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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관군 73인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청주 모충사 전경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 당시 목숨을 잃은 관군 73인인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청주 모충사 전경
ⓒ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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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기 아래에서 죽으리'의 한 장면. 일제강점기 시절 모충회 회장으로 있던 청주사람 이원하의 죽음을 다룬 영화다. 
 영화 '국기 아래에서 죽으리'의 한 장면. 일제강점기 시절 모충회 회장으로 있던 청주사람 이원하의 죽음을 다룬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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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기사] 일장기 앞에서 숨거둔, 대한제국 군인 이원하를 아십니까?

"나팔 소리와 엄숙한 '받드러 총' 의례식은 없었으나 살진 도야지(돼지)와 맑은 술은 탁상에 진열되고 유족과 회원들의 분향 배례는 축축히 내리는 가을비에 무한한 느낌을 주었다." (1923년 11월 14일 <매일신보> 기사)

1923년 11월 10일 당시 청주군 사주면 화흥리(현재의 청주시 모충동) 소재 모충사(謀忠社) 부지에 있는 충청병마절도사 홍재희(洪在熹, 1842~1895) 충혼비(忠魂碑) 앞에서 제사가 진행됐다.

제사는 조선총독부가 '불멸의 애국옹'이라 극찬한 이원하(李元夏)가 부회장으로 있는 모충회가 진행했다. 이 자리에는 모충회 회원과 관민 백여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당시 충북도지사 박중양이다.

창씨명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이라 불리며 친일에 앞장섰던 거물 친일파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충북도시사를 지낸 친일파 거두 박중양. 창씨명은 호추시게요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충북도시사를 지낸 친일파 거두 박중양. 창씨명은 호추시게요로 이토 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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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악행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충북도지사 재임 시절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를 속리산 법주사에 데려와 젊은 비구니 6명에게 술 시중을 들게 했다.

박중양은 이때 20살의 비구니 양순재를 겁탈했다. 천하의 몸쓸 짓을 당한 비구니 양순재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뼛속까지 친일파로 불린 박중양에 대해 당시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제목에 색마지사(色魔志士)란 단어를 붙였다.

일본 유학시절 물에 빠진 이토 히로부미의 처를 살려내 그의 눈에 들었다. 해방 이후에도 박중양은 이토 히로부미를 '이토공(公)'이라 존대했다.

명성황후와 함께 일인 낭인에 살해당한 충청 병마절도사 홍재희

'얼 빠진 애국옹'은 대한제국 진남영의 특무정교 출신의 군인이다. 진남영은 충의공 홍재희에 의해 설립된다.

1887년 당시 충청 병마절도사 홍재희(洪在熹)는 병영의 청사를 창건하고 병사를 모집해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듬해인 1888년 진남영(鎭南營)의 영호가 하사된다.

이원하가 진남영 소속이었던 만큼 홍재희는 그의 직속상관인 셈이다.

홍재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다. 1894년 갑오년 동학농민 전쟁 당시 왕실의 초토사가 돼 농민군을 진압하는 책임을 졌다.

이때 청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여 일제가 조선침략을 첫발을 내딛게 했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홍재희의 삶은 명성황후와 함께 빛을 보고 그와 함께 생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홍재희는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무예청(武藝廳) 이라는 왕실 호위대 소속 일개 '무사(武士)'였다.

그에게 출세의 기회가 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은 별기군을 창설한 민겸호와 김보현을 죽인 뒤 명성황후를 죽이려 했다.

이때 궁녀로 변장한 무예별감 홍재희는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피신시켜 그의 목숨을 구했다.

이후 충청병마절도사, 황실 호위부대인 장위영의 영관,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는 양호초토사로 승승장구했다. 홍재희는 나중에 이름을 홍계훈으로 개명했다.

1895년 8월 당시 일본공사 미우라는 낭인을 동원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자행한다. 이때 홍재희도 일본 낭인들에 맞서 싸우다 그들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자신의 직속상관비를 모충사로 불러들여 능욕한 모충회의 이원하
추모비 앞에서 궁성요배, 친일거두 불러들여 군인 정신 추모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이 작성한 논문 '대한제국의 장충사업과 그 이념'에 따르면 청주시 모충동에 있는 모충사는 일제강점기인 1914년 8월에 세워졌다.

처음 세워진 장소는 모충동이 아니라 지금의 충북도청 뒤에 있는 당산 북쪽이었다.

모충사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목숨을 잃은 관군 73명의 위페를 모신 사당으로 지어졌다.

모충회의 전신인 모충계가 주도했는데 모충계는 홍재희가 설립한 진남영 소속 군인들과 희생당한 관군의 유족들이 참여했다.

그렇게 유지되던 모충사는 일제에 의해 철거된다. 1923년 박중양이 지사로 있던 충북도와 일인들은 모충사를 허물고 그 자리에 일제 신사(神社)를 건립한다.

그러자 모충회는 지금 서원대학교가 들어서 있는 청주군 사주면 화흥리(현 청주시 모충동)으로 모충사를 이전했다.

이들은 모충사를 이전하면서 땅에 파묻혔던 박재희의 '영세불망비'를 이곳으로 옮겨온다.

이런 사실은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한 <매일신보>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청주 모충사에 남아있는 충청 병마절도사를 지낸 홍재희의 영세불망비. 
 청주 모충사에 남아있는 충청 병마절도사를 지낸 홍재희의 영세불망비. 
ⓒ 충북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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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1월 14일 <매일신보>는 "홍병사(홍재희)의 충정을 기념한 석비가 지금 충북도청 정문에 있던 것을 시구(市區) 개정될 때 어느 상점의 지하에 파묻혀 있다가 요즘 다시 파내게 됐다. 모충회원들은 장군의 공덕을 사모해 모충단 근처에 옮겨 세운 것"이라고 보도했다.

조선총독부와 충북도는 시구개정을 통해 각 지역의 읍성을 파괴했다. <매일신보>의 기사를 풀어보면 홍재희의 영세불망비는 원래 청주읍성 근처에 있는데 시구개정을 이유로 청주읍성을 허물면서 비를 땅에 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원하가 부회장으로 있던 모충회가 진행한 1923년 11월 제사는 과연 홍재희의 충혼을 위로한 걸까?

모충회는 행사를 진행하면서 뼛속까지 친일파인 호추 시게요 박중양 충북도지사를 불러들여 행사를 진행했다.

자신의 목숨을 앗아간 일제국주의 앞잡이로부터 칭송받는 '충혼'에 과연 홍재희가 이 사실은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매일신보>는 이날 행사를 두고 "모충단이라는 것은 묻지 않아도 경성의 장충단처럼 왕사(王事)에 죽은 군인의 충혼을 치사하는 것이오. 그 충혼을 치사하며 단과 비를 유지 수호하는 것은 그 회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 거리로 족히 후대에 전할 말한 일"이라고 했다.

이원하와 모충회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원하는 이후 모충회장으로 있으면서 회원들과 함께 홍재희의 충혼비를 앞에두고 일 황실을 향한 궁성요배 행사를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1923년 11월 14일 매일신보 기사. 기사에는 이원하가 부회장으로 있는 모충회가 박중양 충북도지사등이 참여한 가운데 홍재희의 추모비를 다세 세웄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1923년 11월 14일 매일신보 기사. 기사에는 이원하가 부회장으로 있는 모충회가 박중양 충북도지사등이 참여한 가운데 홍재희의 추모비를 다세 세웄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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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실은 <매일신보> 1927년 1월 8일자 기사에서 확인된다. 기사는 모충회 회장으로 있는 이원하가 일 천황 요시히토의 죽음을 기리며 청주시 사직동 모충사에서 1백여명과 함께 (궁성)요배를 했다고 전했다.

<매일신보>는 이원하와 모충회가 홍재희 비석을 세우고 이토히로부미의 양아들로 불리는 박중양 충북도지사가 한 행사를 두고 이렇게 기사의 끝을 맺는다.

"상당산에 해가 떨어지고 무심천에 물소리 목매 칠 때 의지없는 고혼은 홍 장군의 영혼을 중심으로 모충단과 충혼비가 서로 의탁하여 옛말을 하소연하면서 동고하던 친구의 따뜻한 정을 감사하며 영원히 청주를 진수하는 장성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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