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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자라면서 부모의 틈새를 찾는다. 손주 '로하'에게 그곳은 외가가 있는 군산이다. 명절에 내려 올 계획을 앞두고 손주에게 바람을 넣은 모양이었다. 그날부터 손주 입에서 군산 가고 싶다는 말이 떠나지 않자 딸이 전화를 했다. 애달아하는 아들에게 하루라도 일찍 군산에 데려다주고 싶다며 우리 사정을 물었다.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손주의 '군산 타령'이 기특하기만 했다.

사실 마음이 들뜨기로는 우리가 더했다. 남편은 '꽃게밥'을 기억하는 손주를 위해 새벽시장에서 꽃게를 사 오고 나는 잠자리를 살피고 먹거리 등을 떠올리며 종종걸음이 되었다. 공놀이하기 좋게 거실 소품을 치우고 3박 4일간 집밥으로 해결해야 할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의 모든 일정은 딸네 가족을 위해 비워 놓았다.

오랜만에 만난 다섯 살 손주는 키도 컸고 말솜씨가 제법이었다. 지난 추석에 비해 판이하게 달라진 손주에게 눈을 떼지 못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더니. "보통이에요." 언어 구사력에 놀라는 내게 딸과 사위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놀이터에 나가보면 또래들과 비슷하단다. 그러거나 말거나. 콩깍지가 씐 우리 부부에게 알지도 못하는 또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할아버지, 할아버지랑 할 거야."

거의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양치하는 문제를 놓고 손주는 할아버지 손길만을 원했다. 사위의 품에서 양치를 하다 마음이 토라져 반항하고 있는 중이었다. 도와주러 달려갔지만 양보할 의사가 없어 보이는 사위의 태도를 존중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할아버지 힘만 믿고 버릇없이 구는 게 역력했다. 둘의 실랑이가 한참이나 진행되다 어찌어찌 마무리가 되었고 화장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손주는 할아버지 방으로 달려갔다. 눈물로 얼룩진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운지 속이 상했다.

딸이 서너 살 무렵이었다. 그 날 나는 딸에게 뭔가를 나무랐고, 옆에 계신 시부모님도 보고 있었으니 아이의 잘못에 대해 내편일 거라 여겼다. 말없이 듣고 있던 어머님이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애미야, 나 있을 때는 애 혼내지 마라. 내가 마음이 아프다."

나를 타이르는 어조였고 조용한 부탁이었다. 할머니 마음을 알 수 없는 젊은 나이였지만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진심으로 다가왔다. 이 후, 부모님이 계실 때는 조심했다. 삼십년도 훌쩍 지난 일이지만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 날 어머님의 심정이 세월을 훌쩍 뛰어 내 가슴 속에 들어왔다.

손주는 할아버지가 무릎 연골 수술로 안아줄 수 없다는 걸 알 리가 없었다. 기어이 할아버지 품에서 양치를 하겠다는 의지는 무산되었지만 유튜브 동화는 허락되었다. 유난히 할아버지를 따르는 손주와 나란히 누워 동영상을 보는 시간이 얼마만이던가. '행복한 순간이란 바로 이런 거야.' 남편의 표정이 손주와 닮아 있었다.

양육은 부모 몫이지만

다음 날, 남편은 라면 사리를 사러나갔다. 꽃게탕에 끓여 먹는 라면이 최고라는 사위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작은 동네마트라 하더라도 달랑 라면만 사올 리 없는 남편은 아니나 다를까 지난번 손주가 즐겨먹던 수박바를 끼워 넣었다. 하나만 살 수 없다. 천 원에 세 개.

아이스크림 세 개를 자랑스럽게 들고 들어오는 할아버지 앞에 손주는 좋아서 펄쩍 뛰고 사위는 정색을 했다. 일순간 남편과 손주의 웃던 입은 얼음이 되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모두 사위를 바라봤다. 겨울이라 그런지 요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설사를 한다는 거였다. 저런! 말 한마디 못하고 풀이 꺾인 둘은 손을 잡고 방으로 후퇴했다.

몇 시간이 흐른 후, 남편은 슬그머니 나와 냉장고 앞을 서성였다. 싱크대에 있던 내 뒤꼭지에도 뭔가 잡히는 게 있었지만 모른 척 했다. '에구, 알아서 하겠지.'

"할아버지, 수박바 먹고 싶어요." 그 앙증스러운 입으로 속삭이는 손주의 소망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편은 궁여지책으로 딸의 허락을 받았다. 조심스럽게 주방 쪽을 살피더니 수박바를 들고 뒷짐을 진채 사라졌다. 미션 성공.

수박바를 손주 손에 쥐어 주며 천천히 빨아먹으라고 신신당부하는 할아버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새빨개진 입술로 만면에 함박웃음 짓는 손주. 굳게 닫힌 방문을 살짝 열어보고는 이내 나왔다. 웃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뼈만 남았을 때, 사위가 알아차렸다. 어쩌겠는가. 난감한 표정이었지만 장인어른의 체면을 살려주려는 듯 넘어갔다. 다행히 설사는 없었다.

양육은 부모 몫이다. 멀리 사는 조부모야 예뻐하면 그만이지만 책임은 부모에게 있으니 뭐든 물어보게 된다. 뭘 먹일까, 어디를 갈까, 잠은 언제 재워야 하는지 등. 딸 사위도 대부분 아들의 의견을 따라주려 하지만 어느 부분 안 되는 게 당연히 있다. 아이는 아직 그 갈림길에서 혼란을 겪는 것 같다. 떼를 써도 안되는 게 있다는 걸 차츰 알아 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육에도 예외가 있다고 말하고 싶은 할아버지 할머니.

"얘들아, '로하'가 우리랑 있을 땐 좀 눈감아 주렴."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및 브런치 게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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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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