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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3일, 일본 오사카엔 비가 내렸다. 그날은 일본의 법정공휴일인 '천황탄생일(天皇誕生日)'이었고, 마침 대한민국 20대 대선 재외국민투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여기 저기 용무를 보고 난 뒤 녹초가 된 몸을 끌고서 단칸방으로 돌아왔던 나는, 뒤늦게 재외국민투표일이 시작됐음을 생각해냈다.

다시 외출하기에는 날씨가 참 고약했다. 영사관까지는 자전거를 타고 30분.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냥 쉬고 다음날 가서 투표하는 게 편안하고 합리적인 선택이었지만, 마음 속 어디선가 자꾸만 '어서 가서 투표하라'고 나의 신경을 흔들어댔다. 어떤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일지 몇 달 내내 고민하며 기다려오던 투표일이 아니던가.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켜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비를 맞으며 영사관으로 자전거를 달리니, 도착했을 때는 외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썩 쾌적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어떤 피로와 불쾌감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참정권을 행사한다는 기쁨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재외투표 했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투표 후 지지후보를 가족과 지인들에게 홍보하기도 했다. 해당 후보는 사퇴했다.
▲ 영사관에서 이루어진 재외국민 투표 필자는 투표 후 지지후보를 가족과 지인들에게 홍보하기도 했다. 해당 후보는 사퇴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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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동연 새로운물결 대선후보에게 투표했다. 이미 사퇴한 후보이니 누구를 찍었는지 밝혀도 무방하리라. 한국 정치판에서 견고한 양강구도의 폐해를 성토하며, 미래지향적인 정책을 제시하던 김동연 후보의 진정성을 믿었다.

당선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던지는 한 표가 대한민국의 '새로운 물결'을 만드는 데 작게나마 힘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에게 표를 줬다. 스스로의 선택이 뿌듯해서, 돌아가는 길에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 투표 사실을 자랑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의 훈훈함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삼일절 저녁,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통합정부' 구성에 합의했던 김동연 후보는 그 다음날 아침 후보직에서 사퇴하고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선거 완주를 공언해왔던 김 후보의 사퇴 소식을 쉬이 믿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언론보도들을 뒤지다가 이내 망연자실하게 됐다.

김동연 후보는 '붕어빵틀에서는 아무리 좋은 재료를 넣어도 결국 붕어빵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취지로 기존 정치체계의 바깥에서 혁신을 시도하겠다고 약속해왔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투표했다. 김 후보에 대한 나의 한 표가 거대 정당 후보들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길 소망했다.

그 소망이, 사퇴로 인해 그냥 무의미한 사표가 됐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견딜 수 없이 화가 나고 또 황망했다.

김동연에 이어 안철수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가 3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단일화 기자회견을 마친 뒤 포옹하고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대선 후보가 3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단일화 기자회견을 마친 뒤 포옹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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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후보의 사퇴에 이어서, 이제는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후보의 사퇴 소식을 듣는다. 이제 두 사람 다 후보가 아니니 호칭을 뭐라 해야 할지조차 난감하다. 하지만, 어쨌든 두 분 다 지금까지 한국 정치의 양강구조를 적극적으로 비판해온 분들이라는 점에서 무척 당혹스럽고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김동연씨의 사퇴로, 김동연 당시 후보에게 투표했던 내가 큰 상실감을 느꼈듯이, 안철수 당시 후보에게 투표했던 많은 유권자들 역시 지금 상심이 클 것이라 생각한다. 동병상련의 위로를 남기고 싶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안타까움을 담아 논평했듯이, '제3지대의 길은 정리된 것'처럼 보인다. 새정치를 말하던 사람들은 왜 이 최후의 국면에서 결국 기존의 소신을 꺾고 양강의 깃발 아래 몸을 숙이게 된 것일까. 김동연씨도, 안철수씨도,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결국 문제는, 단판으로 끝나는 지금의 선거 체제가 아닐까.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한 유권자들 모두가 이재명 후보와 그의 정책을 보고 결심을 굳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다는 유권자들 전부가, 윤석열 후보와 그의 정책에 마음이 움직여서 그를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양쪽에는 모두, 'OOO이 대통령이 되는 사태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어쩔 수 없이 '차악'으로서 지금의 후보를 지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 여겨진다.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선택하는 선거, 결코 낯선 이야기는 아니지만 너무나도 괴이한 상황이다. 국민으로서의 참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인, 그것도 국운에 직결되는 중대한 분기점인 대통령선거에서, 왜 유권자는 스스로가 원하는 최선을 선택하지 못하고 그저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일까. 선거가 단 한 번으로 끝난다는 현실이 문제의 근원이지 않을까.

심상정 눈물... 10년 뒤 한국은 나아졌는가
 
심상정 진보정의당 대선후보가 2012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후보직 사퇴를 선언하며 흐르는 눈물을 참고 있다.
 심상정 진보정의당 대선후보가 2012년 11월 26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선후보직 사퇴를 선언하며 흐르는 눈물을 참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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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권자들은 가급적 자신의 표가 사표가 아닌 유효표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지금과 같이 양강 후보들의 지지율이 호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군소후보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표 분산'의 요소로 작용한다는 비판과 단일화의 압력에 직면해야만 한다. 유권자도 후보도 자신의 신념을 온전히 펼칠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당시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막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진보정의당의 심상정 당시 후보는 대통령 후보 최종등록을 포기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당시 후보 역시 대통령 선거 완주를 포기했으므로, 결국 당시의 대선은 다양한 정책들이 경합하는 장이 아니라 양강만이 경쟁하는 독무대가 돼버렸다.

당시 후보등록을 포기했던 심상정 후보는 "우리 정치에서 매 선거 때마다 반복돼 온 후보단일화를 위한 중도사퇴는 이제 제가 마지막이 돼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과연 현실은 얼마나 더 나아졌는가.

다음 대선 전에는, 우리 사회에도 결선투표제가 적극적으로 논의되고 추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양한 후보들이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마지막까지 소신을 펼치는 선거가 되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차악이 아닌 최선을 뽑는 선거가 되기 위해서는, 결선투표제의 도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태그:#대선, #결선투표, #김동연, #안철수,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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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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