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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제는 산간 지역에 눈이 내린 덕에 시내에서 올려다본 한라산 설경이 너무 아름다워 제주살이 16일째인 12월 20일은 한라산 등반으로 결정했다. 코스는 영실 탐방로다. 영실에서 윗세오름으로 올라 남벽 분기점을 찍고 오는 왕복 11.6㎞ 거리다.

김밥과 따뜻한 차, 컵라면 등 먹을거리를 준비해서 아침 9시 30분에 영실 관리사무소(해발 1000m)에 도착하니 주차장은 이미 만차다. 주차장 입구 갓길에도 주차된 차량이 족히 1㎞는 늘어서 있다. 차를 세우고 관리사무소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이다. 평소에는 관리사무소에서 등산로 입구인 영실휴게소(해발 1280m)까지 2.4km는 자동차로 이동 가능하나 도로가 빙판길이라 등산객도 아이젠과 스틱 없이는 오를 수가 없다.

영실휴게소에서 여장을 다시 정비하고 잠깐 숨을 돌린 후 탐방로로 들어섰다. 영실은 동북 쪽에 기암괴석들이 하늘로 솟아 있는 모습이 석가여래가 설법하던 영산과 흡사하다 하여 영실이라 불렀다고 한다.

숲에 들어서니 제주도 고산지대에선 보기 힘든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그것도 적송이다. 알고 보니 2001년 '제2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우수상을 수상했단다. 숲의 기품이 느껴진다.

영실계곡을 지나 영실분화구 능선이 시작되는 지점까지는 평지에 가까운 완만한 길이다. 눈 덮인 산의 적요를 깨며 산꾼들은 산 정상의 깊은 설경 속으로 바쁘게 오른다. 오백나한이 열병한 영실기암을 끼고 병풍바위까지 오르는 길 2㎞ 정도의 구간은 45°의 급경사다.

이곳 기암은 1200여 개 석주가 빙 둘러쳐져 있는 형상이 마치 병풍을 쳐 놓은 것 같다고 하여 '병풍바위'다. 이 바위들이 설법을 경청하는 불제자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오백나한이라 불렸으며, 또한 억센 장군들과 같다고 하여 오백장군이라 부르기도 한단다.

길은 가팔랐으나 설경에 정신이 팔려 힘든 줄을 모르고 오르고 또 올랐다. 영하에 가까운 기온인데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진다. 탐방로 우측으로는 아스라한 계곡이고, 좌측으로는 키 작은 잡목숲이다. 구상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철쭉 등이 서로 얽혀 의지하며 눈에 덮여 눈꽃을 피워내고 있다.

형언할 수 없는 숨 막히는 순백의 아름다움이다. 산객들은 경관 좋은 곳에서 멈춰 숨을 몰아쉬며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다. 먼바다에서 몰려온 바람이 저지대 들녘을 건너 오름을 돌아 한라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땀을 식혀준다. 겨울바람인지라 오싹하다. 발걸음을 재촉한다.
 
윗세오름 탐방로 병풍바위를 올라서면 바로 선작지왓 평원으로 이어진다. 그 입구의 설경이 산객의 시선을 잡는다.
▲ 선작지왓 설경 윗세오름 탐방로 병풍바위를 올라서면 바로 선작지왓 평원으로 이어진다. 그 입구의 설경이 산객의 시선을 잡는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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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실분화구 능선 끝자락 병풍바위를 지나니 평지로 이어진다. 나무들은 더 많은 눈을 이고 눈에 싸여 있다. 현무암 너덜겅 사이로 우거진 숲은 유연하게 겨울을 견디며 봄으로 건너가고 있다. 그 의연하고 초연한 자세에 경외감이 든다. 선작지왓 평야지에 이르니 온통 조릿대 나무 평전이다. 족은오름과 붉은오름이 평전 가운데에 우뚝 서서 에뜨랑제를 반긴다.

​평전 중간쯤의 만세동산에 오르니 제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많은 오름과 곶자왈과 숲이 마을들을 보듬고 아기자기하고 포근하게 앉아 있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섬이다. 동산 주변으로는 시로미, 털진달래, 눈향나무가 하얗게 변장한 채 추위를 견디고 있다.

한겨울인데도 마르지 않은 노루샘에서 목을 축이고 윗세오름으로 향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길목에서 눈오리를 찍어 나눠준다. 눈사람만 봐온 터라 플라스틱 틀에 눈을 담아 작게 찍어주는 눈오리가 앙증맞고 귀엽다. 눈오리 한 쌍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랩소디 한 소절… 다운되었던 기분이 초콜릿을 삼킨 듯 상승한다.

윗세오름(해발1700m )에 오르니 운무에 가려있던 시야가 우리를 반기듯 뻥 뚫려 하늘은 그지 없이 푸르고 산야는 순백이다. 윗세오름을 찍고 곧장 13시까지만 열어둔다는 남벽분기점(해발 1,600m)으로 향했다. 남벽분기점의 설경을 먼저 다녀간 친구에게 들은 터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백록담 분화구 남쪽 벽을 끼고 탐방할 수 있는 구간은 2.1㎞로 왕복 2시간 가까이 소요된다.

천상의 설원 윗세오름
 
축복처럼 활짝 열린 하늘 아래 백록담 남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 남벽분기점 탐방로 계곡에서 바러본 백록담 남벽 축복처럼 활짝 열린 하늘 아래 백록담 남벽이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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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벽을 보는 것만으로도 백록담에 오른 것만큼의 만족감을 느꼈다. 능선을 따라 우뚝 솟은 돔형의 바위에 눈이 쌓여 천의 얼굴로 조각된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모양이다. 분기점까지는 가지 못하고 남벽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 나왔다.

내려올 때 보니 남벽 아래쪽 능선에도 조릿대가 오랑캐처럼 점령하고 있다. 강력한 번식력을 가지고 있는 조릿대는 토양침식을 억제하여 토양층의 성숙을 유도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한라산 아고산대의 여러 식물종을 쇠퇴시키고 있어 국립공원관리소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으로 향하는 남벽탐방로에서 만난 백록담 남벽 풍경
▲ 한라산 윗세오름 남벽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으로 향하는 남벽탐방로에서 만난 백록담 남벽 풍경
ⓒ 임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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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윗세오름에 이르니 13시가 넘었다. 휴게소는 폐쇄되고 화장실은 공사 중인 황량한 대피소에서 산객들은 삼삼오오 양지쪽 언덕에 모여 앉아 김밥이나 컵라면으로 오들오들 떨면서 점심 요기를 하고 있었다. 영실, 어리목, 돈내코에서 오르는 산객들이 모두 모이는 곳이라 대피소는 북새통이다. 우리도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준비해 간 음식으로 대충 때우고 바삐 하산길에 올랐다.

내려가는 길에는 숨 막히던 영실기암의 절경은 벌써 눈이 녹아 사라지고 없다. 대신 아찔한 절벽만이 산꾼들의 발길을 다잡는다. 방애오름을 중심으로 웃방애오름, 알방애오름이 가까이 왔다가 멀어졌다가 하면서 나그네의 하산길을 친구가 되어 준다.

다리는 꺾이고 꺾여 쉬어가라고 다그친다. 한라산 터줏대감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길목마다 날아와 길 안내를 해준다. 눈이 녹은 코스가 많아 아이젠을 끼웠다 벗었다를 반복하면서 영실 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 16시다. 꼬박 6시간 30분이 걸린 셈이다. 제주살이 한 달 동안 또 하나의 숙제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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