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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조용한 희망>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의 원작 <조용한 희망>(원제 Maid:Hard work)(스테퍼니 랜드, 구계원 옮김, 문학동네)에는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싱글맘 스테퍼니 랜드가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다.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글쓰기를 통해 진짜 이름을 찾은 그녀의 이야기가.  
 
<조용한 희망>(원제 Maid:Hard work)(스테퍼니 랜드, 구계원 옮김)
 <조용한 희망>(원제 Maid:Hard work)(스테퍼니 랜드,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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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는 임신으로 엄마가 된 스테퍼니는 남자 친구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노숙인 쉼터에 자리를 잡고 딸아이를 돌보았다. 먹고살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일은 가사 도우미.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마땅한 이력이 없는 처지였기에 그녀에게 청소부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일자리'였다. 가사 도우미로 받는 최저 시급은 생계를 꾸리기에 턱없이 부족했고 스테파니는 정부의 온갖 지원금을 수급해 간신히 생활을 꾸려 나갔다. 

날마다 진통제로 버티며 열심히 일해도 삶은 늘 위태로웠다. 더구나 복지 카드로 식료품을 결제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 모멸감을 느껴야 했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되는 임시 거처의 열악한 환경은 딸아이를 호흡기 질환에 시달리게 했다.

빈곤한 삶에 대한 그녀의 생생한 증언은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사회'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녀에게 닥친 현실이 단순히 개인의 노력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그런데도 사회와 다수의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냉대와 무례의 시선을 보내며 본질을 보려 하지 않음을 생각하게 한다.  

스테퍼니는 오랜 시간 작가의 꿈을 품어왔다. 몬태나 주의 대학에서 문예 창작을 공부하겠다는 구체적 목표가 있었고 그래서 딸과의 생활을 블로그에 썼다. 어떤 비극과 혼란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글쓰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다음을 계획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도움받을 이가 없는 처지에도 스스로가 자신을 믿고 위로할 수 있었던 것도 글쓰기 덕분이었다. 아이와 보내는 평범한 일상을 글로 쓰면서 그 속에 깃든 기쁨을 발견했고 거기서 엄마로서의 무한한 사랑도 끌어낼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 대리석 세면대가 달린 욕실, 창문으로 바다가 내다보이는 서재를 갖춘 이층집에서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그 사람들에게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어두운 구석에 가려진 부분,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기계발서의 이면에 매료되었다. 어쩌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숨길 수 있는 보다 긴 복도와 더 큰 벽장을 가지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 271~272쪽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도 타인의 집과 부에 압도되지 않고 이면의 의미를 찾았던 스테퍼니. 그래서 보잘것없는 자신의 원룸 아파트조차 "미아와 내가 그곳에서 서로 사랑했기 때문에", "더없이 따뜻한 가정"(321쪽)이라고 긍정할 수 있었다. 글쓰기를 통해 집과 고향에 대한 자기만의 정의를 찾게 되면서 그녀는 작가라는 꿈을 향해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진정한 고향을 찾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내가 사는 곳을 사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집이란 언덕 위에 서 있는 근사한 저택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집은 우리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곳, 소속감 그리고 익숙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 402쪽

스테퍼니 랜드가 가난과 싱글맘이라는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40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에 빼곡하게 들어 있다. 뛰어난 묘사는 지루할 틈을 주지 않고 여러 주제를 오가며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그녀는 '싱글맘의 분투기'로 그칠 수 있는 서사를 빈곤과 계층이라는 사회 문제로,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삶과 사람, 관계를 성찰하는 글로 확장시켰다. 자신의 부모와 딸과의 관계를 통해 가족과 사랑의 의미까지 되새겨 보게 해주는 이 글은 다양한 층위에서 읽히는 르포르타주 같다. 

접시닦이에서부터 떠돌이까지, 밑바닥 인생을 직접 체험하여 수기(<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를 남긴 조지 오웰은 빈곤한 삶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고 그로 인해 판에 박힌 생활에 사로잡히게 한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가난은 미래를 말살해버린다고. 그런데 스테파니는 어떻게 가난이라는 단단한 틀을 깰 수 있었을까.

친구들은 스테퍼니에게 "네가 도대체 어떻게 그걸 다 해내는지 모르겠어"(302쪽)라며 혀를 둘렀다. 가사 도우미에 어린 딸을 보살피고 장을 보고 집을 손보고… 그녀의 삶에 해결해야 할 일의 목록은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커다란 집을 청소하기 위해 당장 앞에 놓인 방부터 차근차근 청소해 나가듯 현실의 문제도 단계적으로 해결해갔다. 그러면서도 "10년 뒤의 내가 더 나은 모습일 거라는 믿음"(274쪽)을 놓지 않았다. 성실하게 오늘을 지키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키우고, 그 믿음으로 내일을 꿈꿨다.

당장 생계에 대한 불안을 떨칠 수 없으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대학 진학이라는 도전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시간에 맞서 무언가를 방어하고, 그 과정에서 아주 천천히 여기 이곳으로부터 멀어지는 작업"(125쪽, <멀고도 가까운>)이라고 리베카 솔닛은 말했다. 스테퍼니는 글쓰기를 통해 가난의 시간에 맞서 자신에 대한 믿음과 딸에 대한 사랑을 지켰다. 

가난과 힘겨운 육아, 혼자라는 외로움에 맞서기 위해 스테퍼니가 글쓰기에 기대었던 것처럼 나도 삶의 중심을 잃고 싶지 않아 매일 아침 글을 쓴다. 끝없는 집안일과 육아로 나를 잃지 않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글쓰기에 기댄다.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쌓아가고 있다. 모르는 사이 내 삶에도 희망의 궤적이 그려지고 있을까. 오늘의 삶과 다가가고 싶은 삶 사이를 글로 바느질한다. 한 땀 한 땀, 바느질이 모여 이야기가 되고 삶이 되는 날을 꿈꾸며.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조용한 희망 - 진짜 이름을 찾기 위한 찬란한 생존의 기록

스테퍼니 랜드 (지은이), 구계원 (옮긴이), 문학동네(2020)


태그:#조용한희망, #글쓰기가그려낸희망, #스테퍼니랜드, #가난을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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