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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대'를 아느냐고 지인들에게 물었더니 '돈데보이' 노래는 아는데 돈대는 모른다며 '돈데보이 돈데보이' 노래를 부른다. '돈데보이(Donde Voy)'는 애잔한 멜로디의 멕시코 노래로 우리나라에서도 TV 드라마 음악으로 쓰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곡이다. 그 '돈데'와 내가 말하는 '돈대'는 전혀 다르지만 둘 다 애잔한 마음이 든다는 점에서는 일면 공통점이 있는 것도 같다.

돈대는(墩臺)는 주변을 잘 관측할 수 있도록 평지보다 높은 평평한 땅에 설치한 소규모 군사 기지를 말한다.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접경지역 또는 해안 지역에 주로 만들었다.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에 돈대 2개소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1796년(정조 20년)에 축성된 수원 성곽에는 3기의 돈대가 설치되었다.   

돈대의 고장, 강화도 
 
강화군 하점면 망월돈대
 강화군 하점면 망월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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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화도면 후애돈대
 강화군 화도면 후애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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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강화도에 방문했다. 이곳엔 무려 54개의 돈대가 있다. 조선 숙종 5년에 48개의 돈대를 만들었고 그 후로도 계속 쌓아서 모두 54개의 돈대가 강화를 호위하고 있다.

강화도의 경우 해안가 툭 튀어나온 언덕에 돈대가 주로 있는데, 주변 관측과 방비에 유리한 지형에 설치한다는 돈대의 목적상 해안가 언덕은 최고의 적지였음이 분명하다. 이것으로 봤을 때 강화는 과연 돈대의 고장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강화도의 해안선 둘레는 약 100여 킬로미터인데, 2킬로미터마다 돈대가 하나씩 있는 꼴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많은 돈대를 강화도에 만들었던 걸까. 342년 전인 숙종 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조선 19대 왕인 숙종(재위 1674년∼1720년)을 떠올리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생각난다. 숙종의 치적은 떠오르지 않고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 모략만이 떠오를 뿐이니 드라마를 너무 열심히 보았나 보다.
 
강화군 화도면 분오리돈대
 강화군 화도면 분오리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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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불은면 용두돈대
 강화군 불은면 용두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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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14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는 아직 나라가 병자호란의 침탈로부터 회복되지 않았을 때였다. 청나라가 쳐들어와서 조선의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살육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라의 형편은 어렵기만 했고 주변 정세 역시 어지러웠다.

숙종은 나라의 방비를 튼튼히 할 것을 주문했다. 영의정 허적의 청을 받아들여 강화도에 돈대를 쌓도록 결정했다. 그해(1678년) 10월에 병조판서 김석주를 강화도에 보내 돈대를 쌓기에 알맞은 장소를 살피게 하고 11월 4일에 강화 돈대 설치 시행 지침을 담은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을 반포한다.

김석주가 올린 후록(後錄)에 보면 돈대의 형태와 규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치첩은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개소, 좌우에 포혈 각 1개소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연인원 1만5000여 명이 투입된 대공사 
 
강화군 화도면 장곶돈대
 강화군 화도면 장곶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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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하점면 무태돈대
 강화군 하점면 무태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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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음력 12월 1일, 강화도에 돌을 다루는 석수(石手)들이 들어온다. 돈대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석재(石材)가 필요하다. 다행히 강화도와 인근 섬의 산에는 바위가 많아 돌 공급에는 큰 애로사항이 없었다.

돌을 쪼개고 운반하는 팀이 강화도로 들어왔다. <비변사등록>에서 보면 석수가 400여 명, 대장장이가 50여 명에다 그들을 돕는 일꾼들까지 해서 총 1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또 쪼갠 돌을 실어 나르는 배도 75척이나 투입되었다. 각각의 배를 모는 사공과 사공을 돕는 격군 2명씩 해서 모두 220여 명의 사람들도 같이 왔다. 돈대 쌓기에 앞서 돌을 깨고 나르는 데 만도 1600명 이상의 사람이 강화로 와서 작업에 들어갔다.

자,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자. 음력 12월이면 양력으로는 1월 쯤이 된다. 강화의 겨울은 춥다. 김포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바다도 얼어서 유빙이 흘러내려갔을 것이다. 그렇게 추울 때 바위를 깨고 나르는 일을 했다. 바위는 산에 있으니 평지보다 더 추웠을 것이다. 특별한 방한용품이나 보온 장비도 없이 오로지 맨 손으로 돌을 쪼아 깼을 선인들을 생각하니 돈대를 대하는 마음 자세가 달라진다.
 
강화군 길상면 초지돈대
 강화군 길상면 초지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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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불은면 오두돈대
 강화군 불은면 오두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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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톳불을 켜두고 곱은 손을 쬐어가면서 일을 했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강화의 온 산에는 돌 쪼는 소리가 쨍쨍 들렸을 것이다. 민족의 영산이라 불리는 마니산은 물론이고 돈대가 들어서는 곳 근처에 있는 산은 대규모 공사로 몸살을 앓았을 듯하다.

지난 2월 15일은 음력으로 1월 15일, 정월 대보름날이었다. 각종 나물과 오곡밥을 해서 먹으며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날이다. 342년 전 정월 대보름날에도 보름나물과 오곡밥을 먹었을까. 언 손을 녹여가며 돌을 깨고 날랐을 일꾼들이 이 날 하루만이라도 배 불리 먹고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월곶돈대
 월곶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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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54개 돈대
 강화도 54개 돈대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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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의 돈대들을 찾아가 보자. 한겨울 추위와 싸워가며 돌을 깨고 날라 만든 돈대들이다. 연인원 1만5000여 명이 달라붙어 80여 일 만에 쌓은 대공사다. 돈대 앞에 서면 그 장엄한 역사 앞에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범의 해인 임인년 올해는 돈대를 찾아가는 해로 만들어 보자. 강화도 해안을 굳건히 지켜주었던 돈대들이다. 한양을 수호하고 우리 땅, 우리 민족의 안녕과 보존을 위해 쌓았던 돈대들이다. 돈대를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을 우리 함께 힘차게 내디뎌보자.

덧붙이는 글 | '강화뉴스'에도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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