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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전투에서 패배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피바위' 모습. 운봉과 인월 중간의 협곡에 있다.
 황산전투에서 패배한 왜구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피바위" 모습. 운봉과 인월 중간의 협곡에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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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인명이 있는 것과 같이 땅에도 지명이 있다. 지명 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사고와 의지가 담겨진 것도 있고 생활 모습을 나타내는 지명도 있어서 당시의 생활상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며칠 전 남원향토사학자 김용근씨와 함께 이성계가 조선의 왕이 될 기틀을 마련한 황산대첩 현장인 운봉과 인월 등지를 돌아보았다. 김용근씨의 설명 중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황산대첩 당시와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이라는 것. 이성계 장군이 달빛과 바람을 끌어와 황산전투를 승리했다는 인월리와 인풍리는 시작이었다.

왜구가 공략 대상지로 삼은 운봉은 어떤 곳?

고려 말에는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다. 한때는 왜적의 배 5백 척이 연해 지방을 침략해 폐해가 극심해지자 고려 조정에서는 배극렴 등의 장수를 파견하여 제압하려고 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왜구가 운봉을 침략한 이유는 뭘까? 운봉의 지리적 위치는 남원시에서 20㎞ 지점인 동경 127도 32분, 북위 35도 26분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에는 고원지대인 산내면, 남쪽은 주천면, 북쪽은 산동면, 서쪽에는 이백면을 경계로 남원시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이야 교통이 좋아 남원에서 차량으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과거 운봉은 해발 470m가 넘는 지리산 첩첩산중에 자리한 고원분지다. 하지만 비옥한 넓은 땅에 연중 메마르지 않는 지리산 맑은 물과 산나물이 많아 사람 살기 좋은 조선 십승지 중의 한 고을이었다.

왜군은 비옥한 운봉에서 생산되는 식량 보급기지를 바탕으로 곡창지대인 호남을 통해 개성까지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여원치와 팔량치 사이에 자리한 운봉은 지리적으로 호남과 영남의 관문이자 천연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전란에 휩싸였다.

왜군이 출병할 때 반드시 챙기는 세 가지는 칼과 국그릇, 그리고 말발굽 편자용 쇠가락이었다. 지리산 운봉은 철의 생산지였다. 가야 때부터 양질의 철을 생산했던 운봉현 관할인 운봉, 인월, 아영, 산내 4개 지역에 총 10여 개가 넘는 대장간이 있었다.

섬나라 사람들은 국없이 밥을 먹지 못하는 습성을 지녔다. 운봉은 목기 생산으로 유명한 곳이다. 칼과 편자, 개인용 국그릇을 생산하는 운봉은 왜군이 선택한 최적지였다.

제갈공명처럼 자연현상을 이용해 승전한 이성계 장군
 

왜구토벌에 나선 고려군은 장군을 비롯해 병사들까지도 표적물을 백발백중 명중시키는 명궁사들이었다. 때문에 고려군은 표적을 잘 맞힐 수 있는 넓은 들판에서 싸우기를 선호했다. 반면 칼을 잘 쓰는 왜군은 산중 협곡의 지세를 이용해 전투를 벌였다.

때마침 우왕 6년(1380) 왜구가 경상도를 약탈하고 지리산 일대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이전에도 왜구 정벌에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성계는 왜구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전했다. 우왕 6년(1380년) 9월 이성계 장군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운봉에 진을 펼쳐 작전을 준비 중이었고 아지발도가 지휘하는 왜군은 인월에 주둔한 채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황산대첩비를 건립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에 이곳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조 10년(1577) 왕명을 받아 황산대첩비를 건립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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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운봉지역에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황산대첩 비화이다. 구전은 전설이 되었고 마을 지명이 되었다. 이성계 장군의 고려군이 황산전투에서 승전한 무기는 바람이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바람을 끌어왔다는 인풍(引風), 인풍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구름에 갇혔던 달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는 인월(引月)과 같은 지명이 여럿 있다.

운봉과 인월 중간에 있는 황산은 해발 695m밖에 되지 않은 야트막한 산이다. 지리산 아막골(지금의 아영일대) 바람은 들바람이 되어 황산을 등에 지고 장수를 향해 분다. 인월 중군동에 진을 친 후 황산 정상 조망권을 가졌던 왜군은 말과 활에 강한 고려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이성계 부대가 왜군의 전방 초소가 있던 '동무'와 '서무'를 기습공격해 괴멸시키자 중군동에 있던 왜군은 황급히 황산 협곡으로 향했다. 왜군이 황산협곡을 선택한 것은 고려군의 말과 활이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계부대는 왜군의 진로를 사전에 예측하고 황산에 공격부대를 배치해 뒀다.
  
'파비각' 사진으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세웠던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남원경찰서 고등계형사들이 몰려와 비석을 폭파했다. 그것도 모자라 글씨도 정으로 쪼아 뭉갰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을 모아 안치하였다
 "파비각" 사진으로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때 세웠던 비석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남원경찰서 고등계형사들이 몰려와 비석을 폭파했다. 그것도 모자라 글씨도 정으로 쪼아 뭉갰다. 1977년에 비각을 건립하고 파괴된 비석 조각을 모아 안치하였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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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전투는 야간전투가 승패를 가름해줬다. 왜군에 대한 활 공격은 목표가 뚜렷해야 하는데 밤중의 조명은 달 뿐이었다. 마침 보름날 전후이기는 하나 변덕스럽기로 소문난 황산바람이 언제 구름을 몰고 와서 달빛을 가릴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달이 뜨지 않으면 고려군이 전멸당할 수도 있었다.

결전의 날 황산 주변은 구름으로 덮였고 야간전투에서 조명역할을 할 달빛은 구름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군은 야간전투 전략을 강행했고 왜군은 고려군의 전술 전략을 모른 채 달빛없는 전투에서 승전을 장담했다.

제갈공명의 적벽대전 승리 원인을 응용한 고려군의 전술 

제갈공명은 어떻게 하여 오나라가 화공에 유리하도록 남동풍으로 풍향을 바꾸게 했을까? 해답은 미꾸라지에 있었다. 제갈공명은 평소에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이 세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해 가을 무렵 미꾸라지가 물 위 아래를 부지런하게 오르내리면서 붉은 배를 보이는 것을 보았고, 그럴 때면 어김없이 남동풍이 불고 비가 내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적 시골에서 자랐던 필자도 미꾸라지가 물 위아래를 오르내리면 비가 내리던 경험을 했다.

그 현상을 요즈음 과학으로 풀면 미꾸라지는 입으로 산소를 삼키고 항문으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기 때문에 기압이 낮아질 때는 산소를 마시기 위하여 부지런하게 수면 위 아래를 오르내려야 하는 것이다. 제갈공명은 그 관찰 경험을 활용해 적벽전투의 날씨 상황을 예측했고, 결국 화공으로 적을 궤멸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고려군은 군량미가 바닥나 며칠 전부터 개울과 논두렁에서 피라미들과 미꾸라지를 잡아서 풀시래기탕으로 군량미 부족을 보충했다. 이때 이성계 장군의 참모였던 천기를 보는 천문사가 미꾸라지의 행동을 보고 "반드시 3~4일 후 부터는 남동풍이 불 것"이라고 했고 "그날이 보름날"이라고 했다.
    
남원 향토사학자인 김용근씨가 이성계 장군이 승리했던 황산대첩 현장과 관련된 지명을 나타낸 지도로 달빛과 바람을 끌어왔다는 인월, 인풍. 왜구가 주둔했다는 중군리와 적의 시체를 산처럼 묻었다는 동무덤, 서무덤과 황산전투에서 죽은 왜군의 피가 묻었다는 피바위가 보인다.
 남원 향토사학자인 김용근씨가 이성계 장군이 승리했던 황산대첩 현장과 관련된 지명을 나타낸 지도로 달빛과 바람을 끌어왔다는 인월, 인풍. 왜구가 주둔했다는 중군리와 적의 시체를 산처럼 묻었다는 동무덤, 서무덤과 황산전투에서 죽은 왜군의 피가 묻었다는 피바위가 보인다.
ⓒ 김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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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을 가렸던 구름은 남동풍에 씻겨 물러났고 황산전투는 승리했다. 황산전투에서 배패한 왜군은 '피바위'에 그들의 패망 사실을 기록한 후 살아남은 70여명의 왜군만이 지리산으로 도망갔을 뿐이다.

운봉과 인월 인근에는 지금도 당시 상황을 추측할 수 있는 지명이 여럿 있다. 이성계 장군의 고려군이 운봉에 도착할 때 길을 안내했다는 여원 할매의 이야기를 가진 여원치는 '여원치' 고개로, 달빛과 바람을 끌어와서 황산전투를 승리했다는 '인월리'와 아영의 '인풍리', 왜군들이 주둔했다는 인월의 '중군리'를 비롯해 적장 아지발도가 자신의 죽음을 피로 화석시켰다는 '피바위'는 지금도 붉은 핏빛을 띠고 있다.

적의 시체를 산처럼 묻었다는 '동무덤'과 '서무덤'은 동무리와 서무리가 되어 남아 있다. 또한 고려군의 진군나팔을 분실했다가 다시 주웠다는 남원 보절리의 구라치가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알면 여행이 한결 즐거워질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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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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