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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시 삼길포 만석식당 권정금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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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서산시 대산읍 삼길포구, 수몰민들의 슬픔과 근원의 아픔들을 간직한 포구에서 오랫동안 가슴 한 켠을 억눌러야 했다.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세월의 흔적들이 낯익은 포구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인적이 드문 곳의 갈매기는 유난히 울음소리가 외롭다. 고운 물살과 차가운 햇살이 맞물린 19일, 웃음이 화사한 권정금 대표를 만났다. 그녀는 2대째 삼길포구에서 어머니에 이어 만석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포구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했더니 "연말에는 대목을 좀 볼까 했더니 코로나 변이가 나타나면서 관광객의 발걸음이 뜸하다"며 "예전 같으면 지금 이 시간에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보시다시피 (손님)없으니 옛날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올라온다"고 말하며 지난 시간을 기억해 주었다.
     
어린 시절부터 바다 일을 하며 집안을 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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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수몰되어 바다 한가운데에 놓여진 고향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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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몰된 삼길포에서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당시 9월은 한창 바닷일에 분주한 때라 엄마는 그녀를 낳고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가난은 어린 그녀조차 삶의 현장으로 등을 떠밀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바를 무지했다면 믿으시겠어요? 용돈이 없어 굴을 따고, 황발이를 잡고, 실치를 건지고, 김 뜨는 일을 했어요. 꼬맹이 때부터 바다 일이라곤 안해본 게 없던 아이였죠. 그때는 삼길포에도 실치가 많이 잡혔거든요. 지금은 모두 장고항으로 넘어갔지만요.

당시 우리 부모님은 중선(中船)을 타고 실치를 잡으러 나가셨어요. 그러면 저는 초등학교 저학년 몸으로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물을 길어놨어요. 다른 집보다 유난히 가난해서 한 끼는 고구마나 감자를 먹고, 또 한 끼는 보리밥을 먹곤 했어요. 그러다 정부미 쌀이 나오면 또 그걸로 겨우 다섯 식구 입에 풀칠했고요."


고사리손으로 아무리 집안을 정리해도 창고가 집이었던지라 도무지 티가 나지 않았단다. 중선을 타고 나간 부모님이 조금만 늦게 돌아오더라도 그녀는 항상 걱정을 했다. 간혹 배를 타고 나간 마을 사람들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때가 있었다. 죽음은 늘 가까운 곳에 머물곤 했다. 때론 통발 줄에 사람이 딸려 들어가서 죽기도 했다.

마을 어귀에 부모님 소리가 나면 그때서야 자릿자릿 따뜻한 햇살이 닿는 것마냥 불안하던 마음이 포근해졌던 그녀. 뛰어가 엄마 품에 안겨 코를 비비면, 비릿한 바닷내음과 함께 엄마의 거친 손이 어린 그녀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그때는 엄마만 있으면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멸치나 실치를 주로 일본으로 수출하던 시기였어요. 부모님은 잠도 잊은 채 수확해 온 실치를 찌고 말렸죠. 멸치도 쪄서 말리고요. 저는 옆에서 포장을 했습니다. 졸음이 쏟아져도 부모님의 억척스러운 삶을 알기에 어린 마음에도 손을 놓지 못했던 것 같아요."

간척사업을 하면서 권정금 대표가 사는 마을은 지금의 삼길포구로 집단 이주를 하게 됐다.

"삶의 애환이 묻어난 곳을 떠나야 했던 저희 부모님은 얼마나 섭섭하셨겠어요. 자꾸만 돌아보는 모습이 당시에는 이해가 안 됐어요. 저는 너무 신났거든요."

그렇게 가난했던 그녀의 집도 15살 무렵부터는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부모님은 대호방조제를 막으면서 물길이 바뀌어서인지 실치가 잡히지 않자 중선을 포기하셨다.

당시는 인천에서 출발한 왕경호가 삼길항을 경유하면 이곳에서는 생선이나 꽃게류를 배에 실어 인천으로 올려보내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싱싱한 어류라도 시간이 지체되다 보니 냉동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죽은 고기는 1/10 가격밖에 안 되는 것을 안 부모님은 그것에 착안하여 새로운 사업에 눈을 돌렸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서 배를 제조해왔던 부모님은 지명을 따 '만석호'란 이름을 붙였다. 만석호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다. 싱싱한 어류를 도매하셨고, 삼양수산업과 연계하여 패킹 작업한 꽃게를 일본으로 수출하곤 했다.

"아버지는 허리가 안 좋으셔서 주로 생계는 엄마가 책임지셨지요. 늘 바쁜 엄마를 위해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여전히 집안 살림은 제 차지였죠. 그러다 서산여고를 거쳐 홍성 혜전대 관광학과에 입학했고, 졸업 전에 이미 서초동 팔레스호텔에 취직하면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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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장김치 1000포기를 담는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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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에 사직서를 내고 삼길포로 내려오다

"바닷가에서 맨날 법석대는 사람들과 갈매기만 보다가 세련된 음악이 흐르고 멋진 곳에서 가운을 입고 근무하니 부모님이 상당히 좋아하셨어요. 예쁜 옷 입고 삼길포로 내려가면 엄마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었어요(웃음)."

7년 만에 그녀는 호텔 일을 접고 서산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어머니의 부름이었다. 당시 굴지의 화학회사들이 대산에 들어와 가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엄마는 사업수완이 뛰어나신 분이셨어요. 때를 맞춰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셔서 제 바로 아래 남동생을 3년 동안 경북 구미로 회 뜨는 기술을 연마하도록 보내셨죠. 그곳에서 배우고 내려온 동생이 쓰키다시를 무려 30가지에서 50가지를 서산 최초로 선보였어요. 장사가 엄청 잘 됐었죠. 무려 3개월에 1억씩 순수익이 났다니까요. 지금이야 꿈같은 얘기지만요. 그러니 저까지 러브콜 할 수 밖에 없었죠."

27살 그녀는 식당일에 뛰어들었다. 관광학과를 졸업했고 더구나 호텔에 근무하다 보니 손님 대하는 것에는 수월했던 그녀. 더구나 어머니가 부녀회장직을 맡다 보니 그녀가 챙겨야 하는 일은 의외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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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금 대표와 자녀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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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엄마 혼자 인천 병원으로 올라가셨어요. 뇌동맥류라고 뇌에 꽈리 같은 게 있다면서 시술을 하려고요. 시술 도중에 엄마가 그만 의식을 잃으셨고 중환자실에 계시다 10일 만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가 12월이었어요. 엄마 연세가 겨우 50이었죠.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더 어렸던 우리 엄마.
당시 의료사고란 걸 알았지만 저도 동생들도 모두 너무 어렸어요.

그저 집안의 기둥이 무너졌으니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눈물만 흘렸던 것 같아요. 아버지도 힘들어하셨죠. 27살 젊은 나이부터 허리가 편찮으셨던 아버지를 2년 동안이나 업고, 손수레에 태워 백방으로 다니시던 우리 엄마였거든요. 고생은 혼자 다 하시고 살만하니까 돌아가신 거죠. 엄마를 서산 희망공원에 안장했어요. 지금도 힘들 때면 가끔 보러 가는데 다녀오면 좀 편안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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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화문광장에서 현대오일뱅크 고체연료 신?증설 허가에 대한 철회를 요구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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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떠났지만 그녀는 서산시 대산읍에서 어머니가 하던 사업을 이어받아 2대째 만석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권정금 대표는 지난 2년간 잔 다르크가 된 적이 있었다. 현대오일뱅크 고체연료 신․증설 허가에 대한 철회때문이었다. 작은 어촌마을 주민들의 소리를 들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다녔다. 지역주민 목숨을 위협하는 코크스에 대한 강력한 규탄을 주민들과 함께 해나갔다. 환경이 파괴될 것이 뻔하여서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단다.

"세종시 산업통상부 정문에서 1인 시위도 하고 대산 명지사거리에서 새벽마다 피켓을 들기도 했어요. 환경이 파괴되면서 분진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이 끔찍했거든요. 사람뿐만 아니에요. 채소에도, 심지어 우리 가까이 있는 모든 것에도 영향을 미칠 거잖아요. 결국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 되는데 어떻게 국자만 들고 있겠습니까.

나만 잘살자고 나 몰라라 하기에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너무 불쌍한 거예요. 그래서 나간 거죠. 안되면 저감장치를 통해 분진이라도 나오지 않도록 조치하라고. 정말 감사했던 건 처음에는 방관하던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귀를 기울이며 동조는 모습이었어요. 어쨌든 정부의 탈석탄 정책으로 무산됐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함께하면 못해낼 것이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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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탄 500장을 기부한 권정금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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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베풂에 나서다

거리에 조명등이 들어오자 거리는 색다른 분위기로 변하기 시작했고, 갈매기들은 저녁노을을 받아 힘찬 날갯짓을 하며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삼길포구에 어둠이 내렸다. 그녀 가게도 마지막 손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심히 가시라"는 그녀의 인사가 허공으로 퍼졌다. 2년 연속 바이러스로 인한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그녀는 꿈꾸는 법을 배웠다.

세상에 대한 깊은 연민을 알게 된 권정금 대표. 소외된 이웃을 챙겨나가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조금 더 비싸더라도 장애인들이 만든 제품을 구입하여 그들에게 보탬이 되고자 노력한다고 했다.

타지역의 열악한 곳에도 아낌없는 나눔을 베풀고 있는 그녀 모습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지역을 따질 필요는 없다는 그녀. "월드비전에도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지역은 그냥 지역일 뿐 베풂에는 한계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제일 먼저 챙겨나가야 하는 사람은 역시 우리 삼길포 249가구 주민이죠. 인원수로는 대략 500여 명이 넘어요. 다들 바쁘게 살죠. 그런데 저녁만 되면 이분들이 어디 가볼 만한 곳이 없어요. 딱히 문화센터조차 삼길포에는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 주민들이 늦은 시간에 서산시내로 나가 수업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요. 울산에 가보면 참 부러운 것이 바로 기업들의 지역에 대한 배려에요.

얼마 전 지역구 의원이 기고한 것을 봤어요. 우리 지역에는 대한민국 최대 정유회사들이 있어요. 대산 5사의 최근 5년간 국세 납부액이 자그마치 24조 3711억 원이래요. 하지만 지방세 납부액은 총액의 불과 1%인 3095억 원에 머물러 사실상 지역 재정 살림에는 '그림의 떡'이라는 기사였죠.

또 지난 30여 년간 대산석유화학단지 사고로 인해 대기오염, 토양 오염, 지하수 오염, 중금속 피해 등으로 서산시의 고통이 아주 많았죠. 당시 우리 삼길포는 외부인의 발길이 뚝 끊어진 적이 많았고요. 그런데도 주민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보니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한 게 사실이에요.

저는 그 의원의 말씀에 덧붙여 삼길포 주민들이 안전하고 쾌적한 환경 속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것이야말로 화학회사의 발전에 기여한 삼길포 주민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지 않을까요."


권정금 대표를 바라보면서 문득 바다로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엄마 얼굴을 그렸던 어린 모습이 오버랩됐다. 때로는 새벽잠을 설치며 뱃일 나가는 부모님을 실눈으로 바라봐야 했던 모습부터 두 남동생을 챙기며 어린 손으로 밥상을 차렸던 어린 여자아이까지.

그녀에겐 여전히 어려운 이웃들이 바로 자기 자신일 수 있다며 세상의 톱니바퀴 속으로 다시 맞물려 들어갈 때마다 "내 딸 잘하고 있어. 세상은 누군가의 작은 손길로도 따뜻할 수 있어"라는 엄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녀는 인터뷰를 마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생명 있는 모든 존재는 언젠가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게 삶의 원칙이죠. 이런 부분에서 신은 정말로 공평한 것 같아요. 저는 이제 여태껏 해보지 못한 또 다른 꿈을 꾸려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설 것이고, 주위의 신음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며, 무엇보다 마을을 지키기 위해 애쓸 것입니다. 벌써 1년을 마무리할 때입니다. 세상의 모든 분들이 내내 여여하기를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서산시대에도 실립니다.


태그:#만석식당, #삼길포 횟집, #당찬누나 잔다르크, #국자들던 손에 피켓을 들고, #수몰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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