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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7일 국방부 보통군사법원 앞에서 여성단체들이 정보사령부 군인에 의한 북한이탈여성 인권유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엄벌을 촉구했다.
 2021년 6월 7일 국방부 보통군사법원 앞에서 여성단체들이 정보사령부 군인에 의한 북한이탈여성 인권유린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엄벌을 촉구했다.
ⓒ 안양여성의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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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그루밍 성범죄'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피해자가 주장하는 '위력'(행사)에 대한 증거가 부족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무죄를 선고한다."

사건번호 2021고합240. 지난달 18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형사2부(재판장 이남준) 사건 담당 판사가 내린 1심 판결이다. 이 사건은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 공작팀장 성모 중령(46)과 공작담당관 김모 상사(38)가 자신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오던 탈북여성 A씨를 성폭행한 혐의(피감독자간음 등)로 기소된 사건이다. A씨는 북한 핵무기 연구소에서 근무하다 2016년 탈북했다.

"피고인들이 잘해서 무죄가 나온 게 아니다."

판사가 덧붙인 한 마디다. 피고인들이 잘못한 건 맞지만 피해자가 입증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행인 줄 알라는 말이다.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루밍 성범죄(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저지르는 성범죄)는 인정되나 위력을 행사한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라니. 법이 아무리 보수적이라고 해도 이건 지나쳤다.

판사는 증거재판주의에 따라 판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폭행 사건은 피해자가 입증하기 어렵다는 게 당사자들의 호소다. 당할 줄 알고 증거를 준비해놓는 피해자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성폭력 사건의 경우 증거 제출은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이며 수치스러운 일일 것이다. A씨가 제출한 추가 자료는 재판부의 1심 판결에 반영되지 않았을 거라는 게 A씨 변호인단의 불만이다.

이 사건의 본질은 이뿐만이 아니다. 탈북민을 정보수집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정보당국의 문제도 심각하다. 정보사가 A씨를 다룬 보고서에는 "적절한 금전제공을 통한 물적 의존도 심화 시 조정·통제권 확보를 통한 원활한 사업 추진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됨"이라는 언급이 있는 것이 기사로도 확인됐다.

탈북여성 A씨는 이용할 가치가 있는 공작대상에 불과했다. 백번 양보해서 중요한 정보가 있는 탈북민에게 정보를 수집할 수 있다. 하지만 탈북민과 그 가족들의 안전은 외면한 채 정보수집에만 열을 올리는 정보당국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A씨는 정보제공의 대가로 북에 남아 있던 가족도 잃었다. 정보사 요원들은 외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가족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정보수집 활동은 인권침해

A씨가 진술한 정보사 요원들이 A씨에게 접근한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A씨와 A씨 오빠는 북한 핵무기연구소에서 일했다. 그러다 A씨는 2016년 탈북했고 오빠는 여전히 북에 남아 있었다. 정보사 요원들은 A씨에게 접촉해 핵무기 관련 정보를 수집했다. 정보사 요원들은 북에 남아 있는 A씨 오빠에게 핵무기 정보 제공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평생 먹고살 만큼의 돈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쳐 A씨 오빠에게 약 500만 원가량 보냈다. A씨는 수시로 오빠와 소통했다.

A씨는 연락을 주기로 한 오빠와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자 정보사 요원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그제서야 A씨 오빠가 북한 정부당국에 붙잡혀 연락이 안 된다고 말했다. A씨는 믿을 수 없어 개인적으로 브로커를 통해 확인한 결과 오빠의 아내로부터 남편이 보위부 감옥에 수감됐고 6개월 후 수용소로 이감될 거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화 500만 원 정도의 뇌물을 줘서 중간에 빼낼 수도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A씨는 지푸라기라도 잡자는 심정으로 정보사 요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구출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보사 요원들은 믿을 수 없다며 A씨에게 사비로 먼저 오빠를 구출한 다음 오빠가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정보를 제공하면 오빠가 평생 살 돈까지 챙겨주겠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북한 현지 정보제공자가 이런 식으로 거짓으로 돈을 요구하는 사례가 있다는 이유를 댔다.

정보사 요원들은 한 발 더 나아가 A씨에게 정보를 줄 수 있는 탈북민을 더 소개해주면 A씨 노력의 대가로 사령부에 구출자금을 요청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A씨는 그 말을 믿고 탈북민을 소개해주었고 오빠를 구출해주기를 기다렸으나 돌아온 건 상처뿐이었다. A씨는 지금 오빠는 물론 오빠의 가족과도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그들이 갈 곳은 필경 수용소뿐이다.

정보사는 A씨와 A씨 오빠로부터 유용한 정보를 취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돈 몇 푼으로 탈북민을 이용가치가 있는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접근하여 북에 남아 있는 가족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정보수집 활동은 명백한 인권침해다. 탈북민 인권이 먼저다.

태그:#탈북여성, #정보사, #그루밍성폭행, #북한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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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과 갈등의 벽을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을까 줄곧 생각한다. 2021.12.15. 자전적 탈북에세이 「아오지까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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