일이 없으면 바느질을 한다.

아이들 옷 만들어 입힌 지 14년

성장기 아이들의 침모상궁으로 산다는 건 필연적으로 계절을 먼저 살아야 하는 일이다. 마치 패션업계가 겨울에 다음해 봄여름 옷을 준비하고 여름에 가을겨울 패션을 준비하듯 겨울이 가려는 기미가 보이면 부쩍 커버린 아이들의 봄옷을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봄은 온 건가 싶을 때 가버리기 마련이니 가을까지 입을 수 있는 사이즈로 넉넉하게 만든다. 그래야 여름이 끝나고 겨울옷을 만들기 전에 잠깐 숨을 돌릴 수 있다. 봄꽃이 질 때쯤이면 여름에 입힐 린넨 반바지를 색깔별로 대량 생산한다.

지난해 가을, 아들이 입을 만한 바지를 여러 개 만들어 주었다. 신축성이 있는 고무줄 바지, 일반적인 트레이닝 바지, 발목이 조여지는 조거팬츠, 허벅지와 무릎, 정강이에 절개가 들어간 아웃도어 팬츠 등등 종류도 다양하게.
 
이렇게 사랑받을 줄 몰랐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 같은 검정 고무줄바지일 뿐인데.
▲ 이번 시즌의 원픽 이렇게 사랑받을 줄 몰랐다.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 같은 검정 고무줄바지일 뿐인데.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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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아이가 입는 건 고무줄 바지 딱 하나다. 그 하나를 주야장천 돌려입는다. 왜 이 옷만 계속 입냐고 다른 옷도 좀 입으라고 꺼내주면 이건 너무 길고, 그건 너무 품이 벙벙하고, 저건 너무 레깅스 같고, 요건 색깔이 마음에 안 들고, 또 어떤 건 같이 맞춰 입을 상의가 없다고 한다.

'아 그냥 좀 입어!'라는 말이 목젖을 치고 올라오지만 꿀꺽 삼킨다. 침모상궁으로서 열일 했지만, 마케터로서 타깃 고객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인정하고 고객님 요구에 귀 기울이기로 마음을 고쳐 먹는다.

이번처럼 고객님의 요구사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아이는 계절 내내 옷이 많아도 옷이 없는 상태로 살게 된다. 겨우내 바지 하나를 매일 빨아서 돌려입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멋진 옷, 요즘 유행하는 옷을 입겠다고 까탈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 드는 딱 그 하나를 만들어 달라고 한다.

옷을 사 입으면 내 취향을 알기 어렵다. 이번 시즌에 유행하는 옷이 어디서든 많이 보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낯설다가도 자꾸 보다 보면 한 벌 사입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즌에 유행하는 옷이 더 싸고 더 사기 쉽다. 어느 브랜드나 그 옷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내 취향을 알아서 그것을 관철하려면 손품이든 비싼 가격이든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인테리어 할 때 취향을 살리는 포인트 하나하나에 모두 돈이 추가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스티브잡스 같은 천재가, 사용자들이 자신에게 필요한지 알지도 못하던 제품을 만들어 '너에게는 이게 필요했어'라고 설득하고 그것이 전세계인의 생활을 바꿔놓는 경우도 있다. 마찬가지로 패션업계에도 천재 디자이너들이 '이번 시즌엔 이런 디자인을 제안합니다!'라고 내놓은 옷이 숨겨져 있던 내 아름다움 혹은 우아함 혹은 멋짐을 찾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맞는지 알고 선택할 수 있는 것과 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아이는 제 평생을 엄마가 만들어주는 옷을 입고 자랐다. 그러다보니 속옷, 양말, 패딩 이외의 옷들에 대해서는 '사주세요'가 아니라 '만들어 주세요'라고 말한다. 어릴 때는 엄마가 만들어주는 대로 입었지만, 이제는 취향이 생겼다. 완성된 옷을 고쳐 달라는 요구는 들어주지 않으므로 만들기 전 기획 단계에서 옷의 디테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완성된 옷을 산다면 이 브랜드냐 저 브랜드냐, 이 옷이냐 저 옷이냐, 혹은 이 옷을 선택할 것이냐 말 것이냐만을 고를 수 있지만, 날 때부터 침모상궁의 옷을 입고 자란 우리 아이들은 좀 다르다. 옷을 한 덩어리의 완성품이 아니라 내 마음에 맞게 커스텀할 수 있는 조건들의 조합으로 인식한다.

"몸판은 엉덩이를 다 덮게 하고 소매는 고무단을 넣어서 손목에서 걸리게 해주세요. 옆 트임은 없는, 아주 보통의 티를 만들어 주세요" 같은 디테일한 요구를 하는 식이다. 몸판 옆선을 조금만 겹쳐박아 이너티가 살짝씩 보이는 맨투맨을 만들어줬더니 평범한 티를 만들어 달라며 한 말이다. "내 티로 작품 활동하지 마시라고요~"라는 정중한 항의이기도 하다.
 
이너티가 살짝 보이는 멋스러움은 거절한다.
▲ 버림 받은 디테일 이너티가 살짝 보이는 멋스러움은 거절한다.
ⓒ 최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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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만들어진 옷들은 입고 사진을 찍는다. 이른바 착샷(착용샷)이다. 침모상궁 부캐의 모토는 '착샷 없는 민족에게 새 옷은 없다'이다. 그러니 마음에 안 들어도 만드느라 수고한 엄마의 즐거움을 위해 일단 착샷은 찍어준다. 하지만 이렇게 옷장에 들어간 옷이 고객님의 사랑을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는 또 다른 일이다.

그러니 고객님이 이렇게 기획 단계부터 관여를 하시면 만든 후에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해주지 그러셨어요,라는 뒷말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에 적극 수용한다. 천을 살 때부터 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완판 확률이 더 올라간다. 침모상궁 부캐는 이제 바느질 능력뿐만 아니라 취향이 생긴 베테랑 고객님의 만족을 위한 타깃 최적화 능력도 키워나가는 중이다.

아이와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싫지 않은 이유

얼마 전 BTS 멤버들이 각자 자기 취향에 따라 기획한 굿즈들이 판매되었다. 그 상품들을 기획하는 과정도 공개되었는데(나는 BTS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멤버들이 아이템을 기획하고 샘플 리뷰를 하면서 디테일을 정해가는 과정이 꼭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옷 만들어 달라고 할 때의 대화와 비슷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후드는 썼을 때 축 처지는 핏이 나오도록 살짝 더 크게 하면 좋겠어요', '같은 보라색이라도 너무나 스펙트럼이 넓은데 이 색이 제일 나은 것 같아요', '밑단은 지금 길이에서 16센치만 더 길게 해 주실 수 있나요?' 같은 식이었다. 물론 굿즈 제작 과정에서 BTS 멤버들이 말하는 수정사항은 다 반영될 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이 내게 요구하는 걸 다 해주지는 못 한다는 차이는 있다.

'그런 원단은 구할 수 없어. 엄마는 그건 못 만들어. 우리 가족 봄옷을 만드는데 쓸 수 있는 주말이 3번이야, 그러니까 그건 더 급한 옷을 다 만들고 나서 시간이 되면, 그때도 니가 그게 필요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라는 말로 요구사항을 반사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그런 대화의 기회가 왔을 때는 내게 없는 것, 내가 해주지 못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아이의 요구를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환하고 엄마의 타협안을 받은 아이와 함께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도 나도 성장한다고 믿는다.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무인양품의 철학은 나에게도 금과옥조와 같다.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 더 고급스러운 것이 많고 많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기준과 감각을 잊지 않으려 한다.

머지않은 날 엄마가 만들어주는 다소 투박한 옷보다 공장에서 나온 매끈한 옷을 더 좋아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오더라도 옷은 살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으며 옷을 사서 나만의 방식으로 꾸밀 수도 있고 내 마음에 맞게 고칠 수도 있다는 선택지를 가질 수 있다는 유연함은 잊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경험으로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주어진 것을 무조건 한 덩어리로 인식해서 수용하거나 거부하기보다는 자기 의견을 제시하고 현실에 맞춰 조정하는 일을 숨쉬듯 자연스럽게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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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만드는 삶을 지향합니다. https://brunch.co.kr/@swor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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