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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부산발전연구원(현 부산연구원)은 '부산관광의 새로운 기획,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이라는 보고서를 낸다. 여기에는 '특별한 경험, 체험형 관광 욕구'가 높아지는 것이 최근의 관광 트렌드라고 나와 있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의 왜성부터 일제강점기 만세운동 집결지,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 임시 관저와 부산 민주화 거리까지 다양한 예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장소들이 점차 '소멸 또는 해체' 되고 있다며 안타까움도 표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당시 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로 대표되는 부산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형무소 터의 작은 사진 한 장을 제외하고는 관련 내용이 거의 전무하다. 물론 보고서의 내용들은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고 향후 더 많은 장소를 발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관련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의아했다. 그런데, 현장을 직접 다녀보니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부산형무소의 수상한 이감 기록

한국전쟁 전후, 대대적인 사상범 검거로 전국 형무소에는 재소자가 급증한다. 이는 부산형무소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이전 부산형무소는 수용 정원이 1500~1600명 정도였고, 근무 인원은 180여 명이었다. 그러다가 1948년에는 재소자가 2000명을 넘었고, 1950년에는 2500명을 넘었다. 비좁은 감방에 20명이 넘는 인원이 수감되어 재소자들은 앉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으로 잡혀온 인원들이 계속 들어오자 수용 공간은 더 부족해졌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됐다.

첫 번째 방법은 형이 낮은 일반사범들을 석방하는 것이었다. 1950년 1월부터 전쟁 직전까지 석방된 인원은 총 576명이었다. 그런데 전쟁 직후인 7~8월 동안 석방된 사람은 767명이었다. 그중에도 8월 2일에서 6일 사이에만 236명이 석방됐다. 이들은 대부분 가석방이나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두 번째 방법은 재소자들을 '정리(이감)'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수용 공간 확보의 목적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생긴 빈 공간은 보도연맹원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들도 곧 정리된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여러 번에 걸쳐서 대규모의 재소자가 이감됐다. 1950년 7월에는 468명이 이감됐다고 나온다. 하지만 당시 이감이 가능한 형무소는 마산과 대구뿐이었는데, 여기에는 입감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리고 9월 25일에는 재소자 1450명이 이감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중 507명은 대구 형무소에 입감됐다는 기록이 있지만, 나머지 943명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이감으로 정리된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5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서구 동대신동)
▲ 부산 형무소 터의 현재 모습  5층짜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서구 동대신동)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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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사람들의 운명

1950년 7월부터 형무소 당국은 육군방첩대(CIC)와 헌병대에게 재소자들을 인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소자들에 대한 진짜 정리, 즉 처형이 이뤄진다.

첫 번째 학살은 7월 26일부터 30일까지 일어났다. 좌익사범들이 우선이었는데, 증언에 따르면 매일 밤마다 한 방에 수용돼 있던 사람들을 통째로 트럭에 태워서 갔다고 한다.

두 번째 학살은 8월 2일부터 3일, 양일 간에 걸쳐 일어났다. 이때 헌병대는 109명의 재소자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재소자의 손을 묶고 눈을 가린 다음 트럭에 태워 어딘가로 떠났다. 첫 번째 학살 때는 그래도 20년형 이상을 받은 재소자들을 가려서 데려갔다면 이번에는 감방 문을 열고 잡히는 데로 끌고 갔다. 이중에는 아직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도 포함돼 있었다.

세 번째는 9월 25일에 일어났다. 앞서 이감됐다고 했던 1450명 중 943명이 이때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트럭 한 대당 30~40명을 태운 다음 떠났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구덩이를 판 다음 끌고 간 사람들을 밀어 넣고 군인들이 총을 쏘았다고 한다. 그리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다시 구덩이를 덮었고 빈 트럭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이감되었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부산형무소 사건은 1500여 명이 희생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여기에 미확인 희생자까지 더한다면 수는 훨씬 더 늘어난다.

이런 대규모 학살은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 금지령을 내리면서 겨우 중단됐다. 전쟁 초반 겁을 잔뜩 먹고 자국민까지도 적으로 간주해 학살 명령을 내렸던 대통령이 전세가 우세해지자 약간의 여유를 찾은 것이다. 만약 서울 수복이 늦어졌다면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 군사 고문단의 기록을 보면 한국군 3사단이 부산형무소 재소자 3500여 명을 학살하려고 시도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고문단이 인민군은 부산까지 오지 못할 것이고, 만약 진짜 학살을 저지른다면 UN감사단에 보고하겠다며 저지한다. 하지만, 이와 함께 인민군이 부산 외곽까지 밀고 온다면 형무소 문을 열고 기관총으로 사살할 수 있게 허락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들의 마지막 장소, 그리고 지워진 흔적들

부산형무소에 갇혀 있던 재소자와 보도 연맹원들은 형무소와 부산 곳곳에서 살해된 후 매장되거나 버려졌다. 주요 장소로는 동매산(사하구 구평동)과 장산골짜기(해운대) 그리고 오륙도 해상 등이 있다.

부산형무소 옛 터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는데 형무소와 관련된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장산골짜기 역시 해운대구 신시가지가 개발되면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공사 당시 유골이 나왔지만 추가 조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도 없고 해당 사건에 대한 어떠한 표식도 없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희생자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 장산골짜기의 현재 모습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희생자와 관련된 어떠한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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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매산은 160여 명이 학살되어 매장된 것으로 확인된 곳이다. 여기는 2002년에 <부산일보> 김기진 기자와 유족들이 사비를 들여 처음으로 일부 유해를 발굴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여러 길로 올라가봐도 현재 해당 장소에 대한 안내나 표식은 찾을 수 없었다. 산에서 만난 주민들과 산불감시원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또한, 오륙도 해상에서 수장된 사람들의 시신은 대마도까지 떠내려가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현재 부산터널(중구 영주동) 위 야산에도 구덩이를 파고 희생자들을 파묻었다. 이 모습은 당시 주민 수십 명이 생생하게 목격했다. 주민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렇게 많이 죽이냐며 의아해 했다. 이곳 역시 현재는 많은 건물이 들어서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다대포와 광안리 바다에서도 사람들을 수장했다고 한다.    
 
  산에서 만난 주민들과 산불감시원에게 물어봤지만, 학살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는 없었다.
▲ 동매산 중턱의 체육시설  산에서 만난 주민들과 산불감시원에게 물어봤지만, 학살장소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는 없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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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위 야산에 희생자를 묻는 모습을 주민들이 목격했다. 많은 건물이 들어서 이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부산터널  터널 위 야산에 희생자를 묻는 모습을 주민들이 목격했다. 많은 건물이 들어서 이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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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서에 등장하지 않은 이유

피카소의 작품 중에 <게르니카(Guernica, 1937)>가 있다. 이 그림은 나치가 스페인의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하여 민간인 1500명 이상이 희생된 사건을 비판하고 있다.  희생자의 수로 학살 사건의 경중을 따질 수는 없지만, 부산형무소 재소자 학살은 이에 버금갈 만큼 큰 사건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흔적들은 대부분 사라져서 잊히고 있었다. 부산시에서 운영하는 부산역사문화대전 홈페이지에는 동매산이 '부산 지역에서 발생한 여러 집단 살해 사건 가운데 유일하게 유골을 발굴하여 사실 관계가 확인된 현장'이라고 설명돼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희생되었지만 지금까지 동매산 외에 유해 발굴이나 사후 조치 등이 거의 전무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앞서 언급했던 부산발전연구원의 보고서에 부산형무소 사건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도 일견 이해가 됐다. 처음에는 이 큰 도시에 이렇게 흔적이 없다는 것에 황당했지만, 곧 그동안 무관심했던 자신에 대한 반성이 뒤따랐다. 결국 현재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무관심과 외면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해당 보고서에는 다크 투어리즘의 목적이 '역사 장소나 사건·사고 현장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기억하고 반성하며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제라도 이 목적이 이뤄질 수 있게 우리 모두의 반성과 관심이 더 커지길 바라 본다.
     
  이 앞바다에서도 사람을 수장했다는 증언이 있다.
▲ 광안리 해변  이 앞바다에서도 사람을 수장했다는 증언이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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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박경옥(2019), <부산관광의 새로운 기획,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 BDI 정책포커스(355), 1- 16
박찬승, <마을로 간 한국전쟁>, 돌배게
부산문화대전 홈페이지
전갑생(2010), <6.25전쟁 중 자행된 무차별 사형집행 - 학살의 아버지 이승만의 명령 전쟁 중 재소자 사형집행 서 둘러라!>, 민족21, 108-115
진실화해위원회, <부산ᆞ경남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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