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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1면
 1972년 10월 18일자 동아일보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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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은 해방되고 30년이 되는 해이다.

해방 한 세대가 지났지만 한반도의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1인 독재의 망령이 극성이었다.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해방'이다 보니 겪게 된 응보였을까. 정통성이 없는 권력자 박정희에게 '마녀'의 존재는 여전히 필요했고 분단체제는 유효한 구조였다.
 
4.19혁명과 반유신 저항운동의 전통이 이어진 대한민국은 국민투표라는 '눈속임' 술수에 넘어갈 수준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더 거세게 나왔다. 학생들의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부는 4월 7일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고 일부 대학에 휴업령을 내렸다. 긴급조치 7호는 일부 대학이 자진 휴강하기도 했지만 대학가의 시위는 식지 않았다. 
 
사제단이 발표한 9일자 인혁당에 대한 성명과 관련, 11일 중앙정보부는 함세웅 신부를 연행하고 한신대 문동환 교수도 연행했다. 같은 날 서울농대생 김상진 열사가 자결하였다. 
 
3월 28일 수원에 있는 서울농대 학생총회는 제1차 대학선언과 제2차 선언문을 잇따라 발표하고, 학원자유 보장과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했다. 경찰은 학생회장 황연수 군 등을 구속했다. 
 
서울농대생들은 4월 2일 박정희 정권에 맞서 학원과 사회 전반의 민주화를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어 4일에는 "유신헌법 철폐하라", "학원자유 보장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11일 학내에서 자유성토대회를 열어 단식투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11일 오전 11시경, 이날 농대 대강당 잔디밭에는 3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구속학생 문제가 잘 해결될 것 같으니 성토대회나 가두시위는 삼가주기 바란다"는 학장의 통고와 월요일까지 단식 연기를 합의한 과대표회의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았다. 당최 학교 당국의 말을 신뢰할 수 없었던 것이다. 
 
11시 20분경, 축산과 4학년 김상진 군이 연단에 올랐다. 이날 집회의 세번 째 연사였다. 신사복 바지에 흰 셔츠를 입은 김군은 차분한 어조로 준비한 <양심선언문>을 읽어 내려갔다.

학우여,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을, 금일 우리는 어제를 통탄하기 전에, 내일을 체념하기 전에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 민족사의 새날은 밝아오고 있다. 그 누가 이날의 공포와 혼란에 노략질 당하길 바라겠는가. 
 
우리 대학학도는 민족과 역사 앞에 분연히 선언한다. 이 정권의 끝날 때까지 후퇴치 못하고 이 민족을 끝까지 못살게 군다면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뜨겁게 외치는 이 땅의 모든 시민의 준열한 피의 심판을 면치 못하리라. 역사는 이러한 사태를 원치 않으나 그러나 우리는 하나가 무너지고 또 무너지더라도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을 것임을 재천명한다.
 
탄압과 기만의 검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라. 우리는 이제 자유와 평등의 민주사회를 향한 결단의 깃발을 내걸어 일체의 정치적 자유를 질식시키는 공포의 병영 국가가 도래했음을 민족파 역사 앞에 고발코자 한다.
 
이것이 민족과 역사를 위하는 길이고, 이것이 영원한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저 지하에 선 내 영혼이 눈이 뜨여 만족스런 웃음 속에 여러분의 진격을 지켜 보리라. 그 위대한 승리가 도래하는 날 나 소리없는 뜨거운 갈채를 만천하에 울리게 보낼 것이다. 

<양심선언문>을 차분하게 읽어가던 김상진 열사는 "이 보잘 것 없는 생명…." 부분을 읽을 때 등산용 칼을 꺼내어 학우들이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하복부를 찔렀다. 그리고 선혈을 뿌리면서 연단에 쓰러졌다.
 
학우들이 택시에 태워 병원으로 옮길 때 김 열사는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했고, 애국가를 들으며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수원 도립병원에서 하복부의 혈관을 잇는 봉합수술에 이어 2차 수술을 받고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이튿날 아침 서울대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앰블런스에서 절명했다. 
 
김상진 열사는 <양심선언문>과 별도로 <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장>을 유서로 남겼다. 박정희의 폭압 통치를 낱낱이 규탄한 이 유서는 박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했다.

"죽음으로써 바라옵나이다. 이 조국을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바라옵나니, 국민된 양심으로서 진실로 엎드려 바라옵나니, 더 이상의 혼란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결단을 내려주시길 바라옵니다."
 
박정희 정권이 가장 두려운 집단은 대학이었다. 군부는 오래 전부터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통해 관리를 해왔고, 언론과 야당은 얼마든지 통제가 가능했다. 남은 곳이 종교계와 학생들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김 열사의 시신도 두려웠다. 정부는 김 열사의 시신을 12일 저녁 8시경 고양군 벽제 화장터에서 서둘러 화장하였다. 법률상 24시간을 넘기지 않은 시신은 매장이나 화장을 하지 못하도록 한 규정도 무시한 채였다. 
 
김군의 할복 자결 소식은 언론통제로 보도가 금지되었으나 <동아일보>만 송건호 편집국장의 지시로 1단 기사로나마 실릴 수 있었다. 1단 기사의 위력은 대단하여 추모하는 집회가 진주ㆍ대구ㆍ목포 등지에서 열리고 서울대를 중심으로 각종 문화행사와 추모집회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대학가는 긴급조치 7호 선포에도 불구하고 더욱 거세게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 재야 단체들이 그를 의사 혹은 열사로 추앙하면서 추모 행사를 벌였다.  

그의 순절은 꺼져가던 반독재 투쟁의 대열에 새로운 횃불이 되었다. (주석 1)


주석
1> 김삼웅,『통사와 혈사로 읽는 한국 현대사』, 356~358쪽, 인문서원, 201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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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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