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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잘못한 것 중 하나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부귀영화를 위해 일제에 나라까지 팔아먹고 부끄러워하기는커녕 호의호식하더니 해방 이후에는 대부분 처벌은커녕 반성도 없이 미국에 빌붙어 떵떵거리며 살았다. 

이제 와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자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이 저지른 일을 잊지 말고 그들과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잔재는 청산해야 한다. 내가 사는 곳의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누구인지 우리 지역의 일제 잔재는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에 충남 공주 지역에 남아 있는, 청산했으면 하는 친일 잔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충남 공주에서 우금티 방향으로 부여 가는 길에 있는 이인초등학교(공주시 이인면 은행길 56번지)는 1913년 이인사립삼흥학교로 개교하여 1917년 이인공립보통학교로 인가받고, 1938년 이인공립심상소학교, 1941년 이인국민학교, 1996년 이인초등학교로 학교 이름이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는 오래된 학교다.

학교가 있는 이곳은 조선시대 역(驛)이 있던 곳으로 동학농민혁명이 벌어지던 당시에도 동학농민군과 관군·일본군의 연합군 사이에 전투(1894년 11월 19일 이인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이 역원이었던 까닭으로 이인초등학교 주변에는 역을 관리하던 찰방(察訪) 등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여럿 세워져 있었는데, 현재는 이인면사무소 앞에 옮겨져 있다. 공주시 이인면 이인면사무소(이인면 검바위로 217) 앞에는 입구 양쪽으로 각종 비석이 세워져 있다. 면사무소로 들어가는 방향에서 왼쪽으로 2개의 비석, '고향 공주 찬가'와 '국가유공자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오른쪽으로는 총 11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전통(傳統)의 마을 이인리(利仁里)를 비롯하여 윤광안 거사대(관찰사윤공광안거사대 觀察使尹公光顏去思臺), 남일우 영세불망비(관찰사남공일우영세불망비, 觀察使南公一祐永世不忘碑), 박제순 거사비(순찰사박공제순거사비, 巡察使朴公齊純去思碑), 이계희 청간선정비(찰방이후계희청간선정비, 察訪李侯癸禧請簡善政碑), 안승후 애민선정비(찰방안후승후애민선정비, 察訪安侯承煦愛民善政碑), 박창순 애민선정비(찰방박후창순애민선정비, 察訪朴侯昌淳愛民善政碑), 이범천 거사비(찰방이후범천거사비, 察訪李侯範天愛民去思碑), 김제무 청덕선정비(찰방김후제무청덕선정비, 察訪金侯濟懋淸德善政碑) 등이 있다. 

이와 함께 한국참전용사무공기념비, 장석인 송덕비(사정장석인선생송덕비, 沙庭張錫仁先生頌德碑)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이인면사무소 입구 왼쪽 비석(2개) / 이인면사무소 입구 오른쪽 비석(11개)
 이인면사무소 입구 왼쪽 비석(2개) / 이인면사무소 입구 오른쪽 비석(11개)
ⓒ 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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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는 총 13개의 비석 가운데 윤광안 거사대, 남일우 불망비, 박제순 거사비는 관찰사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이다. 이계희 선정비, 안승후 선정비, 이범천 거사비, 김제무 선정비 등은 모두 찰방을 역임한 이들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으로, 이들 비석에 대해 안내문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현재 있는 안내문과 함께 예전에 있던 안내문까지 소개한다.
 
옛 안내문과 현 안내문
 옛 안내문과 현 안내문
ⓒ 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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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안내문] 이인면사무소 앞에는 8기의 선정비가 줄지어 서 있는데, 이 가운데 3기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5기는 역대 이인찰방들의 선정비이다.

이 비석들은 옛 이인역터 즉, 현 이인초등학고 주변에 산재되어 있던 것을 1950년대 말 박승직 면장 재임시 구·면사무소터로 옮겼다가 1982년 면사무소 신축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 이인면

[현 안내문] 이인면사무소 앞에 위치한 8기의 선정비는 옛 이인역(현 이인초등학교) 주변에 산재되어 있던 것을 1950년대 말 박승식 면장 재임 시 구)면사무소 터(이인리 239-2번지)로 옮겼다가 1982년 면사무소 신축 당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운 것이다.

위 선정비 중 3기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들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고, 나머지 5기는 역대 이인찰방들의 선정을 기록하고 있다.
 
공주 일제 잔재(2) 박제순 거사비

박제순 거사비 옆에는 안내문이 따로 있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박제순 거사비와 안내문 / 박제순 거사비 앞면 / 관찰사 박제순 거사비 안내문
 박제순 거사비와 안내문 / 박제순 거사비 앞면 / 관찰사 박제순 거사비 안내문
ⓒ 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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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박제순 거사비]

1894년 공주 우금치(우금티) 전투 당시 총청관찰사였던 박제순(朴齊純)의 행적을 4련 시로 적은 비로, 1895년 9월에 이인역(현 이인초등학교)에 세워졌던 것이다.

박제순은 충청관찰사로서 일본군과 함께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고, 1905년 외부대신으로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으로 지탄받고 있다. 이 비에는 박제순이 농민군을 토벌하고 부서진 이인역을 복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박제순 거사비 안내문은 박제순이 친일반민족행위를 한 사실을 밝히는 단죄비(斷罪碑)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친일반민족행위자를 단죄하는 내용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으며, 나라까지 팔아먹은 민족반역자에게 합당한 단죄비를 새로 세울 필요가 있다. 또한 안내문 제목도 '관찰사 박제순 거사비'가 아닌 '순찰사 박제순 거사비(巡察使 朴齊純 去思碑)'로 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도지사(道知事)에 해당하는 관찰사는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감사(監司)·도백(道伯)·방백(方伯)이라고도 하였다. 순찰사는 임시직으로 보통 지방의 병권(兵權)을 가졌던 행정관, 즉 관찰사 등이 겸직하여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벼슬이었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박제순은 순찰사를 겸직하여 동학농민혁명 진압에 나섰다. 관찰사 박제순 거사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나 비석에 관찰사가 아닌 순찰사라고 쓰여 있는 만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박제순 거사비 앞면에는 '순찰사박공제순거사비(巡察使朴公齊純去思碑)'라고 새긴 쓴 큰 글씨와 함께 상하 좌우로 4자로 된 2개의 문장이 각각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날짜가 적혀 있다. 그런데 마모되어 그런지 훼손되어 그런지 잘 보이지 않는 글자와 어려운 한자, 여기에 착각하기 쉬운 글자도 있어 비석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고문(古文)과 시경(詩經) 등으로 확인해보니 잘 보이지 않거나 어려운 글자는 '𣅙'(밝은 우), '賚'(줄 뢰), '諼'(속일 훤, 잊을 훤)으로 파악된다. 뒷면 날짜는 '을미(乙未)' 같기도 하고 '기미(己未)' 같기도 한데, 기미년은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해이고, 을미년은 1895년으로 갑오년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다음 해에 해당한다.

을미년은 일제와 관군의 진압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잦아든 때이므로 박제순 거사비는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순찰사 박제순의 업적을 내세우고자 1895년에 세운 비석으로 짐작된다. 이를 종합하여 비문 전체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박제순 거사비 앞면 비문과 뒷면
 박제순 거사비 앞면 비문과 뒷면
ⓒ 전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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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순찰사박공제순거사비(巡察使朴公齊純去思碑)
순찰사 박제순이 임무를 마치고 간 뒤, 그의 공덕을 기리고자 세운 비

복성우조 아공선은(福星𣅙照 我公宣恩)
복을 주는 별이 밝게 비추듯이 공(박제순)이 은혜를 베풀어

초비구민 전성뢰안(剿匪救民 全省賴安)
비적(동학농민군)을 무찔러 백성을 구하고 편안케 하였으며

뇌속이마 잔역복완(賚粟移馬 殘驛復完)
조를 내놓고 말을 옮겨와 (동학농민혁명 때) 부서진 (이인)역을 복구하였으니

수석송덕 영세불훤(竪石頌德 永世不諼)
그 덕을 칭송하는 비석을 세워 영원히 잊지 않게 한다.

[뒤]
을미구월일입(乙未九月  日立)
1895년 9월 세움

 

비석에는 박제순의 공덕을 칭송하고 있지만, 정작 박제순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충청도관찰사로서 일제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장본인이다. 나중에는 일제에 나라까지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에 경술국적(庚戌國賊), 일본으로부터 작위까지 받은 그런 매국수작(賣國受爵)의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흔한 말로 민족반역자요, 역적에 해당한다. 
    
박제순
 박제순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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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순이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한 것을 은혜라 생각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였다며 그의 공덕을 기리는 거사비를 세웠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뿐더러 이런 비석은 마땅히 청산해야 할 대상이 틀림없다.

일본군과 관군(정부군), 여기에 민보군(民保軍,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유생들이 조직한 군대)이 합세하여 동학농민군을 무찌르고자 전투를 벌였던 이곳, 당시 충청도관찰사로서 순찰사를 맡았던 박제순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어쩌면 친일반민족행위자, 민족반역자 박제순을 칭송하는 비석에 단죄비를 세우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래도 단죄비라도 제대로 세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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