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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편집자말]
종종 책갈피 안쪽에 나뭇잎이나 꽃잎들을 끼워넣는다. 넣어두고 잊어버리기 때문에 가끔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펼치면 바싹 마른 나뭇잎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그렇게 납작해진 나뭇잎들을 모아, 상담이 있는 날 가지고 간다.

책갈피 속에서 잘 말려진 나뭇잎들을 테이블 위에 깔아두면 그날 만나는 내담자들의 눈이 어리둥절해진다.

"몇 달 전 주운 것도 있고, 몇 년 전에 책에 끼워둔 나뭇잎도 있어요. 이건 우리 동네에 서 있는 나무에서 떨어진 잎이고, 저건 저 멀리 바닷가에서, 그리고 또 저것은 등산 갔다가 주워온 거예요. 모양도 색깔도 다 다른 나뭇잎이고, 나이도 제각각, 태어난 곳도 다 다른데 오늘, 우리 앞에 있어요. 빛이 바래고 납작해져서. 그러니까 얘네는 각각 자기들만의 시간과 공간을 품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좀 신기하지 않나요? 어쩌다가 여기 이렇게 한 공간에, 같은 시간에 모였는지... 이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종이에 붙여봐요."  

말린 잎사귀들은 아주 얇고, 바스락 소리가 난다. 잘 찢어지거나 부서지기도 쉽다. 말린 꽃잎과 나뭇잎을 만지는 내담자의 손은 조심스럽고 신중해진다. 색이 바래 오묘해진 아이들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하나 둘 골라 종이에 살살 붙이면, 액자에 넣어 그날의 선물로 안겨준다. 상담 초기에 많이 하는 이 작업을 하면 나와 내담자 사이에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식물을 대하는 마음
 
압화꾸미기
 압화꾸미기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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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상담이 충분히 진행되지 않을 때가 있다. 상담에서 내담자와의 관계는 대화와 공감으로 쌓아갈 수 있지만, 상담을 하는 50분의 시간이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가끔 몇 가지 프로그램을 넣는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잘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이나, 우울이나 불안이 심한 청소년과 성인 내담자의 경우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소소한 작업을 하면 상담 시간이 훨씬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다. 심리치료에서 사용되는 여러 가지 작업은 내담자의 문제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식물이 그 매개체가 될 때 대부분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을 느낀다.

실제로 심리치료 현장에서 식물과 원예 작업, 정원조경 등을 활용하여 심신의 불편함을 지닌 환자들의 회복과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원예치료(Horticultural Therapy, 네이버 지식사전 참고)라 한다. 많은 논문과 치료 사례에서는 식물을 이용한 원예 활동이 사람에게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역사가 그리 길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교육이나 사회복지, 노인복지 현장에서 원예치료가 활용되어 왔다.
 
식물을 만지는 손은 언제나 다정하다
 식물을 만지는 손은 언제나 다정하다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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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상담사로 일하는 나 또한 녹색 식물이 사람에게 주는 긍정적인 효과에 관심이 많았기에 3년 전, 힐링원예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꽃과 나무를 소재로 여러 가지 작업을 경험하면서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선한 영향력'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일터인 상담 현장에서도 원예치료 기법을 사용하면서 내담자와 교감하는 방법이 훨씬 더 다양해졌다. 손에 흙을 묻히고, 꽃을 어루만지고 좋아하는 화초를 고르고 꾸미는 작업은 낯설거나 어렵지 않기에 그 어떤 대상에게도 적용할 수 있었다.

화초는 우울한 내담자들의 조용한 친구가 되어준다. 유칼립투스로 꾸민 리스나 가랜드를 만드는 작업은 그 향기만으로 마음이 예민하거나 불안한 내담자에게 정서적인 안정을 제공해주기도 한다.
 
보리싹 키우기
 보리싹 키우기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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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새 쑥쑥 자라곤 하는 보리싹은 아이들도 쉽게 키울 수 있는 재료이고, 한 달에 한두 번만 물을 주어도 묵묵히 잘 자라는 선인장도 인기 있는 소재이다. 꽃바구니를 만들면 그 어떤 사람도 얼굴이 환해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내담자들 앞에 꽃과 나무, 잎사귀 등을 늘어놓고 고르라고 할 때면 다들 제각각인 소재를 선택하는 모습을 보는 일도 원예치료를 하면서 만나게 되는 큰 즐거움 중 하나이다. 자격증을 처음 배울 무렵, 나의 스승님께서 꽃다발 묶는 법을 가르쳐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꽃을 잡을 때는 반가운 손님을 대하듯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 너무 세게 움켜쥐면 꽃들이 힘들어해요. 그렇다고 너무 헐겁게 잡으면 모양이 안 잡히겠지? 그리고 꽃을 꽂을 때는 내 몸을 낮추어서 신중히 하나씩..."

식물을 대할 때는 겸허하게, 몸을 낮추어 대할 것, 매순간 최선을 다할 것.... 결국 꽃과 나무를 대하는 자세는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맞닿아 있다.

화초를 보내며 내가 바라는 것
 
선인장
 선인장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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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담자와 화초로 작업을 할 때면 그들의 손을 보게 된다. 고사리같은 꼬마의 손에 흙이 잔뜩 묻어 어쩔줄 몰라 할 때 그 손을 잡고 살살 털어주며 더 가까워지기도 하고, 또 나뭇잎이 부러질까 조심스레 화분에 옮겨 담는 신중한 손놀림을 보면 '이 사람은 자신의 삶도 이렇게나 조심스레 대하겠지' 싶은 마음이 되어 짠해지기도 한다.

그저 식물일 뿐인데, 길가에 흔하디 흔한 풀 한 포기 같은 존재들일 뿐인데, 화초를 만지고 꽃을 꽂다 보면 화초의 생김새와 이름, 특성에 대해 알게 된다. 이 세상 무엇이든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세계는 달라진다. 그렇게 세상에서 또 하나를 알아가는 일은 삶의 무게에 지치고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에 작은 빛이 되어줄 거라고 믿는다.

상담 시간에 심은 화초를 집에 가져간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모두 무탈하게 자란다는 보장은 없다. 매만졌던 손길에 시들어버리기도 하고 몸살을 앓기도 하며 무심한 방치 속에 어느 날 아침 새순을 밀어내고 있을 수도 있다.

나와 함께 화초를 들여다보고 만지던 이들에게 인생도 그런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우리의 하루하루도 시들 때가 있고 피어날 때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과정과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가져가기를 바란다.

그저 화초를 품에 안고 집에 돌아가던 그 순간의 마음이 그의 삶 속 어느 날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writeurmind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태그:#원예치료, #화초, #식집사, #힐링원예치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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