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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학살사건 피해자나 유족의 증언을 취합하고 사건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꾸준히 계속돼왔다. 반면에 실제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이 지금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은 듯하다. 내가 부족하지만 현장을 찾아다니며 기록하려는 이유기도 하다.

학살 현장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깊은 산골이나 인적이 드문 들판인 경우도 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일상이 이뤄지는 공간인 경우도 많다. 과메기로 유명한 포항의 구룡포와 고디굴도 그런 곳 중 하나다.

국방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의 명령

1950년 2월, 포항에 보도연맹이 발족한다. 과거 좌익 관련자들이 가입 대상이었지만 할당된 회원 수를 강제로 채워야 했다. 그래서 엉뚱한 사람들까지 강제로 가입하게 된다.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경찰들은 사람들에게 보도연맹에 가입해야 살 수 있다고 위협했고, 당사자들도 모르는 사이에 명단에 올려 버리기도 했다. 또한 회원 수를 채워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우익단체 인사들을 억지로 가입시키는 경우까지 있었다. 또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통행과 상업, 배급 등에 제한이 있었기에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가입한 사람들도 많았다.

보도연맹원들은 반공 강연 등 각종 집회와 행사에 동원됐다. 그리고 인근 학교에 모여 제식훈련을 받았고, 강제 노역에도 나가야 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민군은 남쪽으로 단숨에 밀고 내려와 1950년 7월에 영덕에 도달한다. 포항은 낙동강 전선의 한 축이자 항구가 있어 인민군과 연합군 모두에게 중요한 보급선이기에 매우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계속되는 인민군의 공세에 결국 8월 11일 포항은 점령된다.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일주일 가량 구금되었다.(관리인의 허락 후에 외곽에서 촬영)
▲ 현재의 대보초등학교  여기에서 보도연맹원을 비롯한 민간인들이 일주일 가량 구금되었다.(관리인의 허락 후에 외곽에서 촬영)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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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이 7월부터 포항경찰서는 관할 지역의 보도연맹원과 좌익 의심자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시하며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시작했다. 이중에서 구룡포에서 검거된 인원들은 구룡포 지서와 대한청년단 창고 등에 구금됐다. 하지만 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잡혀와 인근 대보국민학교까지 수용시설로 사용됐다.

이렇게 구금된 사람들은 1950년 8월 9일에서 12일 사이에 희생당한다. 8월 12일까지인 것은 이 시기에 인민군이 포항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간인 학살에 대한 명령 체계에 대해서 당시 포항경비사령관이었던 남상휘 전 해군 준장(당시 중령)의 증언이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신성모 국방장관이 육군참모총장과 해군참모총장에게 좌익분자 처형을 명령했다. 그리고 이 명령은 1950년 7월 초,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명의로 포항경비사령부까지 하달됐다고 한다. 남상휘는 훗날 이 명령을 실행한 것을 자책하며 후회했다. 

굴 아닌 굴, 고디굴
    
이 길뿐 아니라 양쪽 골짜기로도 사람들을 끌고 올라가 총살했다. 하지만, 해당 사건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나 표식은 아무것도 없다.
▲ 현재의 고디굴 이 길뿐 아니라 양쪽 골짜기로도 사람들을 끌고 올라가 총살했다. 하지만, 해당 사건을 알려주는 안내판이나 표식은 아무것도 없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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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민간인들이 희생됐던 고디굴을 찾아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특히 이런 현지 지명은 현지인들도 저마다 다르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현지 어르신들에게 몇 번이나 물어봐서 겨우 도착했을 때 처음 든 생각은 '이곳이 정말 굴인가'였다.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굴이 아니라 지금도 차가 다니는 작은 길이었다. 알고 봤더니 과거에는 시멘트로 만든 터널 형태였지만, 지금은 그 터널을 헐어버렸단다. 그리고 이제는 고디굴이라는 명칭만 남았다.

1950년 8월 초 경찰은 구룡포 인근 마을의 청년들을 대보국민학교로 소집했다. 과거에도 보도연맹원들은 각종 훈련과 행사 등을 위해 이 학교로 소집된 적이 있었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모였다.

그런데, 이때 보도연맹의 신규 가입 지원을 받았다는 증언이 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바로 손을 들어 그 자리에서 가입한 사람들이 있었다. 경찰들은 뒤에 어떻게 될지 한 마디 얘기도 없었다. 손을 든 사람들은 어쩌면 살기 위한 방편으로 보도연맹 가입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죽음으로 향하는 선택이었다.

경찰들은 이날 별다른 행사 없이 보도연맹원들만 가려낸 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돌려보냈다. 그리고 남겨진 보도연맹원들을 한 교실에 15명 내외로 구금했다. 갑작스럽게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은 이유도 모른 채 약 일주일가량 갇혀 있어야 했다.

1950년 8월 9일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해군 헌병대는 대보국민학교에 갇혀 있던 보도연맹원들을 이 고디굴로 끌고 갔다. 그리고 이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쐈다. 이런 일이 8월 12일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이 총살이 주로 야간에 진행되다 보니 생사 여부 확인이 어려웠다. 그래서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덕분에 고디굴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증언이 많이 확보될 수 있었다.

구룡포 앞바다에서 수장된 사람들
 
   해군은 민간인들은 배에 태워 바다에 수장시켰다.
▲ 현재의 구룡포항  해군은 민간인들은 배에 태워 바다에 수장시켰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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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국민학교에 구금됐던 민간인들은 고디굴에서만 학살된 것이 아니었다. 고디굴에서 학살이 일어나던 1950년 8월 9일부터 해군 헌병은 구금된 인원 중 일부를 트럭에 태워서 이동했다. 당시 목격자가 군인들의 철모와 완장에서 '헌병'이라는 글자를 뚜렷이 봤다고 증언했기에 이들의 신분을 알 수 있었다.

트럭이 구룡포항에 도착하자 헌병들은 경찰이 징발해 놓은 민간 어선에 끌고 온 사람들을 태웠다. 배의 규모는 15~20톤 정도였는데, 민간인들의 손을 뒤로 묶고 커다란 돌을 여러 개 실은 다음 출발했다. 그리고 40여분 후에 돌아온 배에 타고 갔던 사람들은 없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30~40여 명의 민간인들이 구룡포 앞바다에 수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수장된 곳은 구룡포뿐만이 아니었다. 영일만 앞바다에서는 수장이나 총살로 희생된 민간인이 무려 2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그 외에도 장기면 등 포항 곳곳에서 수많은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등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지만 포항 전체의 피해 규모는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고 한다.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애초에는 구금돼 있던 보도연맹원을 살해할 계획까지는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1950년 7월, 전황이 매우 급박해지면서 이들을 살해하게 됐을 개연성이 높다고 한다. 실제로 민간인들의 연행과 구금은 경찰과 대한청년단이 주도했으나 고디굴과 구룡포 앞바다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은 해군 헌병이 주도했다.

이는 앞서 말한 증언에서 나왔던 국방장관과 해군참모총장의 처형 명령에 따라 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특히 많은 학살 사건의 주체는 주로 우익단체와 경찰, 육군이었는데 포항 지역 사건을 통해 해군 역시 그 주체 중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메기 익어가는 계절, 구룡포
  
  한창 과메기를 말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 과메기 덕장  한창 과메기를 말리느라 분주한 모습이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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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룡포를 방문했을 때는 과메기를 말리는 덕장이 한창 분주하던 시기였다. 찬바람에 잘 말린 과메기는 겨울철 별미다. 전국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좋은 과메기를 맛보기 위해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구룡포는 여름보다 겨울에 더 많은 사람이 찾는 바닷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찾아오고 일상을 영위하는 이 평화로운 항구에서 수십 년 전 지금과 똑같이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작은 어선에 태워졌다. 밧줄로 두 손은 뒤로 묶이고 배에 커다란 돌이 함께 실릴 때 이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포항에서 만난 한 주민은 어렸을 때 자기가 살던 동네에 절대 해산물을 드시지 않는 할머니가 계셨다고 한다. 특별히 다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 거 같았다. 가난한 시절 바닷가 마을에서 해산물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 의아했다. 하지만 그때는 이유를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바다에 빠져서 고기밥이 됐을 가족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매년 겨울 과메기는 익어갈 것이고, 건설에 실패하면 다 같이 바다에 빠져 죽자는 각오로 지었다는 영일만의 제철소는 여전히 힘차게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어떤 이들에게는 수십 년간 고통스러운 기억의 공간이기도 했다.

국가는 이런 이들의 이야기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고사하고 오랜 시간 강제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그만 잊으라고 하는 건 그들이 겪었던 폭력의 또 다른 반복이다.
  
  영일만 일대에서도 약 200여명의 민간인이 수장되거나 총살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학살 현장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 영일만 호미곶 "상생의 손"  영일만 일대에서도 약 200여명의 민간인이 수장되거나 총살된 것으로 추산된다. 이처럼 학살 현장은 우리 일상 가까이에 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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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김동춘,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사계절
김기진, <끝나지 않은 전쟁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박태균, <한국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책과함께
진실화해위원회, <포항지역 국민보도연맹 사건>
한국일보, <남상휘씨 증언내용 "당시 국방장관이 처형명령">, 2000년 1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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