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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원상회복추진위원회 소속 교사들이 본인이 해직 당시 겪었던 국가 폭력 행위의 구체적 실상에 대해 <오마이뉴스>에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1981년 졸업과 동시에 서울 강남중학교 사회과교사로 신규발령이 나서 2학년 담임을 맡으며 근무하다 6월 하순 상무대에 입교하였다. 육군 학사장교 1기로 39개월 간 군복무를 마치고 1984년 9월 말 전역하여, 서울 강남중학교로 복직했다. 암투병중인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부모님이 계신 고향 여수로 도간 교류 내신을 내서 이듬해 1985년 3월 여수고로 부임하였다. 어머니의 쾌유와 전도를 위해 새벽기도에 나가고 매일 성경을 묵상하는 등 신앙생활에 집중하였으며, 1986년 4월 아내와 결혼하였다. 여수에도 교사협의회가 있음을 알고 1989년 봄에 전교협 여수지회에 우편으로 가입회비와 편지를 동봉해 보내서 가입하였고,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출범에 따라 조합원이 되어 해직 폭풍을 온몸으로 맞게 되었다.

교무실 벽에 대자보를 붙인 이유 

내가 가르치는 사회교과서는 1종(국정)도서로서 유신정권과 12.12 군사쿠테타를 미화하고 광주민주항쟁을 폄하하는 내용으로 기술돼 있어서 이를 가르치기가 교육자적 양심에 걸렸다. 당시 유일한 교원단체인 대한교련(현 한교총)은 군사정권에 복종하면서 '돗자리 사건'과 같이 고급 돗자리를 뇌물로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주는 등 교원들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하는 어용단체에 불과하였다. 광주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에 희생된 선후배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이 부끄러움으로 작용하여, 교원의 자주성과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위해 해직을 각오하고 전교조를 수호하리라 결심하였다. 여수고 교무실 벽에 대자보를 부착하여 동료교사들의 지지와 전교조의 필요성을 호소하였다.

첫 번째 대자보는 '뜻있는 시민들이 부동산 문제 등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실련을 결성하였는데 우리는 교사로서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마땅히 힘 있는 단체를 만들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단체 중에서 이왕이면 가장 결속력이 크고 타 선진국에서도 보장하는 노동조합 형태가 돼야 하지 않는가?' 라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정치적 중립이란 기계적으로 정치의 중간지대를 유지하는 것이나 정치를 탈색하는 것이 아니고 올바른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를 모르면 정치적 중립이란 말로 권력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침묵을 강요받게 된다. 정치를 잘 알아야 인간존엄을 지키고 정의를 추구할 수 있으며, 나아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남교육청 징계위에 참석하여 나의 소신을 정정당당히 밝히려했으나 졸속으로 진행되는 징계 자체를 보이콧하라는 집행부 결정에 따라 징계위에 참석하지 못하고 1989년 8월 16일자로 해임되었다. 공립인 여수고에서는 분회장인 김종린(윤리과)과 조함용(국어과)과 함께 해직교사가 되었다. 이후 서울에서 진행된 행정소청위원회에 참석하여 정권의 나팔수가 아닌 올바른 정치적 중립과 교육계 부조리를 축출하겠다는 나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1989년 5월부터 불어온 해직폭풍은 매우 거셌다.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말로 남편을 설득하라는 항간의 압력을 일축하면서 피아노 교습을 하던 아내는 '당신 뜻대로 하라'며 나를 신뢰해줬다. '우리 아들은 절대 빨갱이가 아니야!' 란 당연한 믿음으로 자신의 몸 가누기도 힘들었던 어머니는 나를 믿어줬다. 아버지도 형들도 나의 소신과 고집에 두 손 들었다. 다니던 교회에서도 처음엔 걱정을 했지만 집사이며 중고등부 교사이자 성가대원인 나를 인정하고 격려해줬다. 사실 나는 유물론을 반대하는 크리스천으로서 당시 정부가 전교조 교사에게 낙인을 씌우려하는 좌경용공 혹은 친북성향 교사라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말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현상처럼 명예훼손죄로 국가폭력을 걸어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이후 전국대의원 자격으로 인천의 한 교회와 서울의 단국대와 홍익대 등에서 개최된 전국대의원회의에 참석하여 발언하기도 하였다.

어머니께 효도하려고 서울서 내려 온 나였지만 집에서 실업자로서 지내는 것은 또 다른 불효였다. 남들 다 출근한 조용한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전교조 관련 시사 잡지나 신문들을 구독하면서 나름 복직 해결책을 모색해보다가, '나는 왜 전교조에 가입했는가?' 라는 편지를 썼다. 교사도 노동자라는 생각과 왜 실정법 위반이라 하는가? 전교조는 과연 좌경용공 집단인가? 라는 논란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진솔하게 적은 편지를 여러 통 복사하여 아는 사람들과 모교 교수님과 선배들에게 보내 나의 소신을 알리고 전교조 지지를 부탁하였다. 돈이 필요했으므로, 해직 된 해 연말과 이듬해 초 신문 광고에 나오는 학원 강사 모집공고를 오려서 응모했다. 서울 학원가에 강사 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었다. 대입 재수학원 종합반에서 사회와 윤리과 강사를 하면서 해직기간 생계를 꾸려나갔다.

1994년 3월 복직하였는데 다시 신규발령 형태로 고흥군 포두북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해직기간에 대한 일체의 보상이 없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겨 기꺼이 복직하였다. 어떤 언론에서는 해직교사들이 개선장군처럼 들어가 교육현장을 황폐화시킬 것이라는 논조의 글을 싣기도 했지만 교육현장에서 그런 우려는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아는 대다수 복직교사들은 조용하고 평범하며 전혀 투쟁적이지 않았다. 다만 올곧은 마음 같은 고집스러움은 있을지언정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학생들을 아끼고 존중하는 착한 교사들이었다. 주도적인 활동가나 운동가는 아닐지라도 평범한 이들 교사의 삶을 통해 전교조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고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본다. 분회활동을 통해 학교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부조리와 교장의 권위주의적인 학교운영에 대해 견제를 하기도 했지만 좋은 시책에 대해서는 교장과 협조도 많이 하였다. 특히 가좌중과 삼산고에서는 분회 창립 겸 분회장을, 선인고에서는 분회장을 역임하였고, 연수고와 해송고에서는 분회원으로 활약하였다.

시민공공성, 그리고 사회에 대한 기여 

우리 교육의 방향을 잡는데 일조하기 위해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교육파견 제도가 있어서 1995년 3월 교원대 대학원 사회과교육학과에 진학하여 정치철학과 시민교육에 집중하여 2년간 공부하고 '의사결정 정당화기준으로서 상식'이란 석사논문을 완성하였다. 개인이나 집단 간 서로 다른 의사결정에 따른 갈등해결을 위해 우리 모두의 공유 가치인 상식에 정당화 기준을 둠으로써 갈등을 통합하고자 한 시도이다. 이는 내가 추구해오던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대한 일종의 대안인 셈이다. 곧바로 1997년 3월 모교인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평소 존경했으며 사회참여 철학과 노선이 나와 비슷한, 손봉호 교수 지도 아래 박사과정 공부를 하였다.

1주에 한 번씩 연가를 내어 2년간 고흥에서 야간열차나 심야버스를 타고 오가며 힘들게 공부했다. 1999년 3월 인천으로 도간교류를 통해 가좌중학교에 부임하였다. 1년간 더 학점을 따서 3년 만에 교육과정을 마치고 논문준비에 들어갔지만 주경야독의 어려움이 맘만치 않았다. 입학 10년만인 2007년 2월에야 손봉호 교수 후임인 정원규 교수 지도 아래 손봉호, 황경식, 허영식, 박성혁 교수의 심의를 받아 박사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석사논문을 심화시킨 '시민적 자질로서의 공공성 개념에 대한 연구'로서, 낯선 시민들 간 공존 개념인 공공성 개념을 분석하였다. 존재론적으로는 개인이 사회보다 우선하지만 이익이란 관점에서는 공익이 개인 이익보다 먼저라는 것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낮은 단계의 도덕성 개념이 시민적 자질로서의 공공성 개념이다. 이의 토대는 상식(common sense)인데. 상식에는 이성적 측면과 감정적 측면이 있고, 전자에서는 이성적 추론의 토대로서의 보편적인 제일원리(the first principle)를 제시했으며, 후자에서는 주관적이자 보편적인 감정으로서 공통감(sensus communis)을 제시한 논문이었다.

전교조 결성을 통한 교육민주화운동 참여와 희생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불이익에 대한 회복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0년대 초반 민주화유공자로 인정을 받았고, 민주화 유공자는 "그 이유로 어떠한 차별대우 및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고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5조 6항)'에 규정이 있는 바, 해직기간 불이익에 대한 우리의 요구는 정당하며 조속히 시정되어야 한다. 급속하고 압축화된 산업화와 민주화로 우리나라는 최빈국에서 10대 경제대국과 선진 민주국가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많은 아픔과 상처와 한(恨)으로 찌들어 있다. 상처와 갈등을 해결하여 내적인 충실을 기하는 것이야 말로 바람직한 미래에의 첫걸음이다.

 남은 삶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고 싶다. 시민공공성에 대한 논문 발표, 저술 활동, 유튜버 활동 등으로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 인생의 고달픔과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 묻고 싶다. 거기서 나온 조그만 의미와 해석을 정리하여, 공유하고 나눔으로써 인생의 짐을 서로 나누고 싶다. 중대한 격변기에 처해 있는 우리나라가 방향을 잘 잡고 제대로 나아가도록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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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전남, 인천에서 중고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함. 전남 여수고 재직중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되었다가 4년 6개월 후 고흥포두북중학교로 복직함. 상식이 통하는 사회와 평범과 일상의 소중함에 관심을 가짐. 특히 시민적 자질로서 공공성(publicness as citizenship) 개념에 대해 다년간 연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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