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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GDP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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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이전의 주류경제학은 '성장'이 아니라 '균형'을 말했다

경제학과 경제 정책에서 "성장"이 핵심적인 열쇳말이 된 것은 20세기 후반의 일이다. 19세기 아니, 1920년대까지만 해도 고전파와 신고전파를 잇는 주류 경제학의 핵심적 관심사는 "균형"에 있었다. 무질서하고 폭력적으로 보이는 시장 경제라는 것에 분명코 개인과 집단 모두의 만족과 행복을 달성해주는 내재적인 질서가 존재한다는 "경제학 원리"를 밝히는 것이 주된 관심사였다.

여기에서 전체적인 부의 (어떻게 정의하든) 증가와 경제 활동의 규모 증대는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고전파 경제학의 완성자였던 존 스튜어트 밀의 경우에는 아예 성장이 멈춘 "정상 상태(stationary state)"를 가장 이상적인 목표로 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은 1930년대 이후 2차 산업혁명의 성숙화와 그와 결부된 경제 대공황의 발생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난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일변한다. 대량소비/대량생산을 기초로 하는 2차 산업혁명의 논리에 있어서 경제의 부조화가 벌어질 경우, 순식간에 대량 실업과 투자 부진으로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및 정치 나아가 국제 정치까지 아수라장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경험한 각국 지배층은 2차 대전이 끝난 뒤 산업국가를 건설하면서 경제 성장을 최고의 국가 목표로 삼게 된다. 자본 축적을 목표로 하는 자본가/투자자 계급과 고용 안정 및 임금 상승을 목표로 하는 노동계급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생산을 통한 더 많은 성장이 유일한 답이라고 여겨진 것이다. 이 "영광의 30년"에서 만들어진 경제 성장의 신화는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의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무너지기는커녕, 세계 시장에서의 우위라는 수사학의 변화만 있었을 뿐 지금도 똑같이 각국 거시경제 정책 나아가 국가 정책 전반의 최고 목표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1백 년이 채 되기 전에 지구 생명권 전체는 파멸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 "성장"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따져볼 이유를 찾게 된다. 나아가 탈성장주의자들은 여기에서 "경제 성장의 신화"가 갖고 있는 허구성을 밝히기 위해 그것이 하나의 "회계 방식"에 불과하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는 회계 방식이기에 즉시 철회되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의 회계방식에 불과한 '경제성장 신화'의 허구성

GDP 혹은 그와 비슷한 "국민 생산/소득"의 개념은 기실 화폐로 계산된 바의 부의 총량 혹은 총액을 일컫는 것일 뿐이다. 인간과 자연과 사회는 항상 스스로를 풍요하게 만들기 위해 움직이게 되어 있지만, 그중에서 오직 화폐로 계산된 채권/채무 관계를 발생 시켜 장부에 포착된 활동만이 그 포착된 액수만큼으로 기록되고 계산되는 것이 GDP의 개념이다. 아무리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풍요롭게 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유무형의 것들이라고 해도 화폐적 채권/채무로 포착되지 않는 한 여기에서 빠지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성장 신화"에서 만들어진 국민계정과 경제 시스템에서는 인간과 자연과 사회의 유무형의 요소들 중 화폐적 부를 불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이 "생산 요소"로 인정을 받으며, 그 가치 또한 그 "생산 요소"로서의 가치로 주어지게 된다. 결국 인간, 자연, 사회의 모든 사건과 사물이 "생산함수"의 투입 요소로 계산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계산에 기초한 성장의 정책이라는 것은 극히 낯익은 자본가들의 회계 방식, '총 잉여 = 총 생산 - 총 비용'의 도식을 기초로 잉여를 극대화하기 위해 비용을 최소화한다는 것에 맞추어지게 된다.

그 결과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심각한 손상이 남아도 "비용"으로 계산되지 않으며, 막상 인간과 자연과 사회에 큰 풍요를 가져올 수 있는 것들은 화폐적 부라는 회계 방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한 전혀 포착되지도 않는다. 남녀 주부들의 가사노동을 생각해보라. 위키피디아가 창출한 어마어마한 '풍요'를 생각해보라. 한 푼도 받지 못하지만 오늘도 그림을 그리고 악보를 쓰는 예술가들을 생각해보라. 

인간, 사회, 자연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화폐적 소득의 총량 이외에도 그것으로 수량화할 수 없는 여러 소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좋은 삶의 재정립

따라서 우리는 GDP 이전에 '부'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부'에 대해서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동원할 수 있는 객관적 물자의 총량'이라는 객관주의적 방식과 '인간과 사회 주체의 만족과 행복과 더 많은 역량 개발'이라는 주관주의적 방식이 있거니와, 여기에서 전자로 경도된 현재의 부의 개념을 후자로 전환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전자의 경우 결국 물질적 부의 총량 증가라는 것으로 이어지고, 이를 측량하는 데에 역사적 기원을 둔 기존의 성장 회계에 기대는 경제 시스템의 운용 방식이 나타나게 된다. 이는 결국 인간, 자연, 사회의 무질서도 증가와 생태 위기를 필연적으로 낳게 되어 있다. 하지만 후자로 부의 개념을 전환한다면 물질적 현실의 극적인 변화나 동원이 없어도 인간과 사회와 자연이 풍요로운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계속 팽창해나가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게 된다. 

후자로 전환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간, 사회, 자연의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화폐적 소득의 총량 이외에도 그것으로 수량화할 수 없는 여러 소중한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런 것들을 화폐 이외의 방식으로 수량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GDP 증가라는 하나의 목적(telos)으로 짜여진 회계 시스템이 아니라, 그 병렬적인 여러 가치들을 모두 계량화하여 종합적 복합적으로 평가하여 집단행동의 선택지를 다변화할 수 있는 회계 시스템이다. 만약 이러한 회계 시스템이 존재한다면 GDP는 그중 하나에 불과한 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다.

대신 위에서 말한 '사회적 비용'의 여러 요소들이 제대로 비용으로 포착되어 참작될 것이며, '사회적 저생산'의 늪에 걸려 있는 여러 요소들의 생산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것이다. 그 결과 GDP의 성장과 감소와 무관하게 인간, 사회, 자연의 빈곤화를 막고 오히려 더 많은 풍요를 가져올 수 있는 집단적인 산업 활동의 조직과 재조직이 가능해질 것이다.

요컨대, GDP 성장에 기여하는 활동과 자원 이외에도, 여러 다른 목적과 가치에 기여하는 활동 및 자원에 대해 적절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계산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산업사회로 되돌리자는 것도 아니며, 지금처럼 GDP 성장과 생태 위기 사이에서 절망적인 줄타기를 계속하자는 것도 아니다. 산업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 대안적인 방식을 마련하여 그 목표를 인간과 자연과 사회의 진정한 의미의 더 많은 '좋은 삶'으로 재정립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질적 유형 자원들은 정상 상태에 머물게 하고, 인간과 사회와 자연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비(非)물질적 자원들로 경제를 발전시킬 것이며, 이를 통해서 자연과 생태의 파괴를 멈추면서도 인간의 집단적 개인적 욕구의 충족을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새로운 풍요의 개념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홍기빈님은 정치경제학자입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2021년 11월호에 실렸습니다.


태그:#참여사회, #참여연대, #성장주의, #G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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