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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 책들이 있다.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는 학술서나 난해한 문체의 문학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러워 읽는 독자조차도 그 아픔과 고통이 폐부를 찌르는 듯 느껴지는 책을 얘기하는 거다.
  
김잔디,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천년의상상, 17000원
 김잔디,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천년의상상, 17000원
ⓒ 천년의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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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는 왜 피해호소인이 되었나  

이 책,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저자 김잔디(가명)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다. 책에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저자에게 한 행동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중에는 언론에 의해 많이 알려진 성폭력에 관한 내용도 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도 있다. 책에 나온 증언들은 이렇다. 
 
"시장실에서 일하기 전에는 서울대병원에 가볼 일이 없었는데 시장실에서만 대리처방 때문에 다섯 차례를 방문했다. (중략) 한 번은 약사 선생님께서 워낙 특이한 이름을 보고 "시장님 딸이세요?"라고 물었고, 주변 사람들이 모두 쳐다봐서 심장이 쿵쾅거렸던 일이 있다. 당시에 나는 이 일이 불법행위인 줄 몰랐다."

"나는 가족이나 캠프 직원이 아니다. 그런데 왜 선거 캠프 회의를, 주요 차담을, 각 지역위원회나 지지그룹 방문 일정을 근무 시간 외(꼭두새벽, 늦은 밥, 주말) 시장실에서 진행하고 나는 그 일을 지원해야 했을까."

"... 2017년 1월 설이었다. 한 비서관께서 갑자기 명절 음식을 주문할 것을 요청하였고, 시청 부속 매점에서 구할 수 있는 햇반, 컵라면, 다과 등은 장부를 통해 주문했다. 그리고 현금을 주며 명동 OO백화점 지하에서 불고기, 김치, 나물, 국 등의 가족 식사를 위한 식료품을 구매할 것을 요청했다. (중략) 이런 일은 설, 추석 명절과 휴가 시기에도 주어졌다."

이는 비서 본연의 업무라고 보기 힘든 일들이다. 하지만 이 같은 '사적 노무'가 공공연하게 일어났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박 전 시장은 인권변호사와 시민단체 출신이다. 그런 만큼 박 전 시장은 자신의 죗값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택했다. 끝까지 피해자를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결정이었다. 한편, 국가인권위원회는 약 6개월여의 조사를 진행한 끝에 지난 2021년 1월 "박 전 시장이 성희롱에 해당하는 성적 언동을 했다"고 결론 내렸다.

저자는 박 전 시장의 죽음 이후 자살 사고(思考)와 공황 증세로 두 차례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피해자 입장문을 두 번 발표했다. 계속되는 2차 가해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자의 증언 이후, 2차 가해는 끊이지 않았다. 저자가 시장실에서 일할 당시의 모습을 악의적으로 편집된 동영상이 공개되자 저자는 다시 한번 입장문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가해자의 잘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들은 집요하게 피해자를 당시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특히 책 제목에도 나와 있는 '피해호소인'이라는 단어는 저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부르는 그들의 마음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어떤 악의가 있어야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부주의한 게 아니었고 의도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의 야만적인 이기심에 가슴이 쓰라렸다. 나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의 피해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인가. 나는 그냥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다."
 
피해자를 지켜준 '마음들' 

이러한 2차 가해로부터 저자를 보호한 건 연대의 마음이었다. 매일 같이 누나의 이름이나 사진이 올라오는지 인터넷 세상을 모니터링하고 신고했던 동생의 마음, '힘내지 않아도 괜찮아'가 아니라 '힘내지 말자'라며 위로를 건넨 15년 지기 친구의 마음, 서울시에 복직하려는 저자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 준 상사의 마음, 저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단호히 얘기하고 288개나 되는 단체가 저자와 함께 공동대응하겠다고 나선 여성단체들의 마음. 수많은 이들의 마음이 연대해 저자를 2차 가해로부터 지켜주고자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병상련의 처지인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김지은씨와의 만남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날 우리는 함께 웃었다. 웃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웃을 일도 없었지만 그냥 웃었다. 함께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감사했다. 아픈 기억을 깨끗이 지을 수는 없겠지만 웃음으로 덮을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혼자는 웃을 수 없겠지만 함께는 웃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참 다행이다."
 
이러한 연대를 통해 저자는 찬찬히 자신의 일상으로 회복하고 있다. 치열한 생존의 기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저자는 출간 이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책을 출간한 이유로 "'이 일을 내 목소리로 정리하고 싶다. 세상이 믿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내가 겪어낸 그대로, 나의 목소리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까지도 피해자의 목소리는 여러 압력에 의해 묵살되고 흩어지기 일쑤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또 피해자가 피해 이후 평범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정치권과 대중 모두 노력해야 한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아픈 책'이 나와야 하겠는가. 저자의 출간 이유와 같은 이유로 출판되는 책이 한국 사회에 더 이상 나오질 않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책의 한 구절을 옮긴다. 아마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지점을 짚고 있는 대목이라 생각한다.
 
"제가 죽으면, 저의 피해를 인정해주지 않을까요. 그러면 저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고 여성운동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셨다.

"잔디, 잔디가 다른 무엇보다 제일 소중해요. 여성운동이 10년 후퇴한다고 해도 잔디가 제일 중요해요. 마음 강하게 먹어요."

눈물과 콧물이 수돗물처럼 흘렀다. 모두가 내가 죽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내가 죽으면 오히려 여성운동에 큰 전환점이 되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못된 생각을 안아주시며 내게 말씀하실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셨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너무 죄송하다.

나는 감사하게도 이 말을 자주 되뇐다. 여성운동 10년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존엄성.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운동 10년을 다 바쳐서라도 구하고 싶은 나의 존엄성. 세상의 수많은 피해자분들도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동일한 위로를 느꼈으면 한다. 우리는 반드시 더 잘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다.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 - 박원순 성폭력 사건 피해자가 살아낸, 끝날 수 없는 생존의 기록

김잔디 (지은이), 천년의상상(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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