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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일본동부협의회와 동경민주연합이 주최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에 참석한 시민들.
 지난 1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일본동부협의회와 동경민주연합이 주최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에 참석한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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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움직여!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안돼!"

아내는 아침부터 시계를 열두번도 더 보면서 애들을 깨우고, 나를 재촉했다. 9시부터 예정돼 있던 산행을 하기 위해서다. 처음엔 나만 가려고 했다. 주제가 거창했기 때문이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일본동부협의회(김상열 회장)와 동경민주연합(김달범 대표)이 지난 11일 주최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이었다. 

일본 국적의 아내가 이런 정치적 주제의 산행에 동참하리라곤 생각치 않았다. 그런데 아내는 산행 이야기를 듣자마자 자신을 물론 "아이들도 다 같이 가자"고 말한다. 다카오 산은 해발 599미터다. 별 거 아닌 높이같지만 경사가 꽤 가파르다. 아이들 셋(중2, 초6, 초2)를 챙기면서 오르기엔 신경써야 할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아내가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아이들도 다들 좋다고 한다. 큰 아이(고1)조차 "왜 토요일에 수업이 있어가지고!"라며 동참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 했다. 

물론 아내는 지난 10여 년간 도쿄에서 매년 꾸준히 개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추도식에 몇 번 참가하기도 했지만 내가 부탁해서 그런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아이들은 여전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누군지 모른다. 행사장 분위기가 신기했다는 감상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번 아내의 적극적인 산행 의지는 놀라웠고,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는 "북한과 한국이 사이가 좋아지면 좋지. <사랑의 불시착>처럼"이라고 말한다. 얼마 전 기시다 총리가 북한을 염두에 둔 '적기지공격론'을 언급했는데 일본 정치권 분위기와 대중의 느낌은 이렇게나 괴리가 있다. 여러모로 <사랑의 불시착>은 위대한 드라마가 아닌가 싶다.

힐끔힐끔 쳐다보다 다가온 일본인들
 
지난 11일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에 참가한 시민들.
 지난 11일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에 참가한 시민들.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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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시간에 맞춰 겨우겨우 도착했다. 이미 40여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모여있다. 등산 전에 단체사진을 찍었다. 한글로 쓴 플래카드 두 종류를 번갈아 내걸고 40명 이상이 사진을 찍으니 다른 등반객들이 힐끔힐끔 쳐다 본다. 

나중에 아내가 아이들용 케이블카 표를 사려고 먼저 빠졌는데 그때 다른 일본인 등반객 아주머니들이 "저게 뭐냐?"라며 물어왔다고 한다. 아내는 "저도 잘 모르긴 한데, 한국과 북한이 전쟁 이제 관두자는 선언을 하려 하는데, 그걸 지지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단체로 등산하는 거래요"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들이 "오! 그거 매우 좋네요"라고 화답을 해 아내도 기분이 꽤 좋았다고 한다.

실제로 정상에 만났던 다른 일본인 등산객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다카오 산은 취식이 가능한 나무 테이블을 늘어놓은 공간이 있다. 거기에 한국어 종전선언 지지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옹기종기 모여 식사를 하고 있으니 다른 테이블에 있던 등산객들이 계속 쳐다본다. 방해해서 죄송하다고 먼저 말을 건네니 괜찮다면서 "근데 이거 무슨 모임?"이냐고 물어온다. 상황을 설명하자 그들도 "정말 좋은 산행"이라며 "한국, 북한뿐만 아니라 일본 포함해서 다들 사이좋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일본에서 살다보면 한국사람들은 나에게 우경화 일변도로 흐르는 일본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걱정을 한다.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 보듯 보통의 일본 사람들은, 물론 스테디셀러로 정착된 <사랑의 불시착>(여전히 일본 넷플릭스 톱10 순위권) 등 한국 드라마의 영향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한일 간의 우애를 바란다.

실제로 종전선언을 지지하는 이러한 움직임이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우애에 악영향을 미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민주평통 일본동부협의회 김상열 회장은 "현재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는 논의는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반대할 명분이 사실상 없다"고 강조한다. 

네 시간에 걸친, 힘들지만 보람찬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에게 어땠냐고 물었다. 아이들은 거창한 테마의 산행보다 "새 동생을 만나서 즐거웠고 담에 또 만나기로 했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내 또래의 한국인 아빠가 아이 둘과 함께 이번 산행에 참여했는데 알고보니 그 쪽 집이 우리 집 근처였고, 그도 아내가 일본인이었다. 결정적으로 우리 집처럼 자녀가 넷이고, 나이 분포도 비슷했다. 아이들 입장에선 이번 등산을 통해 비슷한 상황과 느낌의 새로운 친구를 만난 것이 최고의 수확이었던 것이다. 

산에서 만나면 금세 속내를 털어놓고 친해진다는 속설은 만국공통인가 보다. 한반도 종전선언, 평화선언의 남북 정상들이 흉금을 터놓고 금강산 등산이라도 한번 해 보면 어떨까 싶다. 다음 날 찾아올 근육통 정도야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다.
 
지난 1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일본동부협의회와 동경민주연합이 주최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에 참가한 시민들.
 지난 1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일본동부협의회와 동경민주연합이 주최한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실현과 종전선언 지지’를 위한 단체산행에 참가한 시민들.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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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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