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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지난 12일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로부터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불가 판정을 내린 통지문을 각각 받았다.

통지문엔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가 전봉준과 최시형에 대해 "활동내용의 독립운동 성격 불분명"이라고 판정한 포상 불가 사유를 기재해놨다. 아울러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한 교수, 전문연구자 등으로 구성된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독립운동 당시의 공적확인 자료에 근거해 심사 대상자의 공적내용, 기여도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독립유공자 공적심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자는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 공적심사위원들이 내린 전봉준과 최시형에 대한 독립유공자 서훈 불가 판정이 아래와 같은 이유로 부당하다고 판단해 논박하고자 한다.

서훈 불가 판정이 부당한 이유

첫째, 공적심사위원들이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도외시하고 주관적·독단적·자의적으로 서훈을 반대하고 있다고 본다. 1998년 이래 지금까지 한국독립운동사 개설서 역할을 해온 책 <한국독립운동사 강의>는 한국의 독립운동이 1894년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돼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전개됐다고 서술했다. 이 내용은 대학 등 강단에서 널리 인용된 내용이다. 

"한국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한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다. 일제 침략이 가시화되던 1894년 의병전쟁의 태동과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는 독립운동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장석흥, '제2장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8, 57쪽.; 장석흥, 같은 글, <한국독립운동사 강의>(개정판),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울, 2007, 58쪽.)

즉 1894년 갑오의병과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에서 한국 독립운동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장석흥 교수는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독립운동사'를 강의해왔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표지.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8.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표지.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8.
ⓒ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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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한국독립운동사 강의>에서는 2차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이 봉기해 이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고 기술했다.

"독립운동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부터 1945년 해방을 맞기까지 한순간도 단절됨 없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갑오변란'과 1895년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동학농민군과 의병들이 봉기하였고,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한시준, '총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연구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8, 17쪽.; 한시준, 같은 글, <한국독립운동사 강의>(개정판),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울, 2007, 15쪽.)

한시준 교수는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독립운동사를 강의했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하였으며, 지금은 독립기념관 관장을 맡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강의>(개정판),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울, 2007.
 <한국독립운동사 강의>(개정판), 한국근현대사학회, 한울, 2007.
ⓒ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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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2020)에서도 1894년의 갑오의병과 2차 동학농민전쟁을 반제 독립운동으로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동학농민전쟁은 일제 침략을 맞아 반제 민족운동으로 전이되어 갔으며, 의병전쟁과 함께 3·1운동의 원류로 작용했다."(장석흥, '총설: 자유와 독립 그리고 평화',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 2020, 22쪽.)

"1894년 갑오왜란에 분노해 안동에서 봉기한 서상철 의병은 항일투쟁의 시초였다.(중략) 1894년 시작된 항일투쟁은 1945년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51년간 전개되었다."(박걸순, '3강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 2020, 71쪽.)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 2020.
 <새롭게 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 2020.
ⓒ 한울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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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수많은 학술 논문과 저서에서 2차 동학농민혁명을 항일투쟁 즉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있다'라고 논증했다. 연구 사례 둘만 예로 들겠다.

서울대 국사학과 한우근(1915~1999) 교수는 "동학농민군의 1차 봉기는 반봉건투쟁, 2차 봉기는 항일전쟁"이라고 1984년에 논증했다. 그는 "제2차 봉기는 순전히 국권을 유린하는 일본군에 대한 구국투쟁으로 나타났다"(한우근, '동학농민군의 제1차봉기', '동학농민군의 제2차봉기', '역사적 의의', <한국사>17(동학농민봉기와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1984, 203쪽)라고 서술했고 "동학군의 제2차 봉기는 국토와 국민과 국권을 유린하는 일본군에 대한 민족적 항쟁이었다. 외국의 침략에 대한 항거의식은 이제 농민들의 반봉건 투쟁에서 항일 구국 투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한우근, 위의 책, 210쪽)라고 논증했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의 태두인 국민대 국사학과 조동걸(1932∼2017) 교수는 1978년에 "동학혁명의 후기 운동에 이르면 그 자체가 항일 독립운동이었다"(조동걸, '농민편', <독립운동사>제10권(대중투쟁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8, 255쪽)라고 논증했다.

계속해서 그는 1980년 <의병들의 항쟁>이라는 저서에서 "동학혁명운동은 처음에 당시의 봉건체제에 대한 혁명운동으로 전개됐으나 이후에는 일본군의 파병에 따라 혁명전쟁으로 확대돼 반제국주의운동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동학혁명운동이 독립운동으로서의 성격이 있으며 아울러 독립운동의 기점으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조동걸, <의병들의 항쟁>(민족운동총서편찬위원회), 민족문화협회, 1980, 50쪽)라고 밝혔다.

셋째, 공적심사위원들의 역사 인식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인식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독립운동가 김승학(1881∼1964, 1962년 독립장 수여받음)이 자신의 저서인 <한국독립사>(1965)에 독립운동에 분투한 의열사를 서술했는데, '의열사 및 독립운동자 략전'에 최익현·홍범도 등 3207명을 기술하면서 '전봉준'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썼다.

"전봉준: (일명 명숙) 별명은 녹두, 태인인으로 일찍 동학에 참가하여 고부군의 접주가 되었더니(중략) 부하 수백인으로 더불어 순창 남원 등지에서 재거를 모의하여 자못 성세하더니 11월에 공주에서 전패(戰敗) 체포되어 4228년 5월에 경성에서 사형되니 당년 42세였다."(김승학 편저,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716쪽.)

이처럼 김승학은 최익현·홍범도 등과 똑같이 '전봉준'을 독립운동에 분투한 인사로 인식하여 서술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김민산(金民山, 1912∼?, 원명 김교삼, 이명 양민산, 김대륙, 양진곤)도 일제강점기에 이미 전봉준 장군을 반일무장투쟁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았다. 김민산은 독립운동가 김정묵(金正默, 1888∼1944, 1991년 애국장 추서)의 아들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 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 조선의용대 제3지대 정치지도원, 화북조선독립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항일투사였다(김영범, '민산 김교삼의 민족운동과 광복 후 정치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105, 2020. 참조).

김민산은 1939년 '조선혁명 군사운동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에서, 조선혁명 군사운동의 시작을 의병운동에서 찾았다. 그는 반일무장투쟁인 의병운동의 업적을 소개했는데, 특히 반일무장투쟁의 주요 지도자와 그 업적을 서술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최익현, 민긍호, 이은찬, 지홍윤, 김수민, 이진룡, 채응언, 홍범도를 기술했는데, 전봉준도 서술했다. 전봉준 장군을 반일무장투쟁의 주요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포함시킨 점은 이채를 띠었다. 그는 전봉준의 업적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전봉준 : 천도교 교주 최수운의 측근 제자이면서 갑오 동학당 대혁명의 최고지도자였다. 국망 전후에 왜적 토벌을 창의하니 농민 자제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몇 달 만에 수만 명이 되어서 기세를 떨쳤다. 삼남(경상·전라·충청 3도 지방)에서 활약하며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민산, '조선혁명 군사운동의 회고와 전망', <조선의용대통신>제12기, 1939, 5, 11, 3쪽.; 권대웅 외, <해산 김정묵과 가문의 독립운동>, 선인, 2021, 270쪽.)
 
<조선의용대통신>제12기, 1939, 5, 11, 3쪽.
▲ 민산, ?조선혁명 군사운동의 회고와 전망? <조선의용대통신>제12기, 1939, 5, 11, 3쪽.
ⓒ 장세윤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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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김민산은 전봉준이 왜적(일본군) 토벌을 기치로 창의해 삼남지방에서 왜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동학 대혁명의 최고지도자였다고 기술했다. 김민산이 언급한 최익현(1962년 대한민국장), 민긍호(1962년 대통령장), 이은찬(1962년 대통령장), 지홍윤(1991년 애국장), 김수민(1962년 독립장), 이진룡(1962년 독립장), 채응언(1962년 독립장), 홍범도(1962년 대통령장, 2021년 대한민국장)는 진즉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유독 지금까지 전봉준만 서훈이 이뤄지지 않았다. 

모순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 (1895년 2월 27일)
 전봉준 장군이 일본영사관에서 심문을 받은 뒤에 찍은 마지막 모습 (1895년 2월 27일)
ⓒ 양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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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역사학자는 모순을 해결해줘야 한다. 필자는 이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독립유공자 서훈 제1공적심사위원회에 '동학혁명분과'를 만들어 이 문제를 논의하면 된다. 현재의 공적심사위원회의 인적구성으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 심사를 다루는 것은 불공정하다. 이해가 충돌하고 있는 제1공적심사위원회 1분과(의병분과)가 서훈 심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은 불공정하게 심사를 해서는 안 된다.

의병분과(1분과)에서 의병 전공 심사위원들이 을미의병(1895) 참여자를 심사해서 120명을 서훈했듯이, 제1공적심사위원회에 '동학혁명분과'를 만들어서 동학농민혁명 전공 심사위원들이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심사해서 서훈 여부를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제1공적심사위원회에 분과 하나를 더 만들면 된다. 이것이 공평한 것이다.

또 하나의 해결 방안은 동학농민혁명 전공자, 1심과 2심의 공적 심사위원이 모두 함께 참여하는 '연석회의'를 개최해 이 서훈문제를 만장일치로 처리하는 방법도 있다. 1962년부터 2021년 현재까지 "독립운동의 기점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내규(1962년 공적심사위원회가 결정함)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전공자는 공적 심사위원에 단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 교수가 전국에 20여 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모순이 아닌가. 동학농민혁명 전공 역사학자, 교수를 심사위원으로 참여시키지 않고,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서훈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심사라고 할 수 있는가? 동학농민혁명 전공자가 공적심사위원회에서 배제되니,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서훈이 될 수 없었다. 1962년 내규는 한국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에 의해 사망 선고를 받았다.

필자는 독립운동사 전공 역사학자로서,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서훈국민연대 상임대표로서, 전봉준과 최시형의 독립유공 서훈에 대해 국가보훈처 공훈발굴과에 재심을 신청하고자 한다.

국가보훈처와 독립유공자 서훈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위원들은 연석회의를 열어 을미의병 서훈을 회수하던지, 전봉준·최시형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서훈하던지 양단간에 결단해야 한다고 본다. 국가보훈처와 공적심사위원회는 연석회의를 열어 모순을 해결해야 할 책무가 있다. 연석회의에서 합의해서, 이 서훈 문제를 마무리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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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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