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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촛불정부'임을 자처하며 19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취임 후 대통령은 '노동존중사회'를 강조하면서 맨 처음 찾아간 곳이 인천국제공항공사였다. 공공기관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함으로써 민간부문으로 확산시키려는 의도였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1천만 명이 넘는 기형적인 사회에서 당연한 행보였다. 더구나 소득주도성장을 정책 기조로 내세운 마당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시급 인상은 노동존중사회로 나아가는 수순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4년 반이 지난 지금 소득주도성장 정책은 폐기됐고 시급은 1만원을 넘지 못했으며 비정규직 1천만 명 시대는 여전하다. 매년 산재 사고로 희생되거나 불구가 되는 노동자가 10만 명을 넘나든다.
 
2020년 한 해 동안 10만 명이 넘는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 2020년 산재사고 통계 2020년 한 해 동안 10만 명이 넘는 산재사고가 발생했다.
ⓒ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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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지난 4년도 마찬가지이다. 매년 2,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산재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죽지 않고 일할 권리'를 외쳐보지만 매일 6-7명 노동자들이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오늘도 장례식장으로 퇴근한다. 산업안전보건공단 통계(2021)에 따르면 2021년 1월부터 6월 말까지 반 년 동안 1,137명이 산재사고로 희생됐다. 전년 대비 36명이 늘어난 수치이다. 하반기까지 합치면 올해도 일터에서 목숨을 잃는 노동자가 2,000명대를 훌쩍 넘을 것이다.

언제 이 야만의 시대를 끝낼 것인가? 정답은 간단하다. 수구 보수 정치인들에 의해서 누더기가 된 「중대재해처벌법」을 즉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으로 재개정하면 된다. 그리고 재개정 시 5인 미만 사업장도 포함시키면 된다. 끝없이 이윤을 추구하려는 기업주의 이해관계만 반영하는 노동법으론 이 시대의 야만을 끝낼 수 없다.
 
산재사망사고의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5인 미만 영세사업장에서 발생한 산재사망사고도 35%에 달했다.
▲ 2020년 산재사고 통계 산재사망사고의 80%가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5인 미만 영세사업장에서 발생한 산재사망사고도 35%에 달했다.
ⓒ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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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산재사망사고의 80% 이상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했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 비율이 35%로 두 번째로 높았다. 51년 전 전태일 열사가 열악한 노동현실에 절망하며 몸서리치던 시절과 별반 나아진 게 없다. 자신의 몸을 근로기준법전과 함께 불사른 것은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대한 분노의 항거이자 최후의 저항이었다.

이제 반백년이 지났으면 좀 나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1인당 GDP가 3만$이 넘는 선진국 진입을 앞둔 나라에서 너무 부끄럽지 않은가! 물질이 인간의 영혼을 압도한 사회라지만 이젠 더 이상 야만의 시대를 지속시킬 순 없지 않은가! 아침에 일하러 나간 청년 노동자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회라면 그런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40-60대 가장인 노동자를 장례식장으로 퇴근하게 만드는 우리 사회가 과연 정상인가! 이젠 그런 야만의 시대를 당장 끝내야 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노동존중사회'를 표방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그 해 『전태일 바로보기』(2017)란 책이 나왔다. 명색이 대학교수, 변호사를 비롯해 지식인들이 쓴 글이라니 읽기가 참 힘든 책이다. 어떤 편저자는 우리나라 노동조건과 근로환경이 개선된 요인이 전태일을 비롯한 노동운동의 결과라기보다 '한국경제발전의 결과'라고 역설한다.
 
2017년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지원금을 받아 출간된 <전태일 바로보기>는 <전태일 평전>을 인용하고 있지만 전태일을 신격화, 우상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전태일 바로보기> 책 표지 2017년에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지원금을 받아 출간된 <전태일 바로보기>는 <전태일 평전>을 인용하고 있지만 전태일을 신격화, 우상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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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어떤 대학교수는 전태일의 죽음을 비하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 책에서 전태일이 "죽음을 택한 것은 오히려 비겁하고 손쉬운 선택"(70쪽)이었다며 "전태일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가피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아름답지도 않다"(71쪽)고 강변했다. 그는 뉴라인트 전국연합 공동의장을 했고 강의 시간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우리나라 여성들을 '매춘부'에 비유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편저자는 민주화운동가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이 "전태일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보다 특정 목적을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47쪽)고 주장했다. 또 다른 편저자인 대학교수는 초중고에서 전태일을 가르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주입시키는 것이라 주장했다.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책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출판 콘텐츠 창작지원금을 받아 출간했다는 사실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아무리 역사정의가 실종된 사회에서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 어렵다지만 역사의 진실을 비트는 지식인들의 글쓰기 태도는 참으로 이해불가이다.

50대 이상은 학교교육을 통해 전태일을 배우질 못했다. 오히려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할 때 '100억불 수출'과 '새마을운동', 그리고 '박정희'를 연상시킨다. 그 시절엔 그렇게 학교시험에 나왔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논란 끝에 2012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건립되었다.
▲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전경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은 논란 끝에 2012년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건립되었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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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다못해 경제성장을 언급하면 박정희나 재벌들을 떠올리는 개인 영웅신화를 제도권 교육과 관제 방송언론을 통해 주입받았다. 그런 연상을 하는 나이든 세대일수록 청년 전태일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한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초중고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전태일을 공부한다. 그래서 초중고 학생들에게 전태일은 매우 낯익은 존재이다.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이 13~14세 어린 여공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해 보고자 고투한 흔적과 애쓴 활동을 잘 알고 있다.
 
1983년 전두환 5공 정권 시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저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에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1991년 개정판을 낼 때 저자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음을 밝혔다.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 발간을 앞두고 1990년 12월 폐암으로 작고했다. <전태일 평전>에 점심을 굶는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차비로 풀빵을 사주는 청년 전태일의 따뜻한 인간애가 펼쳐저 나온다.
▲ <전태일 평전> 책 표지 1983년 전두환 5공 정권 시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저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에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1991년 개정판을 낼 때 저자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음을 밝혔다.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 발간을 앞두고 1990년 12월 폐암으로 작고했다. <전태일 평전>에 점심을 굶는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차비로 풀빵을 사주는 청년 전태일의 따뜻한 인간애가 펼쳐저 나온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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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점심으로 싸준 밀가루 찐 빵을 어린 여공들 앞에서 차마 꺼내 먹지 못한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한 청년이었음을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 나아가 어린 여공들이 처한 현실을 어머니 앞에서 고통스럽게 토로한 사실도 알고 있다.

"어머니, 순덕이(글쓴이 주 : 전태일 막내 동생)보다 작은 애도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먼지구덩이 속에서 굶으면서 애쓰고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아이들이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합니다." - 조영래(2005). 『전태일 평전』. 돌베개. 125쪽.

실제로 전태일은 박정희 대통령을 '국부'라 칭하며 평화시장 노동현실을 개선해 주도록 청와대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평화시장 노동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바보회」, 「삼동친목회」도 만들고 노동청에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평화시장 노동현실을 언론에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다. 경향신문에 평화시장 노동현실이 기사로 나왔을 땐 전태일을 비롯해 노동자들은 순간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기도 했다. 노동현실이 변화될 거란 기대가 컸다. 실제로 업주들이 근로 조건과 환경 개선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전태일은 분신 석 달 전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글을 적으며 절망을 이겨내고자 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 조금만 더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조영래(2005). 『전태일 평전』. 돌베개. 144쪽.

어렸을 때 봉제공이었던 아버지로부터 기술을 배운 탓에 1년 만에 전태일은 미싱사 보조에서 미싱사를 거쳐 재단사로 급성장했다. 월급도 당시 공무원 월급보다 많았기에 어엿한 가장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이 처한 비참한 노동 조건과 변화하지 않는 노동현실에 분노했고 어린 여공들의 처지를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혹한 노동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던져 노동현실을 바꿔보려고 애썼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따라가다 보면 전태일 같이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한 사람을 만나긴 어렵다. 왜냐하면 전태일의 죽음은 '휴머니즘'이 아니고선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2005년 청계천 6가 버들다리(전태일 거리)에 조성된 전태일 반신부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신상 바닥 동판에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 문구를 남겼다.
▲ 전태일 거리에 건립된 전태일 반신상 2005년 청계천 6가 버들다리(전태일 거리)에 조성된 전태일 반신부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반신상 바닥 동판에 <행동하는 양심 전태일, 영원한 우리들의 영웅 전태일> 문구를 남겼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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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낮은 공간에서 전태일은 15시간씩 칼질을 하고 재봉틀에 매달렸다. 어린 미싱사 시다들은 2평 남짓한 작업장에 10명씩 들어가 일했다. 10평 조금 넘는 공간에 40명이 넘게 모여 14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다. 환기구도 없고 허리를 펼 수조차 없는 낮은 작업 공간은 항상 먼지투성이였고 어린 여공들은 폐 질환에 쉽게 노출되었다.

전태일 또한 1967년 재단사 신분임에도 육신의 고통은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육신의 고통보다 매일 마주하는 노동현실 앞에 정신적 고통이 훨씬 컸다. 특히 어린 여공들이 처한 가혹한 현실 앞에 전태일은 마음이 아팠고 변화하지 않는 노동 현실에 분노했다. 1966년 재단 보조였을 당시 자신의 차비 30원을 아껴서 풀빵 30개를 사와 열서너 살 어린 여공들 6명에게 점심 대용으로 나눠주었다. 그리고 자신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도봉구 기슭까지 걸어 다녔다. 자신을 내어주며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던 스물두 살 청년 노동자 전태일!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었고 어머니 이소선 여사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분신한 날 숯덩이처럼 까맣게 탄 몸으로 전태일은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약속을 하며 다짐을 받았다. 전태일이 어머니에게 힘겹게 던진 첫 마디는 이러했다.

"어머니, 놀라시면 안 됩니다! 어머니, 담대하세요! 마음을 굳게 가지세요! 그래야 내가 말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천천히 어머니께 약속을 하듯 다짐을 받았다.

"어머니, 우리 어머니만은 나를 이해할 수 있지요? 나는 만인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은 목숨들, 불쌍한 근로자들을 위해 죽어가는 나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조금도 슬퍼 마세요. 두고두고 더 깊이 생각해 보시면 어머니도 이 불효자식을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 저를 원망하십니까?" - 조영래(2005). 『전태일 평전』. 돌베개. 299쪽.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 손을 꼭 잡고 눈물로 대답했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 어찌 원망하겠니? 원망하지 않는다."

전태일은 비로소 웃으며 마지막 말을 힘겹게 이어갔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자 어머니가 죽어가는 아들에게 다짐했다.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청년 전태일은 13-14세 어린 영혼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었다. 어린 여공들이 처한 가혹한 노동현실에 분노했고 각혈을 하며 쓰러진 어린 여공을 보면서 삶의 가치관이 변화했다. 고된 노동 속에서도 꾸준히 일기를 썼고 틈틈이 독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노동현실이 절망적일수록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신념은 더욱 단단해져갔다. 어느 한 순간도 어린 여공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연민을 넘어 불의한 노동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목숨을 내어주고자 했다.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는 고귀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전태일의 삶과 죽음은 우리사회 깊숙이 그리고 넓게 파장을 일으켰다. 당대 지식인과 종교인의 대오 각성은 물론 1970년대 노동야학이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아가 1980년대 초 대학생들 상당수가 넓은 길을 마다하고 노동현장에 자신을 투신하며 좁은 길을 결단한 것 역시 모두 전태일의 희생이 가져온 결과였다. 이제 더 이상 고결한 영혼의 죽음을 왜곡해선 안 된다. 나아가 매일 6-7명이 일터에서 추락해 죽고 압사당하는 참극이 더 이상 되풀이돼선 안 된다.

전태일 열사의 외할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일경에 피검돼 학살당했다. 어머니 이소선 여사 또한 정신대로 끌려갔다 도망 나왔다. 아버지 전상수는 해방 직후 대구 노동자 파업에 참여했다 고초를 겪었다. 전태일 집안을 보면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 세대부터 노동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가로 인정받은 손자 세대까지 3대에 걸친 고난의 시절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전태일을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2020년 11월 전태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22살 청년노동자의 죽음, 그 아름다운 영혼 앞에 산재사망사고 2,000명 시대라는 '야만'을 이젠 종식시키고 세계 10위 경제대국에 걸맞게 우리 사회가 좀 더 성숙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할 시점이다. 그것이 51년이 지난 오늘날 22살 청년노동자의 죽음을 제대로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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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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