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전 기사 1883년 미국 땅에 뿌려진 한류의 맹아에서 이어집니다. 

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21세기 오늘날 나 조지 포크를 유진 초이라고 일컫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군요. 내게 그런 운명의 단초가 어떻게 열렸는지 그 시공간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조선 사절단은 1883년 9월 29일부터 워싱턴 DC에서 10여일간 연방정부를 시찰하는 것으로 40여일간의 공식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먼저 관련 기사를 볼까요?
 
"조선 사절단은 오늘 아침 국무부,전쟁부,해군부를 공식 방문했다. ...부서관리들은 포크 소위와 영어로 소통했고 그것을 포크가 일본어로 옮겨서 사절단의 수행원에게 전하면 수행원이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방식이었다. 사절단들은 근엄했고 위엄을 차렸다. 그러나 슈펠트 제독을 대면하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로 옛 친구였기 때문이다. 전권대신은 통역을 통하여 슈펠트에게 양국 수호조약을 서둘러 체결해준 데 대하여 조선 정부를 대표하여 감사를 표하면서 조선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슈펠트 제독은 하루 이틀 후에 호텔 숙소로 방문하겠으며 내년에 조선을 방문하기를 희망한다고 대답했다. "-Evening star. October 02, 1883.
 
사절단은 미국의 행정, 정치, 교육, 금융, 농업, 산업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들은 10월 2일 국무부와 전쟁부(육군부의 전신) 및 해군부를 공식방문한 데 이어 재무부, 금고국, 조폐국, 우정국, 교육국, 농무부 등을 종종 걸음으로 다니면서 정보를 수집하고 업무를 협의하였습니다.      

한편 프릴링하이젠Frelinghuysen 국무장관은 10월 4일 민영익으로부터 공식 서한을 통해 뜻밖의 제안을 받습니다. 서울에서 국제박락회를 열고자 하니 미국이 적극 참가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국무장관은 이 사실을 아더 대통령에게 즉각 보고했고 대통령은 적극 협조하겠다는 뜻을 보내왔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미국 언론은 비상한 관심을 갖고 다투어 보도하였습니다. 만일 조선이 개혁 정책에 성공했더라면 수년 내에 한양에서 국제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국제 박람회 건은 없었던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요. 하지만 조선 사절단이 워싱턴을 방문할 때만 해도 희망이 보였습니다. 방미 전까지만 해도 보수적이었던 홍영식 부대신이 선구적 개혁가로 탈바꿈했습니다.  

한편, 농무부를 방문했을 때에 사절단은 조선에서 재배가능한 품목의 종자를 보내주겠다는 농무부의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때 최경석은 각종 농작물 종자, 농약품, 영농 팸플릿 등을 입수하였고 귀국해서는 한때 시범 농장 운영에 매진했습니다.

사절단의 급선무는 미국인 군사교관과 외교고문을 초빙하는 일이었지요.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 이홍장이 파견한 독일인 묄렌도르프가 대외 업무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를 미국인으로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 사절단의 생각이었고 고종 임금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적임자로 슈펠트 제독이 물망에 올랐습니다. 슈펠트 제독은 한미 수교 조약을 성사시킨 주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약문에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명시하는 조항을 넣자는 청나라 이홍장의 집요한 주장을 물리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죠. 다음해 초에 퇴역할 예정이었던 슈펠트는 조선 고문 제의를 받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조선 사절단은 미국의 동부에서 서쪽으로 지구를 돌아 대서양, 지중해, 인도양, 동남아해를 거쳐 한국에 돌아갔다.
 조선 사절단은 미국의 동부에서 서쪽으로 지구를 돌아 대서양, 지중해, 인도양, 동남아해를 거쳐 한국에 돌아갔다.
ⓒ envato elements

관련사진보기

 
10월 12일 금요일 청명한 가을날 정오에 나는 사절단을 안내하여 백악관으로 갔습니다. 아더Arthur 대통령에게 고별 인사차 간 것입니다. 화려한 전통 관복을 차려입은 민영익 일행을 국무장관이 맞이하여 대통령에게 안내했습니다. 대통령 곁에는 여러 각료들이 도열해 있더군요. 

고별 인사와 덕담을 주고 받는 의례적인 행사가 다 끝났다 싶을 때였습니다. 아더 대통령이 문득 국무장관에게 무언가 지시를 하는 것 같았고 국무장관은 곧 그 지시를 민영익에게 전했습니다.

요지인 즉, 민영익과 그가 지정하는 두 명의 수행원에게 귀국시 미국 군함으로 대서양을 횡단, 지중해와 유럽을 경유하여 수에즈 운하를 통해 조선으로 갈 수 있도록 지원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모든 경비는 미국 측이 부담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무장관은 그 뜻을 민영익에게 전하고 의사를 물어보았습니다. 민영익은 즉시 제의를 받아들였고 동행자로 서광범과 변수를 지정했지요.

그 후 곧 민영익은 국무장관에게 조지 포크를 동행케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민영익의 요청이 국무장관을 통해 아더 대통령에게 전해지지 대통령은 즉각 수락했고 국무부와 해군부 사이에 나의 조선 파견 문제에 대해 긴밀하고 신속한 협의가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11월 12일 국무부로부터 뜻밖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나를 주한 미국공사관의 해군무관naval attache로 발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의외인 까닭은 미국은 당시 북경과 동경에도 해군무관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는 직감하였습니다. 이 건 나를 조선에 보내기 위한 이례적인 조치이다! 나는 환호성을 삼켰지요. 

내게 부여된 임무는 해군에 관한 모든 사항을 해군장관에게 보고하는 일, 관찰 보고하는 일, 통상무역 증진을 위한 활동, 해상 교육에 관한 일과 그와 유사한 전문적인 분야에 대한 자문을 조선 정부가 요구해 오면 그에 성실히 응해 주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그런 요구가 나의 공무와 실제로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모든 보고는 또한 국무장관에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습니다. 
 
나는 운명적인 예감에 사로잡힌 채 사절단과 함께 뉴욕항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민영익, 서광범, 변수와 함께 미 해군 최대의 함정인 트렌턴Trenton 호에 오른 것은 12월 1일이었습니다. 조선의 제물포 항에 발을 딛기까지는 장장 6개월의 항행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한국인 여러분, 역사상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한국인은 누구일까요? 바로 민영익, 서광범, 변수 이 세 사람입니다. 그들은 동쪽으로 지구를 돌아 태평양을 건너 미국 서부에 도착했고 돌아갈 때에는 반대로 미국의 동부에서 서쪽으로 지구를 돌아 대서양, 지중해, 인도양, 동남아해를 거쳐 한국에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행기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한국인 여러분은 부득이 나의 기억 속에서 한국인 최초의 세계여행을 만나 보아야 합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태그:#조지 포크, #민영익, #세계일주, #보빙사 , #트렌턴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좋은 만남이길 바래 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제2의 코리아 여행을 꿈꾸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