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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아침은 살얼음을 깨듯 미명을 걷어내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내민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변이종 오미크론이 급속히 확산하여 10일 현재 신규 확진자가 5만 명을 훌쩍 넘겼다는데 여전히 태양은 뜨고 어김없이 하루가 시작된다. 아파트 창 너머 도시는 겉으로 보기엔 그지없이 조용하고 평온한 아침이다.

라디오에선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가 부드러운 선율로 방안을 가득 채운다. 이젤 위에 수채화용 도화지를 올려놓고 어제 유튜브에서 검색해 둔 설경을 2B연필로 가볍게 스케치해 나간다. 익숙하지 않아 더디고 서툰 손놀림이다.

지난해 말 은퇴하면서 겨울 한 학기 동안 문화센터 초급반에 등록해 시작한 수채화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서너 번 나가고 말았는데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이렇게 짬 나는 시간 유튜브를 보고 독학을 한다. 요즘 같은 언택트 시대에 유튜브 만한 교구가 없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걸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밑그림이 정확하고 섬세해야 한단다. 그렇다고 너무 진하거나 도드라져도 안 된다. 스케치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색칠 준비에 들어간다. 물을 뿌린 도화지 위쪽에 옅은 울트라마린을 칠하고 코발트블루로 그라데이션을 해준다. 물감이 생각처럼 번지지 않고 물자국이 생긴다. 아직은 훈련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수없이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아이의 걸음마는 성장하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지만, 나의 그림 공부는 내 남은 생을 풍요롭게 해줄 즐거운 창작 활동이다. 너무 늦지 않은 나이에 해보고 싶었던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 아닐 수 없다.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101세까지 살면서 미국의 국민 화가가 된 안나 마리 로버츤 모지스. 75세에 신진 작가로 선정돼 86세에 슈퍼스타 작가로 등극한 영국의 로즈 와일리. 그리고 전라남도 광양의 작은 집, 작은 거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95세 김두엽 할머니.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결혼과 동시에 엄마로 살아가다가 70세가 넘어서 그림이라는 재능을 찾아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그들은 늦은 나이에 뭔가를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깨달음을 주는 동시에 100세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유쾌하고 가슴 떨리는 메시지를 전한다.

김두엽 할머니는 83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난한 탓에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 할머니는 그림 또한 배운 적이 없단다. 할머니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입소문이 퍼져 낮에는 택배기사로 일하고 밤에는 그림을 그리는 막내아들 이현영씨와 함께 소규모 전시회를 십여 차례 열었다. 2019년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극장> 등 여러 방송에 출연하며 유명인이 됐다. 최근 자신의 삶과 그림을 이야기하는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입니다>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멋있고 아름다운가. 그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 젊고 너무 일찍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내 노년을 생각하면 벌써 가슴이 뛴다. 다만 내 열정과 의지력이 문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열정도 필요하지만 의지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이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결심을 하고 얼마나 많은 시작을 했던가. 그들 중 단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지금쯤 그 분야에서 전문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수준급에 이르렀을 것이다.
 
최근 서툰 솜씨로 그린 겨울풍경의 수채화 습작이다.
▲ 수채화 습작 겨울풍경 최근 서툰 솜씨로 그린 겨울풍경의 수채화 습작이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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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림을 시작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30대 중반쯤에 수채화에 관심이 있어 백화점 문화센터에 등록하고 두어 달 정도 열심히 다녔었다. 물 조절을 통해 다양한 색상을 구현하는 기법이 나를 그 세계로 이끌었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 그만뒀는지는 기억에 없으나, 그때 구입했던 화구를 지금 사용하고 있다. 5~6년 전에는 직장 근처 평생교육원에서 한 학기 정도 퇴근 후에 데생을 공부하기도 했었다. 내 안에서 그림에 대한 열망이 늘 꿈틀거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음악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바뀌었다. 애절하지만 감미로우며, 화려하지만 진솔한 음률이 붓칠하는 손에 힘을 불어넣는다. 그 외에도 서예를 배운다고 학원에 등록했으나 그것도 관심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고 그만뒀다. 지금도 서예교본과 문방사우가 서랍 깊숙이 잠자고 있다. 텔레그라피도 배우다가 그만두고, 최근에는 서각에 관심이 있어 그쪽을 기웃거리고 있다.

또 그동안 사 모은 악기는 몇 가지던가. 단소를 비롯해 오카리나, 플롯, 기타, 섹소폰, 펜플룻, 하모니카 등 모두 한 번씩 배우려고 시도는 했으나 지금도 자유롭게 다루는 악기가 없다. 이건 음악적 재능을 떠나 내 의지력의 문제인 게 분명하다. 살아가면서 악기 하나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강박이 악기를 사 모으는데만 열중하게 만든 것 같다.

대신 그 악기들 덕에 아이들이 자라면서 음악을 가까이하는 효과는 있었다. 내가 어디 가서 재능을 뽐낼 게 아니니까 지금이라도 악기 하나는 익혀둬야겠다. 근데 또 전자오르간이 배우고 싶다. 재능은 없고 의지력도 약하지만 자꾸 무엇을 배우고 싶은 것은 병인가. 공자님이 말씀하시길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 했다. 나이 들어서도 앎에 대한 갈증으로 무엇인가를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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