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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V자 형태로 송진을 채취한 곳에 시멘트를 부어 상처를 막았다
 소나무에 V자 형태로 송진을 채취한 곳에 시멘트를 부어 상처를 막았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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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부터 1945년까지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 기간 한국의 자연과 자원은 일본의 정치 경제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에 돌입해 1937년 제1차 인조석유 7개년 계획을 시행했다.

이 계획은 기업이 생산하는 석유만으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에너지를 얻고자 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정부 주도의 생산대책으로 송진 채취를 계획했다.
  
1941년 매일신보가 보도한 송진 채취 장면 모습
 1941년 매일신보가 보도한 송진 채취 장면 모습
ⓒ 국립산림과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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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산림과학원은 2017년부터 2018년 2월까지 일제강점기에 이뤄진 송진 채취 흔적을 지닌 소나무의 전국 분포 및 피해 현황을 조사했다. 결과는 문헌조사 21곳과 시민 제보 32곳을 합해 43곳이 나왔다.

일제강점기 시대 송진 채취 피해 소나무들은 V자로 패인 상흔이 최대 1.2m높이 까지 남아 있었다. 지역별 피해 정도는 인천, 울산, 평창, 남원, 제천, 서산 등이 있었지만 전북 남원과 충북 제천, 강원 평창지역에서 가장 피해가 컸다.

송진은 소나무과 나무에 난 상처에 흐르는 수액(resin)을 말한다. 소나무는 상처가 났을 때 증식하는 균이나 상처를 통해 침입하려는 다른 생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송진을 흐르게 한다.

소나무에서 분비되었을 때 끈적끈적한 액체 형태를 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딱딱한 고체가 된다. 고체 송진이 지질층에 묻혀 오랜시간 동안 압력을 받아 건조되면 호박(琥珀)으로 변하기도 한다. 한국 산촌마을에서는 송진을 약용, 식용으로 사용하였으며 집을 짓거나 도구를 만들 때 접착제로도 사용하였다.

지난 주(2월 23일) 남원향토사학자 김용근씨와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송진 채취 흔적이 보존된 남원시 대산면 왈길마을을 방문해 현장을 돌아보고 구전되어온 이야기를 정리했다.
  
왈길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송진을 채취당한 상처를 안고 있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50여 그루가 있다.
 왈길마을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송진을 채취당한 상처를 안고 있는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 50여 그루가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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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왈길마을 숲에는 모두 50여 그루에 달하는 노송이 살아있다. 수령 400년으로 추정되는 소나무에는 하나같이 송진을 채취한 상흔이 깊게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시절 왈길마을 구릉에 있는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어느 할아버지의 구술담이다.

"일본인 벌목사장의 지시에 따라 송진 채취해"

"어느 날 아침 벌목공 K는 일본인 벌목회사 사장으로부터 '일당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일자리가 있으니 일할 사람은 지원하라'는 말을 들었다. K는 벌목꾼보다 힘이 더 들더라도 돈벌이가 좋은 곳에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에 지원했다.

지원한 3명과 함께 일본인 집사를 따라간 곳에는 10여 명의 조선인들이 있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산림회사 회의실에서 송진채취 교육을 받은 그들은 다음날부터 일본인을 따라 다니며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는 작업을 했다.

K는 일본인 산림회사에 소속되어 지리산 일대 우량한 송진이 많이 나올 수 있는 곳을 조사하러 다니기도 했다. K가 실제로 송진을 채취한 곳은 왈길마을 구릉이었다."

1943년 한 해 채취한 송진 4074톤은 50년생 소나무 92만 그루에서 채취한 분량

논문 <송진채취 피해 소나무의 보전과 사회적 공유>에 따르면 일제는 1933년부터 1943년까지 한반도에서 9539톤의 송진을 수탈했다. 이중 1943년에 채취한 송진 4천 074톤은 1년 동안 50년생 소나무 92만 그루에서 채취해야 하는 양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송진 채취한 부분을 가까이 촬영한 모습. 생채기가 선명하다
 일제강점기 시절 송진 채취한 부분을 가까이 촬영한 모습. 생채기가 선명하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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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1937년 '제1차 인조석유 7개년 계획'에 따라 송진 수탈량이 크게 늘기 시작했다. 1937년 2.12톤에서 이듬해 32배 증가한 67.90톤으로 늘었고 1943년에는 1900배 급증한 4074톤에 달했다.

옛 어르신들은 새 생명이 태어나면 솔가지 금줄을 걸어 액운을 내쫒았다. 소나무 대들보 아래서 비바람을 피했고 송진을 태워 어둠을 밝혔다. 찐 솔껍질로 허기를 달랬고 솔잎을 담근 송화주로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어르신들의 마지막은 소나무관에서 잠들었다.

한반도에서 태어나 한국인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소나무에는 깊게 베인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상흔을 간직하고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살아있는 현장을 보며 나라 잃었던 식민지 시대 선인들이 겪었을 아픔을 되새겨본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송진채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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