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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가족들(연합뉴스 자료사진)
 투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가족들(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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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여간해서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앉지 않는다.

박정희가 그 반열에 들지 모르지만,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클럽회원들, 예컨대 히틀러ㆍ스탈린ㆍ프랑코ㆍ피노체트ㆍ폴 포트ㆍ카다피ㆍ차우세스쿠ㆍ마르코스 등의 최후를 보면 알 수 있다.
 
학생ㆍ문인ㆍ야당ㆍ종교인들의 유신체제 비판을 박정희는 '일부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았다. 독재자의 사설기관이 된 중앙정보부는 좌경ㆍ용공세력으로 매도하고, 역시 하수기관이 된 검찰과 법원은 국가보안법ㆍ반공법ㆍ내란예비음모ㆍ내란선동 따위의 혐의를 들씌웠다. 국가기관이 독재자의 수발이나 드는 수족으로 변신했다.    
 
재야 민주세력의 맨 앞에서 싸워온 장준하는 1975년 1월 8일, 대통령 박정희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국헌을 준수한다고 서약한 귀하 스스로가 그 선서를 헌신짝같이 버리고 헌법기관의 권능을 정지시키고, 헌법 제정 권력의 주체인 국민을 강압적인 계엄 하에 묶어놓고 '국민투표'라는 요식행위를 통해 제정한 이른바 '유신헌법'으로 명실상부하게 귀하의 1인 독재 체제만을 확립시켰다"고 매섭게 비판한 그는 파괴된 민주 헌정의 회복을 위해 대통령 자신이 개헌을 발의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장준하의 충고는 철저하게 배척되고, 박정희는 오히려 특별담화를 통해 1월 22일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찬반 여부와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신임 여부를 묻기 위해 2월 22일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역습했다. 독재자들이 항용 쓰는 수법이었다. 조작된 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고자 한 속셈이다.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엄숙함의 시대가 열렸다.
 10월 유신 공포 3년 기념식.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 공포되며 엄숙함의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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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유신헌법 국민투표 실시는 일체의 반대운동이 금지되었다. 관권만이 투표계몽이란 명분으로 찬성활동이 강요되고 있었다. 다시 사제단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제단은 2월 5일 〈종교탄압에 대하여 경고한다〉는 성명을 통해 정부 당국이 각급 경찰서에 내리는 지시에서 크리스챤들의 집회를 갖지 못하도록 한 데 대해 질타했다. 이어서 다음의 3가지를 강력히 천명하였다. 

1. 우리의 기도회는 이 땅에 정의를 구현시키기 위해, 침해받고 있는 인간의 기본권을 되찾기 위해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로서 교회 본연의 사명을 실천하는 종교 행사임은 만인이 주지하는 바이다.
 
2.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뜻과 양심의 소리를 두려워하는 당국의 도덕적 타락상을 보게 됨과 동시에 당국의 직접적인 종교탄압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또 종교활동을 위험시하고 하느님의 진리를 두려워하는 당국의 정신적 패배주의를 역력히 보게 되는 것이다.
 
3. 우리는 이러한 당국의 직접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우리의 의식을 따라 인권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2월 6일 오후 7시 명동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가질 것이다. (주석 1)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는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비롯 각 민주단체와 야당에서 반대 비판하는 성명이 빗발쳤다. 사제단은 1월 27일 국민투표를 전면 거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2월 7일 천주교 전국교구 성직자와 수도자 78명이 개신교 목사 55명과 유신헌법 철폐와 국민투표의 비민주적 요소 철폐를 내용으로 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은 또 2월 9일 〈암흑 속에 횃불을 높이 들고〉라는 결의문을 발표, 정부의 기만적인 국민투표 전략의 음모를 규탄했다. "인간회복의 교회 사명을 실천코자 하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인간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고 겨레를 구하기 위하여 겸허한 자세로 우리의 견해를 천명한다."면서 다섯 가지를 제시했다.

1. 1인의 독재를 위하여 3천만 국민에 대한 정보정치와 억압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집권층의 안보를 위하여 나라의 안보가 위협을 받아서는 안된다. 1인의 장기집권을 위하여 인간의 양심이 더 이상 유린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온 국민의 자유와 안보와 인간으로서의 양심과 인간회복을 위하여 현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다.
 
2. 1인의 의사에 의한, 1인의 장기집권을 위한, 1인의 권력 집중과 그 행사를 위한 현행 헌법은 그 존재의 국민적 의미가 없다. 양심과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며 범국민적 의사가 반영된 새로운 민주헌법에로의 체제를 우리는 강력히 요구한다.
 
3. 지학순 주교를 비롯한 애국 민주인사의 조속한 석방을 우리는 요구한다. 민주 인사의 석방을 더 이상 지체한다면 그것은 철권과 폭압으로 현재의 난국을 수습하려는 당국의 단견과 무모를 노출하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아니다.
 
4. 언론탄압의 교활한 간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자유언론에의 탄압은 곧 양심과 진실을 두려워하는 현 정권의 속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유언론의 승리를 위하여 우리는 최대한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며 국민의 성원이 그에 밑받침할 것을 확신한다.
 
5. 농민과 근로자의 생활은 인내의 극한상황을 넘어섰다. 무모한 경제정책이 빚은 이와 같은 파국은 국민의 기본적 생존권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에 상응하는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할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우리의 건의가 관철될 때 까지 우리의 기도를 계속할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의 교회를 지키는 일이며 인간의 양심을 회복하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우리의 사명임을 믿는다. 우리는 암흑 속에 횃불을 계속 높이 들 것이다. (주석 2)

제도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삼권이 한 사람 손아귀에 장악되어 있는 유신체제는 무엇보다 정보의 유통이 통제됨으로써 국민은 '관급 정보'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기에 사제단의 각종 성명서와 시국선언 관련 유인물은 사막의 단비와 같았다. 그만큼 찾는 사람이 많았고 국내외적으로 파급효과도 컸다. 외신들도 한국사정을 여기서 찾으려 하였다. 
 
특히 제1선언으로부터 시작되는 '시국선언'은 내용이나 타이밍에서 히트를 날렸다. 누가 어떤 경로를 거쳐 작성했을까, 많은 사람이 궁금해 했다.

지금까지의 활동ㆍ성명서ㆍ저술 등에 나타난, 그리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정의사제단의 면모는 다음과 같다.
 
정의구현사제단은 약 40여 명의 핵심 구성원들이 정기 모임을 갖고 일정한 사안에 대해 협의, 대체로 이 결정에 따라 사제단 활동을 이끌어간다. 대표역할은 1962년 12월 21일에 사제 서품을 받은 최고참 선배 김승훈 신부가 지난 1976년 이래 11년 동안 맡아하고 있다. 총무로 젊은 신부가 있으나 주역할은 함세웅(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신부를 비롯한 1967년 서품을  받은 동기 신부 김택암(용산 성당 주임), 차인현(중림동 본당), 안경렬ㆍ양흥 신부 등이다. 그리고 함 신부의 1년 후배인 오태순(천호동 성당 주임) 신부도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석 3)


주석
1> 앞의 책, 300쪽.
2> 앞의 책, 290~291쪽.(발췌)
3> 백순기, <가톨릭정의구현사제단의 모든 것>, <광장>, 1987년 7월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민주주의, #민주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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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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