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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충북 영동군에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친일인사의 행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충북 영동군에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친일인사의 행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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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평생 땀흘려 모은 재산을 본교 설립에 기꺼이 희사한 怡堂(이당) 孫在廈(손재하) 公(공)의 발자취가 서린 곳. 이 터전을 공의 훌륭한 공덕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받아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역군으로 성장할 것을 다짐하는 배움의 전당으로 삼고자 한다. 2000년 7월 15일. 영동농공고등학교장 김병연" (손재하 추모비 앞면)
 
2010년 충북 영동군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친일파 손재하 추모비(앞면)
 2010년 충북 영동군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친일파 손재하 추모비(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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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일제하에 후학 양성의 신념으로 당시로는 천문학적 액수인 거금 5만원(쌀 한가마니 값이 2원)을 희사하여 본교를 건립하시었고 1947년 해방 후 사회혼란으로 교실이 全燒(전소: 모두 타버림)된 사고가 발생하자, 1948년 6월 며칠 밤을 고심한 끝에 "양간면에 논 오백마지기를 팔아라"고 가족에게 명하여 교실을 건축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이토록 공께서는 오로지 평생을 육영사업에 헌신하신 큰 어른이시다." (손재하 추모비 뒷면)
 
2010년 충북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친일파 손재하 추모비 뒷면
 2010년 충북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친일파 손재하 추모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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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충북 영동군 영동산업과학고등학교(이하 영동산과고) 교정에 친일인사의 행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추모비의 주인공은 손재하. 그는 해방 후 구성된 '반민족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로부터 '친일충견'으로 지목되고 정부로부터 '친일 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친일파다. 

영동산과고 교정에 남아있는 손재하의 추모비는 '육영지사 손재하 기념비'와 추모비 등 총 2기다. '육영지사 손재하 기념비'는 1969년 '영동농업고등학교 동회회주관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건립했다. 추모비는 2000년 7월 당시 교명이던 영동농공고등교장 명의로 건립됐다. 

추모비에는 그의 공적이 빼곡히 적혀있다. "평생을 육영사업에 헌신하신 큰 어론"(추모비)으로 묘사되거나 "근검과 절약, 노력으로 일관된 삶을 영위"(육영지사 기념비) 등 그의 일생을 미화하는 내용만 가득하다. 반면 손씨의 친일행적에 대한 기록은 일절 기록되지 않았다.

반민특위, 손 씨의 친일행적에 대해 "일제 충견, 충복"

육영지사로 기록된 손재하씨의 일제강점기 행적은 어땠을까? 1949년 8월 10일 반민특위충북도조사부 조사관 김상철씨가 작성한 범죄보고서에 손씨의 행적이 자세히 나와있다.

범죄보고서엔 손씨가 일제강점기 시절 영동군 선출 민선 충북도의회 의원 2기를 역임했고, 1939년 충주원 참의에 선출돼 3년을 역임했다고 쓰여있다. 기재된 범죄사실에 따르면 손씨는 충북도회 의원 재임 8년 동안 창씨제도에 찬성했다. 

'반도 장정 징병령' 실시를 敵政(적정:원수의 정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南次郞 남차낭)에게 청원했다. 당시 총독 '미나미 지로'는 일제 관동군사령관을 지내다 1936년 8월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모든 행사에 앞서 '황국신민서사'의 제창을 강요했다. 이를 기반으로 지원병제도를 실시해 많은 청년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으며, 국민징용법에 따라 많은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다. 1945년 종전 후 전범으로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금고형을 선고받았다.

또 한인징병제도 실시 요망의 건과 해군지원병훈련소 설치 요망의 건을 찬동했다. 손씨가 청원하거나 찬성한 '반도장정 징병령', '한인징병제도'등은 결과적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을 일제국주의전쟁터로 내몬 결과를 초래했다.
 
1969년 ‘영동농업고등학교 동회회주관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건립한 손재하 육영지사 기념비(앞면).
 1969년 ‘영동농업고등학교 동회회주관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가 건립한 손재하 육영지사 기념비(앞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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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의 친일 행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반민특위 범죄보고서에 따르면 손씨는 1939년 6월에 중추원 참의에 임명됐다. 손씨는 일제의 전쟁전성기에 전력증강, 전의앙양, 황민화 추진운동에 맹활약했다. 비행기 대금으로 1만 원을 헌납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이상 열거한 죄상이 일제하 충복으로서 적용법 반민족행위자처벌법 제4조 2항 及 8항에 해당한다고 명시했다. 반민특위가 작성한 또 다른 문서인 '의견서'에는 손씨를 "적극적(으로) 그 식민지정책 추진에 협력하였던 일제하 충견(忠犬: 충실한 개)"으로 기록했다.
 
손재하 육경지사 기념비 뒷면
 손재하 육경지사 기념비 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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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재산 물려준 일본인 죽자, 일본까지 찾아가 추모

반민특위는 범죄보고서와 의견서에서 손씨를 '일제의 충복', '일제의 충견'으로 묘사한 것 외에도 '내선일체의 수범'이라는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반민특위는 범죄보고서에서 손씨를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수범이라는 실화도 있고 거금(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영동우편국장 일인 孫田茂治에게 금품과 상업자금이며 내종에는 거주하던 주택까지 증여받은 자"라고 밝혔다.

반민특위는 '내선일체의 수범'이라는 실화는 '조선총독부시정참10주년기념사'에 수록됐다며 그 내용을 소개했다. 이에 따르면 손재하는 영동우편국장 (일본인) 孫田茂治와 동족 이상으로 친근했다. 일본인 우편국장의 재임기간에 무수히 (많은) 경제적 시혜와 원조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손 씨와 일본인 우편국장과의 사연을 소개한 신문
 일제강점기 손 씨와 일본인 우편국장과의 사연을 소개한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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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우편국장이 일본으로 돌아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일본으로 가 유가족을 위로했다. 또 일본인 우편국장의 묘지에 석물장식을 석공에게 만들게 하고 공사비로 당시 돈 1백 원을 주었다. 이에 대해 당시 신문들은 '내선일체의 아름다운 이야기(가화 : 佳話)라고 대서 특필하기도 했다.

손재하는 일제강점기 당시 충북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로 알려졌다. 반민특위 기록과 일제강점기 시절 언론보도에 따르면 손씨가 축적한 부의 원천이 '근검 절약'이었다는 추모비의 내용은 사실과 다르다. 일본인과 친하게 지냈고 그로부터 받은 경제적 시혜가 부의 원천으로 작용했을 가능성도 매우 크다.

손재하 후손 '친일파 아니다' 소송 냈지만 패소

손씨의 친일 행적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는 2002년과 2008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시켰다. 2009년 대통력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그러자 손씨의 후손들은 "(손재하는) 조선총독부의 강요에 못 이겨 참의직에 있으면서 회의에 참석만 했을 뿐이므로 일제에 협력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은 2010년 10월 선고한 재판에서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반민족적 자문기구로서의 성격과 기능, 참여 인물의 발탁 경위 등을 볼 때 중추원 고문이나 참의로 활동했다면, 그 자체로 친일반민족 행위라고 볼 수 있다"며 손씨 후손들이 제기한 재판에 원고 패소 판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북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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