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놀멍쉬멍 바닷가를 걷다

12월 9일 제주살이 5일째다. 그다지 무리한 것 같지 않은데, 오늘은 움직이고 싶지 않아 올레 16코스 구간의 바닷가를 아주 천천히 걸었다. 오가는 사람이 뜸해 한적한 길을 바람과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걸으니 내가 온전히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하는 느낌이다. 겨울답지 않게 날씨는 포근하고 바닷바람은 그지없이 신선해 출발할 때와는 달리 발걸음이 가볍다.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 바윗돌에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갈매기 가족들, 모든 것이 평화롭다.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해국, 바위를 감고 있는 순비기나무의 줄기까지도… 그러한 평화 속에 많지 않은 올레꾼들이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앉아 있거나 경관 좋은 곳에서 인증샷을 찍는 모습도 보기 좋다.

원래 인간은 이러한 모습으로 자연에서 와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일진대, 문명과 이기와 욕심이 인간들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우리가 몸담은 지구까지 망가뜨리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게 더 안타깝다. 우리 인류는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멸망을 자초하고 말 것인가.
 
올레 16코스에서 만난 목마가 '난 말이야 널 사랑한단 말이야' 라며 나그네를 유혹한다.
▲ 올레길에서 만난 목마 올레 16코스에서 만난 목마가 "난 말이야 널 사랑한단 말이야" 라며 나그네를 유혹한다.
ⓒ 임경욱

관련사진보기

 
얼마간 가다가 발길을 돌려 갔던 길을 되짚어 오는데, 갈 때는 보지 못했던 언덕 위의 예쁜 카페가 '난 말이야 널 사랑한단 말이야'라며 '쉬영갑서예' 우리에게 쉬어가라고 손짓을 한다. 다리도 풀고 목도 축일 겸 안으로 들어서니 식물원 같은 실내에 나그네를 편히 쉬게 할 테이블과 의자가 기다리고 있다. 바다가 보이는 창가 쪽 소파에는 이미 MZ세대들이 진을 치고 있어 한쪽에서 목만 축이고 나왔다.

유배지에서 피운 꽃

추사는 1840년 그가 55세가 되던 때 윤상도 옥사 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추사는 8년 3개월간 제주 체류를 통해 제주에 실학을 전하고, 제주도 교육의 질적 변화와 학풍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제주 유배 기간 '추사체'를 완성하고 '완당집'을 편집하는 등 인생 후반기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세한도'라는 명작을 후세에 전했다.

제주살이 6일째에는 서귀포 대정에 있는 추사관을 찾아갔다. 추사관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5월 건립되었다. 추사기념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 날은 내부 수리로 임시휴관 중이었다.
 
서귀포 대정읍 추사관 옆 정원에 세워진 추사 김정희 선생 입상이다.
▲ 추사 김정희 선생 입상 서귀포 대정읍 추사관 옆 정원에 세워진 추사 김정희 선생 입상이다.
ⓒ 임경욱

관련사진보기

   
추사관 뒤쪽에 그가 기거했던 초가집이 원형으로 복원되어 있어서 둘러봤다. 고증으로 정비된 곳이라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문간이나 세간이 낯설다. 돌담 밑에는 초겨울의 수선이 수줍게 꽃을 피우고 있다. 위리안치(圍籬安置)의 유배 중에 탱자나무 울 밑에 피었을 꽃이리라. 추사 선생이 유난히 좋아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의 입상이 세워진 정원이 그의 유배 생활만큼이나 휑하고 고적하다.

비운의 화가 이중섭을 만나다

오후에는 서귀포 시내에 있는 이중섭미술관에 들렀다. 이중섭 거리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중섭이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1년여를 머물렀던 초가집이 있고, 서귀포극장과 정방동주민센터 사이 섶섬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중섭미술관이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에선 '이건희 컬렉션, 이중섭 특별전-70년 만의 서귀포 귀향'전이 열리고 있어서 관람객이 다소 붐빈다. 사전에 예약해야 관람이 가능하다. 고 이건희 회장과 그의 가족들이 소장했던 '섶섬이 보이는 풍경(1950년), 물고기와 노는 아이(1951년), 아이들과 끈(1955년), 해변의 가족(1953~1955년), 현해탄(1954년)'등 이중섭의 원화 12점과 만날 수 있었던 뜻하지 않은 행운의 시간이었다.

이중섭은 일제와 6․25전쟁의 암울한 시대, 아픔과 굴곡 많은 생애의 울분을 '소'라는 모티프를 통해 분출해냈다. 대담하고 거친 선묘를 특징으로 하면서도 해학과 천진무구한 소년의 정감이 작품 속에 녹아 있다. 그가 추구했던 작품의 소재는 소·닭·아이들·가족 등이 가장 많다.

그는 시대의 아픔과 개인의 고독, 그리고 절망을 그림으로 해소하려는 듯 격렬한 터치로 소를 그렸고, 가족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으로 도원과 같은 환상적인 이상세계를 화폭에 담았다. 소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갈등과 고통, 절망, 분노를 표현하고, 때로는 희망과 의지, 힘을 상징한다. 또한 소와 아이가 어울려 노는 장면을 통해 특유의 해학적인 웃음과 인간적인 정감을 드러내 주고 있다.
 
섶섬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중섭이 살던 초옥이 잘 보존되어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다.
▲ 이중섭이 살던 초옥 섶섬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중섭이 살던 초옥이 잘 보존되어 관광객의 발길을 잡는다.
ⓒ 임경욱

관련사진보기

 
이중섭의 삶은 예술이고, 예술이 곧 그의 삶 전체와 동일시된다. 그는 화가이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구원자였기에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절실했기에 삶 전체가 오롯이 화폭 안에 스며들어 있다. 이처럼 평탄치 않았던 생애로 인해 그는 '비운의 화가'로 전설처럼 기억되고 있다.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1년여밖에 거주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살던 허름한 초옥을 잘 보존하고 그곳에 미술관까지 건립한 걸 보면 이곳 서귀포 사람들이 그를 얼마나 아끼고 기렸는지, 그들의 높은 문화 의식에 감명받았다.

이런 시민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삼성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던 그의 유작들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와 함께 공유하며, 코로나19라는 엄혹한 시기에 문화와 예술을 함께 향유하는 행복을 누리지 않는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생은 물처럼 바람처럼 시(詩)처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