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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서 태어나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고 결혼도 인천에서 했다. 당연히 인천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느낀 점은 정작 인천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자주 갔던 애관극장이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 정확히 말하자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사실을 불과 5년 전에 알 정도였다. 몇몇 분들에게 이를 여쭤보니 알고 계신 분들이 적었고 애관극장과 함께 자주 갔던 현대극장, 미림극장, 오성극장, 인천극장, 자유극장 등 사라진 옛 극장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본 칼럼을 통해 사라진 인천의 옛 극장들이 인천시민 개인에게는 추억이었으며, 인천에는 평생 친구였고 우리나라에는 역사였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기자말]
필자는 인천 광성고를 다녔다. 그때 같은 반에 가좌동에 사는 친구가 있어 서구를 처음 가본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제법 먼 거리였고 동구에서만 살던 나에게는 참으로 낯선 동네였다. 공장들이 즐비했고 다가구연립주택들이 좁은 골목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그 친구 얘기로는 극장 하나 없어 영화 한 편을 보려면 동인천으로 나가야 한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예전에는 더 했다. 서구는 '개건너'라 불린 곳으로 인천 시내에서 서구(당시 서곳)로 가려면 번직이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고 갯골을 건너야 했다. 그래서 '개건너'인 것이다. 그러다 1958년에 그 나루에 인천교가 생기면서 비로소 서구는 걸어갈 수 있는 동네가 되었다.

서구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는 주부토군이었고 고려시대에 계양도호부라 불렸고 조선시대에는 부평도호부 서곶면이었다가 1940년에 인천부 서곶면이 됐다. 1988년에 북구에서 분구돼 인천광역시 서구가 됐다.

그래서 서구는 흔히 서곳 혹은 서곶으로 불렸다. 현재 서구의 인구는 50만 명 정도지만 면적은 인천의 34%를 차지하는 곳이다. 앞서 언급했던 인천교는 6.25전쟁 후 군사 목적으로 만든 다리로 1958년 완공됐다. 그러나 1980년대 그 일대가 매립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그곳을 인천교라 부른다.

인천의 역사는 매립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현재 인천의 1/3이 간척사업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땅이라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특히 서구가 매립으로 인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갯골과 연결되는 하구에는 방조제를 쌓아 간척지를 조성했고 염전이나 농경지, 공장용지로 개발됐다. 그래서 해안 간척에 의한 땅이 서구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원규 작가는 고향인 서구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내가 살던 서구는 당시 변두리였다. 인천 중심지까지 나오려면 1시간 반이나 걸렸다. 믿기 힘들겠지만 라디오를 유선으로 집집마다 연결해서 듣던 시절이었다. 틀어주던 사람에게 쌀 한 말 주고 들었을 것이다. 전기도 상당히 늦게 들어왔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서구 사람들은 영화를 접할 기획가 별로 없었는데 검암동에 서구 유일한 2층 건물이 있었는데 나중에 아버지에게 여쭤보니 '황해사'였다고 했는데 개간을 목적으로 만든 일본인 회사였다.

해방 후 그 건물은 나중에 새마을운동협회 같은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그 건물에서 이따금 영화를 상영했었다. 내가 여섯 살인가 될 때 형, 누나와 함께 <검사와 여선생>이란 영화를 봤는데 주위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모두 울었던 기억이 난다."
 
옛 석남극장 자리
 옛 석남극장 자리
ⓒ 윤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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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구는 문화의 불모지였고 상설극장 하나 없었다. 영화를 보려면 동인천으로 나가야 했고 서구에서 가장 가까운 극장이 현대극장이어서 그 극장과 함께 현대시장을 서구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

서구에 생긴 최초의 극장은 석남극장이다. 1988년 석남동에 개관했다. 인천의 다른 지역과 비교하면 매우 늦게 서구에 극장이 생긴 것이다. 석남동은 1977년에 석남, 가정, 신현동 일부가 통합돼 석남동이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인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급격히 발전한 곳이다.

당시 새한국당 이종찬 후보가 12월 2일 <장군의 아들>을 상영 중인 서구 석남극장 앞에서 유세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종찬은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데 상영 중인 영화가 장군의 아들인 것이 절묘하다.​
 
두성극장이 2001년 석남동 신현사거리에 개관했다.
 두성극장이 2001년 석남동 신현사거리에 개관했다.
ⓒ 아이-뷰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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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성극장이 2001년 석남동 신현사거리에 개관했다. 성인영화관이었고 무려 3편을 동시상영을 했다.​ 일반 영화관이 아닌 비디오물 상영관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3편 동시상영은 처음 본다.​
 
옛 두성극장이 있었던 현재 모습.
 옛 두성극장이 있었던 현재 모습.
ⓒ 윤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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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뒤에 두성주차장이 있다.
 건물 뒤에 두성주차장이 있다.
ⓒ 윤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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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두성극장이 있었던 현재 모습이다. 두성극장은 2008년에 폐관했다.​ 사라진 극장은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건물 뒤에 두성주차장이 있다.

계양구 효성극장과 계산예술극장​
 
계양구는 예전의 북구였다. 인천의 자치구에서 유일하게 서울과 직접 접경하는 지역이다. (출처 계양구청)
 계양구는 예전의 북구였다. 인천의 자치구에서 유일하게 서울과 직접 접경하는 지역이다. (출처 계양구청)
ⓒ 계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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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양구는 예전에 북구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천의 동북부에 위치해 남쪽으로는 부평구, 북쪽으로는 김포시, 동쪽으로는 서울 강서구, 남동쪽으로는 부천시, 그리고 서쪽으로는 인천 서구와 맞닿아 있다. 인천의 자치구에서 유일하게 서울과 직접 접경하는 지역이다.​

그리고 계양구란 명칭은 계양산에서 유래했는데 무려 정명 8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계양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인천 역사의 중심지였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산성인 계양산성이 있으며, 1215년에 계양도호부가 설치되었고 나중에 부평도호부도 현재의 계산동에 위치했다. 또한 기미년 3월 1일 인천 만세운동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곳도 황어장터였다.
 
효성극장이 있던 건물. 2021년 현재.
 효성극장이 있던 건물. 2021년 현재.
ⓒ 윤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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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역 인근에 부평극장, 대한극장, 금성극장 같은 유서 깊은 극장들이 생겨났는데 계양구에 처음 극장이 생긴 것은 매우 늦은 1987년이었다. 소극장 바람이 불던 80년대에 비로소 효성동에 효성극장이 개관했다.​ 극장이 있던 사거리를 효성극장 사거리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 폐관됐다. 
 
계산예술극장이 있던 건물의 현재 모습이다.
 계산예술극장이 있던 건물의 현재 모습이다.
ⓒ 윤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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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명이 계산예술빌딩이다.
 건물명이 계산예술빌딩이다.
ⓒ 윤기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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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예술극장은 1989년 작전동 852-42 4층에 개관했다. 당시 소극장 규모로는 제법 큰 252석이었다.​

건물 4층에 계산예술극장 간판이 크게 보인다. 사진은 2010년 모습이지만 폐관은 2006년이었다.​

글·사진 윤기형 영화감독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태그:#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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