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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갔다가 계산대 앞에서야 카드를 안 들고 나왔다는 걸 알았다. 양손으로 주머니를 몇 번씩이나 뒤져보았지만 결제 카드가 없었다. 멋쩍게 웃으며 마트를 나왔는데 괜히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요즘은 왜 자꾸 별일 아닌 것에도 눈물이 찔끔찔끔 나오는지 모르겠다. 건망증도 점점 심해지고 있다.
    
워낙 건망증이 심해 휴대전화만 챙기면 잘 챙겼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설에도 결국 본가에 두고 온 물건이 생겼다. 당장 필요한 휴대용 정수기와 하루에 두 번씩 먹어야 하는 식이섬유였다. 식이섬유야 약국 가서 다시 사면 되지만 휴대용 정수기를 다시 구입하는 건 생각해볼 문제였다. 일단 비상용 생수를 마시기로 했다.    

다음날 약국에 식이섬유를 사러 갔다가 다른 물건을 두고 오는 실수를 또 하고 말았다. 전화를 걸어 부탁해 놓았지만 건망증이 심해져서 걱정이다. 지갑을 잃어버린 적도 여러 번이고 휴대전화를 두고 다닌 적도 많다. 한 번은 휴대전화를 집에 놓고 나갔다가 하루 종일 연락 두절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와 이모가 난리 나기도 했었다.     

건망증으로 아찔했던 최고의 순간은 아파트 현관 열쇠 사건이다. 아침에 외출하려고 현관 열쇠를 찾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서랍 옷 탁자 위 있을만한 곳을 다 뒤졌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열쇠 업체를 부르려 밖으로 나갔는데 현관 문밖에 열쇠가 꽂혀있었다. 아파트 현관 열쇠가 밤새 밖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안에서 열심히 문단속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었나 싶은 게 섬찟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었다.   
  
심한 건망증 때문에 엄마에게 잔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런 엄마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자식들이 가고 난 후 방을 둘러보면서 두고 간 내 물건이 보였나 보다.
    
"물통(휴대용 정수기)하고 네가 먹는 약(식이섬유)을 또 안 갖고 갔더라." 
"어, 그거 별로 중요한 거 아니니까 그냥 거기 두세요."
    

엄마한테 한소리 들을 것 같기도 하고, 또 언제 갈지 몰라서 그냥 두라고 했지만 급한 물건이긴 했다. 정수기가 없으면 당장 생수를 주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걸 가지러 먼 거리를 다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전 같으면 한소리 했을법한 엄마가 잔소리를 안 한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부터 엄마가 내 나이 50이 넘었다며 이젠 애가 아니니 나잇값을 쳐줘야 한다는 말을 하곤 했다. 나잇값이라는 게 아마 갱년기를 말하는 거 같다. 얼마 전 평생 화 안 번 안 낸 내가 엄마에게 화를 내고 생떼를 부리며 괴롭힌 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그때 나를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론, 나잇값을 쳐주는 것 같았다.  
   
나잇값을 인정해준다고 느낀 첫 번째 순간은 이번 설에 명절 떡을 나에게 맡기지 않았을 때였다. 이번엔 놀랍게도 방앗간에 떡을 주문해 놓으셨다고 했다. 50 평생 내가 맡아온 '방앗간에서 떡 만들어오기'에서 해방된 것이다. 엄마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나에게 미안하셨던 걸까. 70 평생 뭐든지 직접 하셔야 정성이라는 엄마가 떡을 방앗간에서 주문했다는 사실은 큰 변화였다. 놀라운 변화에 나는 박수를 쳐 주었지만 엄마는 뜨악해하셨다.   
   
나잇값을 쳐준 두 번째는 일화는 토종꿀과 관련돼 있다. 엄마가 토종꿀을 사주셨다. 나이 든 딸 면역력에 좋다고 올 설 명절에 선물로 주셨다.   

"엄마, 꿀 효능은 다 똑같대,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토종꿀 사지 마. 비싸기만 하지."

그러자 엄마는 "그래도 토종꿀이 좋지. 너 예전에 오빠 줄려고 샀던 토종꿀 네가 다 먹고 속이 좋아졌다고 했잖아"라고 말했다.

"아 맞아 그때 오빠 줄려고 사놨던 토종꿀 내가 다 먹었지."
   
엄마는 아들 주려고 사놨던 꿀을 딸이 먹는다고 차마 못 먹게 할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이번엔 오빠 것이랑 내 것, 두 개를 샀다고 했다. 비싼 토종꿀을 먹으면서 엄마의 마음 깊은 곳까지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괜히 울컥했다.   
    
나잇값을 쳐준 세 번째 일화는 택배와 관련돼 있다.  본가에 두고 온 정수기를 완전히 포기하고 생수 주문을 완료했을 즈음, 공교롭게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정수기랑 약을 택배로 보냈으니 내일 도착할 거라고 했다.
   
원래 택배를 잘 부치지 않는 엄마인데 엄마는 그 물건이 내게 필요한 것임을 눈치 채신 모양이다. 택배 포장하느라 힘든 걸 알면서도 속으론 꽤나 반갑고 고마운 일이었다.     

"엄마, 안 보내도 되는데 힘들게 뭣하러 보내, 깨질 수 도 있을 텐데". 그러자 엄마는 "응 그럴까 봐 속을 꽉 채우고 스티로폼, 아이스 박스에 단단히 끼워 넣었어"라고 하셨다.      

택배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 혼자 들기엔 무거워 박스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박스를 열자 속이 꽉 채워져 있었다. 정수기, 식이섬유, 사과, 바나나, 과자, 만두, 손수 만든 밑반찬까지 박스 구석구석을 채워 보내왔다.

작은 빈틈을 채우려 낡은 신문지도 꼬깃하게 끼워져 있었다. 뭐든 대충인 나와는 달리 늙은 엄마가 꼼꼼하게 택배를 포장해서 보낸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이 탓인지 요즘엔 자꾸 마음이 먼저 울컥해져 눈물이 나온다.    
   
사실 10년 전, 양손에 들려주신 백숙 한 마리도 아직 못 먹고 있다. 식성이 좋지 못해 손도 대지 못한 백숙이다. 오래되었지만 차마 버리지 못해 아직까지 그릇째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젠 먹기에도 너무 늦었지만 그 백숙은 아마도 영원히 버리지 못할 것 같다. 냉동실에 보관되어 있는 백숙을 볼 때마다 숙연해지고 미안해져 엄마가 보내온 음식은 남김없이 다 먹으려 노력한다.
     
"엄마 왜 이렇게 많이 보냈어 많이 먹지도 못하는데."
"박스 무거울까 봐 조금 넣었는데 뭘."
"자꾸 나만 챙기면 어떡해?"
"다른 애들은 결혼해서 서로 챙겨줄 사람이 있지만 너는 혼자잖니? 잘해 먹고 살아! 건강이 최고다."     


그 말을 듣는데 또 눈물이 날 뻔했다. 76세 엄마가 시집 안 간 53세 딸에게 해주는 말이다. 딸이 엄마에게 해줘야 할 말 같은데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분명 엄마는 이전과 조금 다른 마음을 내게 쓰고 계셨다. 늙은 엄마가 늙어가는 딸의 갱년기를 위해 마음을 양보하며 배려하고 계셨다. 평소에도 한없이 주셨지만, 더 챙겨주고 계셨다.    

돌이켜보니 엄마의 갱년기 때 나는 서른 즈음, 엄마가 처음 고혈압 판정을 받고 약을 복용할 때쯤인 거 같다. 보건소에서 타 온 약 뭉치를 받아 들고 속상해서 한참을 말없이 계셨던 엄마.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건 그저 엄마의 일이라고만 여겼다. 한 번도 엄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뭐든 받는 것은 당연하고 내가 주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내가 그 나이 되어 챙길 약들이 많아지면서 힘들어 눈물 콸콸 쏟으면서 엄마를 괴롭힌 기억이 바로 작년이다. 엄마는 그런 나에게 그게 다 '나잇값'이라고 했다. 엄마의 갱년기엔 관심조차 없었고, 차려주는 밥상에 반찬 투정이나 할 줄 알던 철없고 이기적인 딸을 보며 홀로 그 시기를 버티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평생 자식한테 화 한번 내본 적 없으시고, 자식들에게 받기보다 여전히 주고 계시는 바보 같은 엄마. 엄마의 황혼 노년엔 내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으로 다가가야 한다. 엄마가 아무 조건 없이 내게 주셨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 또한 언젠가 나의 건망증이 심해져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산이 그 산 같은 날이 올지라도 엄마의 마음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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