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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성 서북쪽 2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518미터 중턱에 세워진 교룡산성 모습.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수도와 저술활동을 하기도 하고 김개남 장군이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삼았던 동학의 성지이기도 하다
 남원성 서북쪽 2킬로미터 떨어진 해발 518미터 중턱에 세워진 교룡산성 모습.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수도와 저술활동을 하기도 하고 김개남 장군이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로 삼았던 동학의 성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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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들과 함께 전북 남원시 산곡동에 있는 교룡산성을 올랐다. 교룡산은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안고 비상하는 형국으로 서쪽 봉우리를 밀덕봉, 동쪽봉을 복덕봉이라 부른다. 두 봉우리와 계곡을 감싼 포곡식 산성을 교룡산성이라 부른다.

지방기념물 제9호인 교룡산성은 백제시대 때 신라와 대적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을 당해 더욱 높게 수축했다. 교룡산성은 해발 518m의 교룡산 중턱에 둘러싸여 있는 성으로 둘레 약 3㎞(10,400척), 높이 4.5m(15척)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안경엽 회장이 교룡산성 입구에 세워진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팻말을 가리키고 있다.
 남원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안경엽 회장이 교룡산성 입구에 세워진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팻말을 가리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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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에는 마면 7개소, 샘 99개소, 치첩 1,016개소가 있었고 군창과 무기고가 있었다. 동서남북 4대문이 있었으며 현재 동문인 홍예문과 동서간 남벽이 남아있다. 성내에는 별장청, 장대, 곡성창, 구례창, 염고, 장고, 군기, 산창, 선국사 등이 있었고 정유재란 때 이곳에 곡식과 무기, 소금, 장을 보관하고 많은 승병이 있었다. 나라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는 호국사찰인 선국사에는 4점의 문화재가 있다.

고려말 왜구의 침략 때(1380년)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에 기여했으나 조선조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1597년) 때 명나라 장수 양원이 교룡산성을 포기하고 남원성만 고집하여 조·명 연합군이 참담하게 패배해 1만여 명이 희생됐다.

동학농민혁명(1894년) 때는 전라좌도 동학농민군의 주둔지였다. 교룡산성에 근거지를 둔 김개남 장군은 남원성을 점령하고 교룡산성을 수축하여 무장을 강화하였으며, 이후 9월 재봉기와운봉 민보군과의 싸움이었던 방아치 전투의 근거지였다.
  
교룡산성 내에 위치한 호국사찰 선국사 뒤편에서 남원시내를 바라보니 한눈에 들어왔다.
 교룡산성 내에 위치한 호국사찰 선국사 뒤편에서 남원시내를 바라보니 한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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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이 교룡산성 입구에 세워진 '김개남동학농민군주둔지' 푯말을 지나 조금 올라가니 호국사찰 선국사가 나왔다. 임진 정유의 두 왜란 당시 다수의 승병이 있었다는 데 날씨가 추워서인지 한 분의 스님도 보이지 않았다.

선국사 뒤편을 돌아 오솔길을 350m쯤 오르니 은적암(덕밀암) 터가 나왔다. 은적암은 수운 최제우가 1861년과 1862년 사이에 은거하면서 수도와 집필 활동을 하던 곳이다.

최제우는 수도가, 권학가, 동학론, 통유문,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를 쓰고 <동경대전> 경전 중 절반을 이곳에서 완성했다. 특히 논학문(일명 동학론)에서 '도(道)는 천도(天道)라 하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라 해서 처음으로 '동학(東學)'을 명명한 곳이기도 하다.

뒤에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백용성 스님도 이 암자에 출가했고 동학농민혁명 당시(1894년)까지 유지되고 있었으나 동년 12월 30일에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 제1중대에 의해 소각되었다.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1861년과 1862년 사이 은거하며 수도와 저술활동을 했던 은적암터에 선 일행들. 저술활동하던 최제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동학을 명명했다.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1861년과 1862년 사이 은거하며 수도와 저술활동을 했던 은적암터에 선 일행들. 저술활동하던 최제우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동학을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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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김용근씨의 설명에 의하면 "은적암의 뜻은 숨어있지만 언젠가는 세상을 바꾸는 수많은 백성의 기운이 쌓여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은적암에서 남원 시내를 바라보니 과연 남원의 모든 곳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임을 알 수 있었다. 불타 없어지고 안내 간판만 휑하니 남은 은적암 터에서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곳 없다'는 길재의 시를 떠올리며 허전한 발걸음을 돌렸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교룡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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