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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종각에 걸려 있는 국보 성덕대왕신종.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경덕왕 때 만들기 시작해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올해로 1251세 된 어르신 종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종각에 걸려 있는 국보 성덕대왕신종.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 경덕왕 때 만들기 시작해 손자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했다. 올해로 1251세 된 어르신 종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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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인해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비대면 행사로 치러졌지만 매년 1월 1일 0시가 되면 서울의 보신각과 전국의 주요 도시에 있는 종각에서는 일제히 서른세 번의 종소리가 울린다.

'제야(除夜)의 종'이다. 제야란 섣달 그믐밤의 어둠을 걷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다. 불가에서 제석(除夕) 또는 대회일(大晦日)에 중생들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108번의 타종을 하던 의식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제야의 종은 왜 33번 치는 걸까. 조선 초 태조 4년. 1396년부터 종로의 보신각에서는 하루 두 차례 종을 쳐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을 열고 닫았다. 오후 10시 이경(二更)에 28번의 종을 쳐서 문을 닫았고, 오전 4시 오경(五更)에 33번의 타종과 함께 문을 열어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새벽에 울리는 33번의 타종을 '파루(罷漏)'라 하였는데 여기에는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이 이끄는 하늘의 삼십삼천(三十三天)에 고하여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렇듯 종소리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종(鍾)'은 각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일명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이라고도 부르는 성덕대왕신종은 현존하는 종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라의 종이다
 일명 ‘에밀레종’ 또는 ‘봉덕사종’이라고도 부르는 성덕대왕신종은 현존하는 종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라의 종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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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범종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법구이지만 종교적 의미를 넘어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종 중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이 있다.

1976년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을 맞아 LA에 기증한 우정의 종과 1985년에 다시 만들어진 보신각 종도 이 종을 본떠서 만들었다. 모든 종의 모델이 되는 신라의 종이 있다.

전설 속의 에밀레 종

"신과 사람의 뜻이 모여 진귀한 종이 만들어지니 마치 신령스러운 용이 우는 것 같았다. 보는 자는 귀하다 할 것이고 듣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진동해 들어도 그 울림을 들을 수 없다."
 

서기 771년. 통일신라시대 혜공왕 때 완성된 국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몸통에 새겨진 명문의 중의 일부다. 그랬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종의 울림은 천상에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신의 소리였다.

일명 '봉덕사종'이라고 하는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은 우리에게 '에밀레 종'이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더 알려진 종이다.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종을 매달기 위해 만든 용머리 모양의 ‘용뉴(龍?)’는 금방이라도 용트림을 할 듯 매우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이다
 종을 매달기 위해 만든 용머리 모양의 ‘용뉴(龍?)’는 금방이라도 용트림을 할 듯 매우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이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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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이라는 이름에는 슬프고도 무서운 '인신공양'의 전설이 들어 있다. 종을 만들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봉덕사 승려들은 전국을 돌며 시주를 받았다. 어느 가난한 집 여인은 젖먹이를 내보이며 우리 집에서 "시주할 거는 이 아이뿐"이라 했다. 스님은 아이를 어찌 받겠나며 포기하고 돌아왔다.

시주받은 제물을 모아 종을 만들고 또 만들었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스님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그 아이를 넣어야 소리가 난다는 계시를 한다. 스님은 그 길로 여인의 집으로 달려가 아이를 데려와 도가니에 넣고 그 쇳물로 종을 만들었다. 그제야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종을 칠 때마다 어린아이가 '에밀레~ 에밀레~' 하며 엄마를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 설화는 역사적 기록이 없을뿐더러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았다. 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사람의 뼈를 구성하는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전설이 유래하게 된 건, 조선 말기 유림의 세력들이 경주지역의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설이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에는 화려한 연꽃이 만발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에는 화려한 연꽃이 만발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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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의 명복 비는 아들 경덕왕과 손자 혜공왕의 기도

성덕대왕신종은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서 압도적 크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높이 3.66m, 무게 18.9톤, 두께 11cm에서 25cm, 밑지름 2.27m에 이른다. 종을 매달기 위해 만든 용머리 모양의 '용뉴(龍鈕)'는 금방이라도 용트림을 할 듯 매우 역동적이고 사실적인 모습이다.

몸통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연꽃과 모란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몸체 표면에 천의를 걸친 채 향로를 들고 마주 보는 두 쌍의 비천상(飛天像)을 신비롭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선인(仙人)들은 구름을 타고 날아오를 듯하다.

그 사이에 종의 제작과정을 담은 약 10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문장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撞座)'에는 화려한 연꽃이 만발했다.
     
몸체 표면에 천의를 걸친 채 향로를 들고 마주 보는 두 쌍의 비천상(飛天像)을 신비롭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몸체 표면에 천의를 걸친 채 향로를 들고 마주 보는 두 쌍의 비천상(飛天像)을 신비롭고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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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이 종의 매력은 소리에 있다. 신령스러운 종소리의 비밀은 일정하지 않은 몸체의 두께에 숨어 있다. 두께가 다른 부위에서 나는 소리들이 서로 교란을 일으키는 '맥놀이' 현상이 반복되면서 끊어지는가 하면 끊기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

아쉽게도 신비의 종소리는 2004년부터 직접들을 수 없다. 타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타종을 계속할 경우 종에 충격을 주어 자칫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종은 쳐야 종이다"라며 정기적인 타종을 주장하기도 한다.

통일신라시대 금속공예 예술의 결정판이라는 이 종은 신라 제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이 아버지 성덕왕(재위 702~737)의 업적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다. 성덕왕은 삼국통일 후 35년간 재위하면서 국가의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경제와 민생을 안정시켜 신라의 전성기를 이룬 왕이다.
  
몸통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연꽃과 모란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몸통 상하에 넓은 띠를 둘러 연꽃과 모란 넝쿨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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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왕은 아버지를 위해 지었던 봉덕사(奉德寺)를 원찰(願刹)로 삼고 여기에 걸어두기 위해서 주조를 시작했으나 생전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손자 혜공왕이 대를 이어받았다.

2대에 걸친 대역사 끝에 종은 비로소 완성되었고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라 명명하였다. 혜공왕 7년, 통일신라의 문화 예술이 절정기를 이루는 771년 때의 일이다. 올해로 1251살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 중에서 강원도 상원사 동종 다음으로 연세가 많은 어르신 종이다.
  
두 쌍의 비천상 사이에 종의 제작과정을 담은 약 10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문장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두 쌍의 비천상 사이에 종의 제작과정을 담은 약 1000여 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명문은 문장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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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조선의 '창과 칼'이 될 뻔한 신라의 종
 

화려한 문양과 조각기법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신종은 1250여 년의 세월을 이어오는 동안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성덕왕의 원찰이었던 신라 봉덕사에 봉안되었던 종은 고려를 지나 조선 세종대까지 약 700여 년을 그 자리에 있었다. 그 후 1460년 경주에 대홍수가 발생하여 봉덕사가 폐사되면서 정처 없이 떠돌게 된다.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이 시행되면서 수많은 범종이 사라지게 된다. 성덕대왕신종도 녹여서 무기를 만들자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세종대왕은 "봉덕사의 큰 종은 헐지 말라"라고 지시한다. 문화 예술을 숭상했던 성군 덕에 화를 면한다.

한동안 가시덤불 속에 방치됐던 종은 세조 때 '영묘사(靈廟寺)'로 옮겨진다. 영묘사로 온 지 40여 년 후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고 또다시 노천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다. 이후 1506년 중종 원년에 남문 밖 신라 고분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거처를 옮겼다.
  
1975년 새롭게 지어진 국립경주박물관 전경. 박물관 입구 오른쪽 종각에 올해로 1251년 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한민국 국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 걸려 있다.
 1975년 새롭게 지어진 국립경주박물관 전경. 박물관 입구 오른쪽 종각에 올해로 1251년 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대한민국 국보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이 걸려 있다.
ⓒ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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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400여 년 동안 성문을 여닫을 때와 정오에 성음을 토해내며 불가의 범종이 아니라 도성의 '관종(官鐘)' 역할을 하게 된다. 그 후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15년 경주박물관의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로 옮겨졌고 1975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새로 지어지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신라, 고려, 조선을 지나 대한민국까지. 세 왕조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신종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1962년 대한민국 국보로 지정돼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 천상의 종소리를 더는 들을 수 없어 아쉽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 가야 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 128호 (2022년 1, 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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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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