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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원상회복추진위원회 소속 교사들이 해직 당시 겪었던 국가 폭력 행위의 구체적 실상에 대해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1989년 6월 먼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진주 제일여고 영어 선생으로 3년 차 근무할 때였다. 나의 60 평생 인생에서 이때보다 더 가슴을 에이는 선택의 기로는 없었던 것 같다. 불과 일주일 남짓 짧은 시간이었지만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번민과 정신적 고통을 겪었었다.

혈기 왕성하던 젊은 시절, 학생들을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고 있었다. 영어 과목 이외에도 인간으로서 어떻게 바르게 살 것인가에 대해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나 또한 선생으로서 바르게 사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학생들이 나오기 전에 아침 일찍 학교에 나와 칠판에 바르게 사는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좋은 말들을 써놓았다.

얼마 전 나를 찾아온 그 당시 제자들 중 몇몇이 아직도 그때 적어놓았던 공책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녀들에게 가끔씩 좋은 말들을 들려준다 하기에 나는 깜짝 놀랐다. 여름 방학 때 학생들에게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를 한 권씩 다 사주기도 했고, 안중근 의사의 어록도 알려주면서 학생들이 올바른 삶을 살기를 바랐다.

1989년 6월 전교조 결성식 이후 노태우 정부의 전교조 탄압이 시작되었다. 돌이켜보건대 89년은 노태우 정부의 중간평가가 있는 해였다. 당시는 노태우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는 많은 시위들이 있었고, 중간평가를 받으면 정권 유지가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 시기에 마침 전교조가 탄생한 것이다. 노태우 정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정부는 전교조를 희생양 삼아 정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고도의 술책을 썼던 것이라 생각된다. 정부는 전교조 결성이 불법이기 때문에 탈퇴해야 한다는 최후통첩을 전국의 모든 학교에 보냈다. 탈퇴하지 않으면 파면 또는 해임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전교조에 가입한 모든 선생님들에게 강력한 압박을 해오기 시작했다. 내가 근무했던 진주 제일여고에는 열 분의 선생님이 전교조에 가입해 있었다.

탈퇴하지 않으면 모두 파면이나 해고를 시키겠다는 정부의 강경 방침에 학교는 술렁거렸다. 정부의 부당한 탄압에 맞서 끝까지 탈퇴를 거부하고 전교조를 사수하겠다고 남게 된 선생님은 다섯 분이었다.

전국적으로 모든 언론과 교육청을 포함하여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하여 정부는 전교조 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전교조는 이에 대해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대부분이 탈퇴하고 전국에 1500여 명의 교사만이 전교조에 남게 된다.

에베레스트 등반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지만...

그때 당시의 나는 전교조 조합원이 아니었다. 교육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었다기보다는 그 당시 나에게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이라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다. 주말엔 배낭을 짊어지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여름 겨울 방학에는 한국등산학교 51기에 들어가 설악산 암벽과 빙벽을 오르는 훈련을 해가던 중이었다.

내 주위에 헌신적으로 학생들에게 열정을 쏟고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동료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는 풍전등화의 상황이었다. 나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학생들을 사랑하고 헌신적인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상황을 모른 체하며 이대로 교사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학생들에게 가르친 바대로 'Do what you think is right?(옳다고 생각하는 바대로 행하라.)' 행동할 것인가!

아무리 고민하고 깊이 생각해도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정부의 탈퇴 압박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일요일 학교 운동장에 나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으면서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잠시 뒤에 고통이 사라지며 마음이 맑아지면서 복잡했던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때 불현듯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안중근 의사의 말씀이 떠올랐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이로움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라, 나라의 위기를 보면 목숨을 던져라!)'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전교조 선생님들을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는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학교 전교조 분회 대표 선생을 찾아가서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전교조에 가입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학교 대표 분회장 선생님은 모든 선생님이 지금 탈퇴를 하는 상황에서 가입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날 바로 진주지회에 가서 전교조에 가입하러 왔다 하니 모두들 놀라면서 나의 용기와 기백에 탄복하며 크게 환대해 주었다.

그 당시 분위기로는 탈퇴하지 않으면 모두 파면 내지 해고를 각오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와 같이 가입하는 선생이 점점 많아지면 정부로서도 더 이상 탄압할 수 없으리라고 확신하였고, 그 길만이 전교조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바람은 생각과는 달리 많은 전교조 선생님들이 탈퇴를 하였고 나처럼 가입하는 선생은 거의 없었다. 결국 1989년 6월 24일 해고 통지를 받고 더 이상 학교에 나갈 수 없게 되었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없는 비극적 상황에 맞이하게 되었다.

해직되고 난 이후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이었다. 무엇보다도 경제적으로 타격이 컸다. 장남으로서 그동안 부모님께 매달 꼬박꼬박 드렸던 생활자금을 드릴 수 없게 되었다. 간절히 원하고 착실하게 준비를 해왔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에 오르고자 하는 나의 꿈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당한 공권력의 탄압에 해직당한 진실을 국민들께 바로 알리는 작업을 하면서 복직 투쟁을 계속해 나갔다. 얼마 되지도 않아 찾아쓰던 연금은 바닥이 났다. 전교조 사업으로 학교마다 찾아다니면서 물건을 팔기도 하였다. 탈퇴했던 선생님과 전교조를 지지하는 많은 선생님들이 매달 후원금을 내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선생님들을 크게 돕기도 하였다.

장남으로서 생활력이 없는 시골에 사시는 부모님에게 차마 해직 사실을 알릴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부모님을 봉양해야만 했다.  아동용 책 판매 영업사원이 되기도 했다. 문전박대를 당하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전집을 팔아야만 했다.

시골 바나나 농장에 취직을 하여, 하우스 속의 온도 50도가 넘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극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 중의 하나는, 지리산 세석산장에 물건을 배달하는 포터 역할이었다. 50kg의 무게가 나가는 짐을 지게로 지고, 높이 1500미터 산장까지 오르는 힘든 일이었다. 셀 수 없이 오르내렸던 지리산이지만, 너무 힘이 들어 마음속으로 백까지 셈을 하고 한 번씩 쉬곤 했다. 2시간이면 가는 거리가 무려 10시간 이상 걸렸던 것 같다. 일을 다 마치고 배가 고파 산장에서 파는 라면을 사서 먹으려 하니 시중에서보다 세 배가 더 비쌌다. 사 먹기를 포기하고 물로 배를 채우고 산에서 내려와 라면을 사 먹고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때 난생처음으로 돈의 가치를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일을 해 보아도 나 혼자 근근이 살아갈 정도 이상으로는 돈을 벌 수 없었다.

자식으로서 더 이상 부모님에게 불효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재수 종합학원 강사로 취직을 하였다. 부모님께 넉넉하게 생활자금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해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옛 동료 선생님에게도 후원금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돈은 어느 정도 벌 수 있었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의 보람은 찾기 어려웠다.

학원생들을 가르칠 때마다 하루빨리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복직 투쟁을 하는 가운데 경상남도교육청 교육감을 만나기 위해 교육청을 찾아갔을 때, 해직 선생님들 모두가 무단 주거 침입죄로 고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대부분의 선생님이 '폭력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의 죄목으로 백만 원의 벌금에 처해졌다. 이로 인해 수원에 살고 계시는 부모님 집으로 나를 찾기 위해 경찰들이 자주 들락거렸다. 그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식의 해직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한 화병으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생각에 고통 속에 한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꿈에도 그리던 아이들이 기다리는 교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만 4년 6개월의 모질고 힘든 세월이었다. 해직 교사로서의 삶이 모두 다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해직 기간의 시련은 내가 더욱더 강인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무엇보다도 복직하기 바로 전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 당시 가진 것 없던 나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내가 해직 교사이기 때문이라 했다. 전교조 해직으로 인해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잊을 수 없는 스승의 날 선물 

해직 기간의 원상회복 없이 신규 임용 형식으로 채용되어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입은 경제적 손실과 연금 불이익은 아직도 크나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진주 제일여고로의 복직은 불가능했고 남해 서면 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그 당시는 귀양 가는 느낌이었다. 섬마을 학생들은 천진난만했고, 어린 학생들과의 아름다운 어울림은 험난했던 시절이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스승의 날에 어느 학생이 신문지에 둘둘 말아 가져온 마늘 종대 선물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내가 받은 최상의 선물이었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학생들에게 올바르게 사는 삶의 자세에 대해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온갖 불의에 맞서 싸웠고, 소중한 양심을 지켜왔던 삶이었기에 학생들 앞에 당당했고 학생들에게 무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나를 믿어주고 따랐으며, 나에게서 영향을 받은 많은 제자들은 인간답게 바르게 사회생활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정년퇴임을 몇 개월 앞둔 해직 교사로서, 내가 살아온 인생을 회고해 볼 때 전교조 교사로 해직되고, 복직되어 전교조 조합원으로 살아온 나의 삶에 대해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복직 이후에 선생으로서의 삶에 몇몇 잊히지 않는 인상 깊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모 고등학교 일 학년 담임 시절 반 학생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다. 담배 피우는 학생 3명이 적발되어 나에게로 인계되었다. 말로 설득해서는 될 것 같지 않았고, 반에 담배 피우는 여러 학생에게도 본보기가 될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밖에 나가 대나무 회초리를 가져오라 했다. 모든 학생들이 긴장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담배 피운 학생들을 때리겠거니 하고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반대로 책상 위에 올라가 담배 피운 학생들에게 나를 때리라고 했다.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죄가 더 크니 나부터 먼저 매를 맞아야 된다고 설득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작 나를 때리지는 못하였다.

다시 내려와서 담배 피운 학생들을 책상 위에 오르게 했다. 학생들이 가져온 대나무 회초리 세 개를 한 데 모아 종아리를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몇 대를 맞지도 않아 비명소리를 내며 맞는 것을 참지 못하고 뛰어 내려왔다. 다시 학생에게 말을 하였다. "너희들이 맞은 것처럼 나를 때리지 않으면 계속 내가 너희들을 때리겠다"고.

나는 다시 책상 위에 올라갔고 대나무 회초리를 학생들에게 넘겨주었다. 학생들은 처음에 나를 때리지 못하다가, 때리지 못하면 다시 맞는다 말하니 어쩔 수 없이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내가 때린 것보다 엄청 약하게 때리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렇게 때릴 거면 너희들이 다시 맞아야 한다고 하니 그제야 나를 힘껏 때리기 시작했다. 한 학생 앞에 10대식 30대를 나는 끊임없이 맞고 있었다.

책상에서 내려왔을 때는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 학생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고통을 억지로 참으면서 간신히 걸어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종아리를 걷어보니 종아리 전체가 빨강, 보랏빛 피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는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준 최고의 교육 중에 하나일 거라고 지금도 자부하고 있다.
 
학급반 학생들과 1박2일의 지리산 산행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학급반 학생들과 1박2일의 지리산 산행에서 자연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 이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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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상 교육자로서의 아름다웠던 사제동행의 여러 사건 사고를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음이 아쉽긴 하다. 학교장 허락 없이 몰래 반 학생들 스무 명과 함께 한 1박 2일의 지리산 등반, 경상남도교육청 주관으로 열린 '두 바퀴로 달리는 국토 대행진'에서 지도교사로 학생들과 함께한 자전거 국토 종주, 반 학생들과 함께한 하프 마라톤, 10킬로미터 단축 마라톤 등등 많은 활동을 학생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 모두가 해직의 시련과 그로 인한 강인함과 인간다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주위에는 아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해직 교사 출신들이 있다. 민주화 운동 유공자 표창장 종이 한 장만 받은 것으로는, 이 분들이 쌓아 올린 공로를 대신하지 못한다.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현 대통령은 말하였다.

더는 늦기 전에 이제 그 말씀을 실천할 때가 된 것 같다. 해직 교사들 백 수십 분 이상이 유명을 달리했고, 현재도 병고로 신음하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시다는 말을 듣는다. 하루 빨리 명예 회복이 되고, 원상회복이 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전교조 해직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리고 전교조 조합원으로서의 지금까지의 삶은 무수히 많은 훌륭한 선생님들과의 만남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교사로서의 삶을 자부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나침반 역할을 하였다.

전국교직원 노동조합은 탄생 이래 지금까지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을 실현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전교조는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화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믿으면서 전교조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창원명지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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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전교조관련 해직교사로 학생들의 바람직한 교육과 사회의 건전한 민주화를 위해 애써왔고 현재 퇴임을 목전에 두고있으며, 온 국민이 찬란한 문화 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갇고 문화 생활을 마음껏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기여를 하고싶어 기자를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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