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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13일 경북 포항시 포스텍 내 노벨동산에 있는 박태준 명예회장의 동상을 찾아 헌화 후 고인을 추모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13일 경북 포항시 포스텍 내 노벨동산에 있는 박태준 명예회장의 동상을 찾아 헌화 후 고인을 추모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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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이 탈바꿈을 꾀하고 있다. 머리카락을 검게 염색했을 뿐 아니라 경제정책의 기조에까지 변화를 줬다. 지난 11월 2일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는 '성장 회복'을 강조했다. 분배보다 성장을 중시하는 보수세력을 의식한 포석이었다.

'국민이 반대하면 기본소득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천명했다. 국민이 반대하면 추진하지 않는 게 아니라 추진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당연한 이야기를 한 셈이지만, 기본소득에 대해 부정적인 유권자들을 끌어안기 위한 메시지였다.

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비판하고 조국 사태를 사과하는 한편, 박정희·전두환 정권 당시 경제의 일면을 보수층 기호와 충돌하지 않게 언급했다. 대구·경북 순회 마지막 날인 13일에는 박정희 경제정책을 최일선에서 구현한 박태준 전 포스코(포철) 명예회장의 10주기 추모식에도 참석했다. 머리카락뿐 아니라 머릿속도 약간은 염색한 게 아닌가 하는 행보들이다.

새 모습 만들기

1992년 대선 때는 김대중 민주당 후보의 변신이 주목을 끌었다. 이 변신은 그해 5월 26일 전당대회에서 이기택 후보를 60.2% 대 39.6%로 제치고 후보로 선출되기 전부터 본격화됐다. 이 변신은 흔히 '뉴DJ 플랜'으로 알려져 있지만, 김대중 캠프 내부의 정식 명칭은 따로 있었다. 6월 21일자 <한겨레> 5면에 따르면, '새 모습 만들기'가 진짜 이름이었다.

지금의 이재명 후보는 머리 염색으로 외모에 변화를 준 데 비해, 김대중 후보는 손수건으로 변화를 시도했다. 위 전당대회 당일 발행된 <동아일보> 2면 기사는 "최근 들어서는 투쟁가로서의 강성 이미지를 희석시키기 위해 양복 윗주머니에 포켓치프를 꼽고 다니는 등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새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구상은 다양하게 구현됐다. 청년들과 함께 연극 <신의 아그네스>도 관람하고, 학생들과 대화하는 모임도 가졌다. 또 만 68세 나이에 생애 최초의 얼굴 화장도 시작했다.

지금과 달리 남성의 화장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일까. 김대중 자신도 화장을 쑥스러워 했다. 5월 31일 자 <동아일보> '대선후보 이미지 관리 백태'에 따르면, 서울 동교동 자택 거실에서 사진기자들에게 "이젠 화장까지 해야 하고...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공을 들인 것은 보수층의 거부감을 누그러트리기 위해서였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빨갱이 운동'으로 낙인 찍혔던 시절, 그는 반독재 민주화 투사의 이미지가 강렬했다. 분명 훌륭한 이미지였지만, 보수층을 끌어당기기 위해 그 이미지를 벗고자 했던 것.

그는 '새 모습'을 통해 박정희·전두환 집권기에 탄압 받은 것에 대한 정치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고자 했다. 자신을 거부하고 비토하는 세력에 대해 '안심하라'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정권 교체로 생계에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하는 공무원들에게도 그런 메시지가 전달되길 희망했다.

후보수락 연설에서 거국내각 구성을 제일 크게 강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5월 27일자 <경향신문> '비토 계층 설득이 열쇠'는 "김 후보가 후보 수락의 일성(一聲)으로 '집권한다면 각계각층과 여야 정당이 참여하는 거국내각을 구성하겠다'고 말하고 정치보복 금지, 공무원 신분 보장, 균형적 지역 발전을 강조한 것은 거부감 불식을 위한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외형은 바꿨을지언정 알맹이는 단단히 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 구 군산역 광장에서 유종근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 시절 구 군산역 광장에서 유종근 후보 지지를 호소하는 김대중.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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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뉴DJ 플랜은 대체적으로 껍데기를 바꾸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김대중이 걸어온 노선을 바꾸거나 그간 했던 말들을 뒤집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국민들이나 보수층이 잘 몰랐던 김대중의 진짜 면목을 보여주는 데 최대 목적이 있었다. 머리만 염색하는 것이지 머릿속까지 염색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위 <한겨레> 기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은 지금까지 그에 대해 드리워져 있던 장막을 거둬내고 온건·개혁적인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껍데기만 바꿨을 뿐 알맹이는 바꾸지 않았다. 속은 오히려 더 단단히 했다. 이는 지역대결 구도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났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그의 노력은, 영남에 가서 영남 사람인 듯 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지역구도를 위협할 만한 새로운 구도를 띄우고자 노력했다. '비토 계층 설득이 열쇠' 기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중소기업과 노동자·농민·노인·여성 등 소외계층의 대변자로서 지지층을 개척해 나가려는 것이다. 이는 여권의 '호남 대 비호남 대결 전략' 구도를 타파하려는 측면과 현 정권의 실정을 부각시켜 기득권층과 소외계층의 이익대결 구도로 유도하려는 전략이 함축돼 있다. 실제로 민주당이 비호남권에서 표를 증가시키는 방법은 계층적 공략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역대결 구도로 가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구사한 것은 호남 색채를 덜어내는 게 아니라, '소외계층 대 기득권층의 구도'를 확산시키는 것이었다. 서민대중의 편에 서겠다는 정책적 기조를 더욱 강화하는 가운데, 화장을 하고 손수건을 꽂는 등의 외형적 변화를 가미했던 것이다. 뉴DJ 플랜은 그의 기본 노선에 상처를 주지 않았다.

김대중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는데도, 보수세력은 뉴DJ 플랜에 관심을 보였다. 이는 보수층이 이 플랜에 감복했기 때문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보다는 정치 상황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뉴DJ'는 성공했나

1992년 대선은 3당합당을 통한 보수대연합 뒤에 치러졌다. 화학적 결합이 결여된 이 대연합으로 인해 민주자유당(민자당) 내에서는 분열이 심각했다. 야당 출신인 김영삼을 중심으로 대선을 치르는 것에 대한 당내 반발이 대단했다. 게다가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까지 대선에 뛰어드는 바람에 보수층의 표가 분산됐다.

이 상황은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을 높여줬다. 이것이 뉴DJ 플랜에 대한 보수층의 관심을 유발하는 요인이 됐다. 위의 '비토 계층 설득이 열쇠'는 "김 후보에 대한 기대 상승은 정국 상황의 변화에서 기인된 측면이 크다"며 이렇게 분석했다.

"특히 민자당에서 김영삼 대표가 후보로 출마하고 이종찬 의원이 독자 출마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은 그의 대권 접근을 위한 최선의 구도를 제공해주고 있다. 게다가 국민당 정주영 대표의 등장은 이번 총선에서 증명됐듯 민자당의 기반을 잠식함으로써 김 후보에게 반사적 이익을 안겨줄 가장 큰 변수로 꼽히고 있다."

뉴DJ 플랜에 대한 관심이 김대중 자체에 대한 호감 때문이 아니라 보수세력 분열로 인한 반사효과라는 분석이다. 김대중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보수세력이 그를 함부로 비토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뉴DJ 플랜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는 것이다.

5년 뒤인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승리한 최대 요인도 김영삼·김종필의 분열이었다. '적장' 김종필이 김대중에게 가세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고, 김대중의 '새 모습 바꾸기'는 그만한 효과를 낳지 못했다.

1992년 대선 운동 당시, 뉴DJ 플랜으로 일부 보수층 유권자들이 김대중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선 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주지 못했다. 1987년에 27.04%로 3위였던 김대중의 득표율이 1992년 대선에서는 33.82%로 2위로 올랐지만, 이는 3당 합당에 분노한 김영삼 지지층 일부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선 것에 크게 기인하는 측면이 컸다.

대선 직후의 <한겨레>에서는 뉴DJ 플랜이 오히려 감표 요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왔다. 1992년 12월 22일자 <한겨레>는 "(김대중이) 반기득권층 내지 민주·민중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는 얻어내지 못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뉴DJ 플랜으로 요약되던 민주당의 유화 전략이 보수층과 반기득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의도했던 대로 모두 잡기보다는 거꾸로 둘 다 놓친 원인이 되었을 개연성을 높게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1987년 대선 때 민주진영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김영삼의 득표율 합계는 56.07%였다. 1992년 대선 때 민주진영의 지지를 받은 김대중의 득표율은 33.82%였다. 김대중의 득표율이 1987년의 27.04%보다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진영의 득표율은 1992년에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1992년 대선은 1987년 6월항쟁과 1988년 총선 참패로 위기에 몰린 보수세력이 3당 합당과 공안정국을 통해 반격을 시도하던 시기에 치러졌다. 진보에 대한 보수의 반격이 강할 때였던 것이다. 이런 시기에 민주당은 뉴DJ 플랜으로 양쪽을 둘 다 잡겠다는 전략을 세웠지만,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

지금의 이재명 후보는 1992년과 달라진 환경에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뉴DJ보다 '뉴이재명'의 변신이 훨씬 광폭이라는 점이다. 뉴이재명이 2022년 3월에 유권자들을 어떻게 움직일지 주목할 만하다.

태그:#이재명 변신, #기본소득, #조국사태 사과, #전두환 발언, #뉴DJ 플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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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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