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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 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우리가 겪은 식민 지배는 전례 없이 가혹한 형태였다. 식민 통치 방식을 '앵글로색슨 모델과 프로이센 모델'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영국이 인도에서 시행한 방식으로, 인도의 정치적 자치권 인정과 영국 연방의 한 일원으로 복속시켜 민족적·인종적 차이를 인정하는 바탕에서 불간섭 통치를 원칙으로 한다. 3억 인구의 인도를 통치하는데 영국인 관리는 1200여명뿐이었다.

반면 후자는 인종 말살 정책이라는 가혹한 통치 방식이다. 이는 식민지의 언어·문화·전통과 사상까지를 망라해 뿌리째 뽑아내려는 시도로, 이를 통해 인종적·정치적 동화를 무력과 경찰력이란 수단을 동원해 강제한다. 무자비한 탄압과 살육이 자행된다. 일본이 우리에게 시행한 통치 방식으로, 일제는 1700만 조선인을 통치하기 위해 1.7만 명 관료를 보내 잔혹한 인종 말살 정책을 시행했다.

프로이센 모델의 근간이 된 시설물이 군사기지 및 처벌과 감시를 자행한 기구들이다. 이를 통해 언어를 앗아가고 표현의 자유와 집회결사 자유는 물론 최소한의 자치권마저 인정하지 않았으며, 투표권과 재산권까지 박탈해 갔다.
 
조선교육령에 따라 설립된 4년제의 보통학교는 동화주의와 하급의 기능인재양성의 최전선이었다.
▲ 수송공립보통학교(1928) 조선교육령에 따라 설립된 4년제의 보통학교는 동화주의와 하급의 기능인재양성의 최전선이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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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도 그런 첨병 중 하나였다. 통감부의 '한국교육개량안(1905) 및 보통학교령(1906)'과 총독부의 '조선교육령(1911)'으로 차별적 교육이 자행된다.

민립대학 설립 운동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일본어 교육을 통한 충량한 신민 양성이라는 동화주의와 하급 위주 인재 양성이라는 우민화 목표를 구현할 학제를 시행한다. 이는 '수업 연한 단축, 학제와 과정의 단순화, 고등교육 유보, 인문교육보다는 단순 기능교육에 치중'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조선교육령 핵심은 고등교육 불허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다. 이는 짧은 학제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통학교 4년, 고등보통학교 4년, 전문학교 2년제였다.
 
현 경복고등학교 전신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의 1930년 모습이다.
▲ 경성고등보통학교(1930) 현 경복고등학교 전신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의 1930년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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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일본은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 대학 진학을 예비하는 구제(舊制)고등학교 3년, 제국대학 4년 학제였다. 그마저 최상위 학교인 전문학교는 1916년에서야 법학, 의학, 공업의 3개가 설립될 지경이다. 보통학교 교육이 불충분한데, 상급학교 개설은 과분하다는 핑계였다.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이 문화통치를 끌어낸 명분상 변화의 계기였으나, 이는 고도화한 또 다른 통제였다. 교육령 부분 개정(1920)과 '2차 조선교육령(1922.02)'으로 대학 설립이 가능한 법적 장치가 마련되자, 동아일보가 '민립대학의 필요를 제창하노라'라는 사설(1922.02.03)로 불씨를 뿌린다. 일제가 주도하는 '관립대학' 설립을 예측하면서, 민족 교육을 위한 '민립대학'으로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교육 운동 단체인 조선교육회(1920)가 교육령 개정에 맞춰 발기인 47인으로 '조선민립대학 기성준비회(1922.11)'를 발족시킨다. 이듬해 3월 발기인을 1,170명으로 늘리고 462명이 참여한 총회를 개최한다.

모든 비용은 모금으로 충당키로 결의하며, 1단계(4백만원)로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와 예과를 2단계(3백만원)로 공과를 3단계(3백만원)로 의과와 농과를 설치한다는 계획이다. 이 조직이 '조선교육협회(1923.06)'로 인가받아 합법적 활동을 보장받는다. 국내는 물론 재외 동포의 호응도 뜨겁다. 그러나 1923∼1924년 홍수와 간토 대지진에 따른 경제공황으로 기세가 한풀 꺾이고 만다.

관립대학 설립

일제의 교육목표는 '국가주의 완성'이다. 따라서 조선에 민립대학이 설립된다면, 이의 통제가 어려워진다고 예상한다. 관립대학 설치로 이를 제어하며, 일제가 의도한 국가주의 교육을 주입할 생각을 노골적으로 내보인다. 총독부가 설립 추진한 대학은 '제국대학'이다.
 
청량리에 1925년 건설된 2년제의 경성제대 예과 교사 모습이다.
▲ 경성제대 예과 청량리에 1925년 건설된 2년제의 경성제대 예과 교사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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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조선교육령 공포 2일 후 예과는 23년에, 본과는 25년에 개교한다는 '대학설립계획'을 발표한다. 일본 정부 승인을 얻지 못했음에도, 이듬해 5월 청량리에 예과 건물 착공에 들어가 12월에 완공시킨다.

그 과정에서 '조선제국대학 창립위원회(1923.11)'가 구성된다. 정무총감이 주도하는 위원회는 본토의 '제국대학령'에 따라 종합대학인 '조선제국대학' 설립을 결정한다.

첫 신입생은 문과 80명, 이과 80명이다. 모집(1924) 경쟁률은 4:1이었고, 합격자 중 조선인은 45명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개교하지 못한다. 일본 의회 해산으로 내각이 바뀌는 시점이었다. 또한 내각은 제국대학령이 아닌 조선교육령 적용을 강제한다. 명칭도 '조선제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경성제국대학'으로 변경을 강제한다.
 
동숭동에 세워진 본과로 법문학부의 1931년 이전 모습이다.
▲ 경성제대 법문학부(1931년 이전) 동숭동에 세워진 본과로 법문학부의 1931년 이전 모습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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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이르러 법문학부(3년)와 이학부(4년), 예과(2년)의 '경성제국대학 관제'가 가까스로 공포된다. 조선엔 대학 진학 예비 학교인 구제고등학교가 없어, 불가피하게 2년 과정의 예과를 두었으며, 본과는 동숭동에 세워진다.
 
1941년 설립된 경성제대 이공학부 모습이다. 현 서울과기대 내에 위치한다.
▲ 경성제대 이공학부 1941년 설립된 경성제대 이공학부 모습이다. 현 서울과기대 내에 위치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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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년 160명의 초미니 대학은 1940년까지 유지되었고, 1941년에서야 이공학부(80명)가 설립된다. 그나마 조선인 비중은 현저히 낮아 해방 전까지 6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을 뿐이다.
 
당시의 경성제대 광산학과 건물이다. 현 서울과기대 내에 위치한다.
▲ 경성제대 광산학과(1942) 당시의 경성제대 광산학과 건물이다. 현 서울과기대 내에 위치한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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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절반 규모인 타이베이제국대학보다 예산도 적었다. 일제는 이후 일체 대학 설립 자체를 막아버린다.

조선인 건축가의 설계

하급 기능인 양성 방침에 따라 건축가로 배출된 조선인들은 주로 총독부 건축과의 하급 기술직으로 일했다. 경성고등공업학교 출신들이 주를 이뤘다. 건축수요가 미미한 불가피한 실정의 반영이었다.

이들은 승진은 물론 임금에서도 차별을 받았는데 이는 조선인 건축가들이 부업에 매달린 이유가 되었다. 이 중 1세대에 해당하는 1919년 졸업생 박길룡이 총독부 건축기수로 일하며, 조선총독부 청사 등 일제가 경성에 지은 여러 건축에 참여하여 실무 경험을 쌓는다. 이런 이력과 능력을 인정받았음인지 그에게 '경성제대 본관' 설계 임무가 주어진다.
 
수직의 아치 창과  각진 입면, 층이 구분된 높이를 볼 수 있다. 중앙 포치로 차량이동이 가능하다.
▲ 경성제대 본관 좌측면 수직의 아치 창과 각진 입면, 층이 구분된 높이를 볼 수 있다. 중앙 포치로 차량이동이 가능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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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는 1930년에 완료되어 그해 8월에 착공, 일본인 미야가와 구미 시공으로 이듬해 10월 준공된다. 집은 북향이다. 벽돌조로 지었고 지하 1층 지상 2∼3층이다. 외부는 옅은 갈색의 타일로 마감했으며, 평지붕과 장식 없는 외관은 1930년 유행하던 모더니즘 건축 경향을 따랐다.
 
중앙 포치 옆 모서리를 곡면으로 처리하여 리듬감과 우아한 인상을 풍긴다. 입면에도 변화를 주었으며, 층을 달리한 높이로 상자형의 단조로움을 피하려 애썼다.
▲ 경성제대 본관 우측면 중앙 포치 옆 모서리를 곡면으로 처리하여 리듬감과 우아한 인상을 풍긴다. 입면에도 변화를 주었으며, 층을 달리한 높이로 상자형의 단조로움을 피하려 애썼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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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창을 곳곳에 두어 단조로움에 변화를 주었고, 2층과 3층을 적절히 구분한 높이 변화로 입면에 리듬감을 주려 의도했다. 중앙 출입구 포치(Porch) 3면에는 각각 커다란 아치형 출입구를, 출입구 주변 벽면은 부드러운 곡면으로 처리해 세련되고 우아한 인상을 풍긴다.
 
동숭동 경성제대 본관 전면으로, 흡사 덕수궁 언덕에 남아있는 경성재판소(서울시립미술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 경성제대 본관 전면 동숭동 경성제대 본관 전면으로, 흡사 덕수궁 언덕에 남아있는 경성재판소(서울시립미술관)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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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함에도 집 전면에서 덕수궁 언덕에 자리한 경성재판소가 연상된다. 우선 향이 똑같이 정북향이다. 벽면 마감도 비슷한 색의 타일이다. 중앙 출입구 포치 형태도 유사하며, 그 뒤로 돌출된 전면의 입면이나 3개 아치창으로 마감한 모양 등등이 흡사 경성재판소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경성재판소를 축소하고, 일부에 변화를 주어 앉혀 놓은 모양새다.

집은 옛 경성제대 법문학부 건물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1972년 서울대학교가 이전한 후 서울한국문화예술진흥원 청사였다가, 2010년부터 '예술가의 집'으로 사용 중이다.

출세의 관문

일본 교육의 역사는 선발 경쟁을 통한 학교 서열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학력이 신분 상승과 직결되었다. 따라서 선발시험이 경쟁을 격화시켰고 이는 곧 학교 서열화로 연결되었다. 모든 사람 하여금 계급 상승이동 야심을 갖게 함으로써 극렬한 경쟁을 끊임없이 가열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조선 유일무이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 설립으로 이런 폐단이 조선에도 가감 없이 이식된다. 실제 경성제대 조선인 졸업생들은 식민지하에서 '출세 보증수표'를 거머쥔 것으로 취급되었다. 여기에 민족차별이 가장 먼저 적용된다.

개교(1924) 당시 인구 1만 인당 조선인 학생은 0.6명인데 반해, 재조선 일본인은 19.1명이었다. 1942년이 되면 조선인 1.8명 대비 일본인 46.5명으로 차별은 더욱 확대된다.

같은 조선인이어도 입학이 자유롭지 못했다. 사상 및 신분 검증에 통과해야만 했다. 이는 일제에 순종하는 조선인 엘리트 집단이 자연스레 양산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들은 주로 식민지 수탈 최첨단 관료조직이나 공기업, 주요 권력기관에 진출해 자리를 차지한다. 식민 통치를 돕는 토착 권력 세력의 모체로 성장한다. 친일파 뿌리다. 이들이 해방 후에도 각 부문의 지배계급을 형성했다.

지금의 광적인 학벌주의와 왜곡된 교육 열풍 씨앗이 어쩌면 이때 뿌려졌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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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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