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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한양 큰길 중 하나인 광통교 인근에 서구적 이질감을 풍기는 고풍스러운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대건축에선 보기 힘든 섬세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집이다. 1909년 은행 용도로 지어졌으니 112살이다. 집은 아직도 숨 쉬며, 본디 지어진 운명에 충실하다. 광통교 인근에 있다 하여 '광통관'으로 불린다.
 
1909년 대한천일은행 지점으로 탄생한 광통관.
▲ 광통관 1909년 대한천일은행 지점으로 탄생한 광통관.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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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과 창틀, 난간과 처마를 새하얀 화강석으로 장식하고 벽체는 붉은 벽돌이다. 아치 모양 창은 물론 벽면과 지붕 장식, 난간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처리가 돋보인다. 집은 전체적으로 선이 굵은 강한 의장(意匠, 시각적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양쪽 지붕에는 돔이 얹혀 있다. 화려하고 과시적인 바로크양식으로, 역동적이며 웅장한 멋을 부리려는 욕심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은행 종로금융센터'다.
 
은행으로 신뢰를 상징하듯, 세심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광통관 전면. 출입문 상단에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이란 글씨가 남아 있음.
▲ 광통관 전면 은행으로 신뢰를 상징하듯, 세심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광통관 전면. 출입문 상단에 "주식회사 조선상업은행종로지점"이란 글씨가 남아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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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실한 신식화폐

서구 자본주의 발달과정을 도식적으로 나열하면, 대항해시대 상업자본주의 - 산업혁명 산업자본주의 - 침략적 제국주의 독점(금융)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은 자본주의 맹아인 화폐경제도 싹틔우지 못한 상태다.

개항 이후 밀려드는 재정수요와 중국화폐 폐단을 막기 위해 주조한 당오전(當五錢) 실패를 거울삼아 1883년 서둘러 은행이 아닌 화폐발행기구 '전환국'을 세우나 1891년까지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1892년 '신식화폐조례'에 의해 5냥 은화를 발행하나 실제 사용은 어려웠다.

동학혁명의 발발 원인은 삼정 문란에 따른 착취와 수탈이다. 동학을 통해 분출된 민중의 요구가 뒤이은 갑오개혁에 상당 부분 반영되어, 가장 큰 폐단인 조세를 돈으로 수취하는 금납(金納)제가 시행되나 조선은 교환가치를 지닌 제대로 된 화폐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니 금납제는 허상에 불과하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은 오히려 일본 화폐가 유입되어 우리 경제를 갉아먹기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막대한 전비(戰費)가 필요한 일제는 경복궁 침범을 통해, 조선에 은본위제 골자 7개 조의 '신식화폐발행장정'을 강압하기에 이른다.

백동화의 변신
 
1894년 주조된 전환국 화폐. 이중 백동화가 주조 화폐의 대세를 이룸.
▲ 전환국 주조 화폐 1894년 주조된 전환국 화폐. 이중 백동화가 주조 화폐의 대세를 이룸.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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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은 화폐 단위를 푼(分), 전(錢, 10푼), 냥(兩, 10전)으로 구분하고 1푼은 황동, 5푼은 적동, 2전 5푼은 백동, 1냥 및 5냥 은화 4종류로 규정했다. 5냥 은화가 본위화폐, 은화 1냥 이하는 보조화폐다. 신식화폐가 대량 주조될 때까지 임시로 외화 혼용을 허용하고, 외화는 조선 화폐와 동질·동량·동가로 취급했다.

장정은 일본 제도를 본떠 채택한 은본위제로, 특히 제7조 규정은 조선에서 일화(日貨)를 유통하려는 의도다. 이에 일화 1원·20전·10전·5전·2전·1전이 조선에 유입된다.

전환국은 은(銀) 부족으로 본위화폐를 주조하지 못하고, 주조비 대비 수익성이 가장 큰 백동화를 대량으로 주조하여 유통한다. 왕실과 정부재정을 확대하려는 의도다.

백동화는 전환국에서만 주조된 것이 아니다. 장정엔 불법 주조금지와 처벌 규정이 없었고, 정부는 특주(特鑄, 특정인에게 주조권을 인정)·묵주(默鑄, 뇌물 받은 당국자 묵인)·사주(私鑄, 전환국 판형을 훔쳐 주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심지어 외국에서 사주한 백동화가 대량으로 밀반입되는 형편이다. 전환국은 왕실 재정확보를 위해 매년 백동화 발행량을 엄청나게 증가시킨다.

그럼에도 백동화는 경기도에서만 주로 유통되었고, 삼남과 북부지역에서는 인플레이션 없는 현물유통이 대세였다. 백동화는 그만큼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1900년대 초엔 '백동화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져 화폐가치 하락은 물론 민생이 파탄되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에 정부는 백동화를 전국적으로 유통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조세 금납을 통한 백동화 확산보급이다.

대한천일은행 설립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일본 영향력이 잠시 주춤한다. 1896년 들어 독립신문과 협회, 나아가 독립문 건립 모금운동이 이어진다. 와중이던 1896년 6월 독립협회 구성원 주축 전·현직 관료가 출자한 민영 '조선은행'이 설립되어, 이듬해 2월 국고출납업무 위주로 영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독립협회 영향력 안에 놓여있던 한계로 1901년 문을 닫고 만다.
 
조선상업은행과 조흥은행 건물이 보임. 사진 좌측이 청계천 광통교.
▲ 1920년대 초 남대문로 조선상업은행과 조흥은행 건물이 보임. 사진 좌측이 청계천 광통교.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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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2월 김종한(金宗漢) 등 상인 출신 재계인사들이 '한성은행'을 설립한다. 자본주의 맹아마저 형성되지 못한 현실에서, 일반인 대상 환전 및 금융업무 때문이었는지 사실상 폐점 상태를 면치 못한다. 이 은행이 옛 조흥은행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집단은 서울·개성·인천이다. 이들은 일본의 경제침략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상행위로 일정 상업자본을 축적·유지하고 있었다. 독립협회 공간에서 이들은 협회를 주도하던 안경수·이완용·이채연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들과 조선은행, 대조선저마(주), 마차(주) 등의 출자와 설립·운영에 관여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광무개혁에 이어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상인들이 길을 잃는다. 안경수를 잃은 상인집단은 절대적 정치후원자가 필요하다. 보수로 회귀한 광무정권과 이용익이 상인을 눈여겨본다. 백동화 인플레이션 주역인 이용익이 전환국을 맡게 된다. 이용익은 상인집단을 통해 자본주의 싹을 틔우고 백동화 인플레이션 진정 및 이용지역확산, 재정개혁 방안을 찾으려 한다. 바로 은행설립이다. 둘의 이해관계는 착착 맞아 들어가 '대한천일은행'이 곧바로 설립된다.
 
1899년 1월 22일 청원한 천일은행 설립청원서에 다음날 허가 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
▲ 청원서 및 승인서 1899년 1월 22일 청원한 천일은행 설립청원서에 다음날 허가 한다는 내용이 담긴 문서.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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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설립 이전인 1898년 12월부터 전환국에서 총 3만 원 운영자금이 순차적으로 지급되기 시작한다. 1899년 1월 22일 은행설립 청원이 제출되자, 다음 날 허가서가 발급된다. 29일 형식적인 발기인총회를 거친다. 상인과 황실측근·재무관료가 발기인으로 공공연하게 '황실 또는 정책은행'임을 표방한다.

주금납입은 원활치 못해 1899년 1.5만 원으로 정관에 명시한 자본금 5만 원을 채우지 못한다. 이에 1902년 영친왕과 이용익이 대주주로 참여, 이듬해 5만 원을 채운다. 주당 500원으로 서민들은 꿈도 꾸지 못할 가격이다. 권력과 부르주아로 변신이 예비 된 상인 간 이해관계 결정판이다. 정관에 한국인만 주주로 참여할 것을 명기한다. 주식매매도 엄격했다. 이는 설립 당시 은행 성격과 취지를 잘 보여주는 예다.

성장과 변신

조선은행 및 한성은행과 달리 천일은행은 지방 조세청부를 맡는다. 금납제 시행 이후에도 조세 수취는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은행설립을 기화로 광무정권은 '백동화 조세납부조치'를 시행한다. 1899년 전국 205개 군에서 백동화로 조세를 걷었는데, 그해 정부 조세징수총액의 16%에 해당한다.

이는 백동화의 전국적 확산은 물론 덩달아 징수율도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 밖에도 환전과 조선상인에 대한 대출업무도 늘여간다. 또한 광무정권이 지급보증한 본점표(本店票, 수표) 유통도 겸하게 된다. 이는 전환국(국가)이 천일은행 신용보증기관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바로크 풍의 웅장함과 세심한 의장이 돋보임.
▲ 광통관 측면 바로크 풍의 웅장함과 세심한 의장이 돋보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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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광무정권은 1901년 '화폐조례'를 통해 금본위제를 도입하고, 프랑스 차관도입으로 중앙은행 설립을 도모하나 위기를 느낀 영국과 일본의 벽을 넘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도 백동화 주조와 위조화폐는 늘어만 간다. 일화 100엔과 교환비가 1899년 116에서 1905년이면 두 배 가까운 211로 하락한다.

한국 화폐의 퇴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제는 가장 먼저 재정을 장악·침범해 들어온다.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일본인이 1904년 11월 전환국을 폐쇄한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일본제일은행권 진출을 저지하던 백동화 퇴출 조치다.

연이은 칙령으로 한국화폐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거래에 일본화폐가 사용될 법적 근거를 마련한다. '구화폐교환회수에관한규정(칙령4호)'으로 모든 구화폐 정리 기준을 마련한 후, 이를 시행할 은행으로 일본제일은행을 선정하여 이들에게 엔화본위제 화폐발행권도 부여한다. 만일에 일어날 한반도 경제 악화가, 일본경제에 끼칠 악영향을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다.
 
초기 은행장. 영친왕이 1906년 6월 까지 역임한 기록은 1년 간 휴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일본경제에 예속되는 시작을 보여줌.
▲ 초기 은행장 초기 은행장. 영친왕이 1906년 6월 까지 역임한 기록은 1년 간 휴업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일본경제에 예속되는 시작을 보여줌.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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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은행은 한국화폐와 금융시스템이 퇴출당하는 상황을 견뎌내지 못한다. 정책은행으로 탄생한 한계다. 이에 1905년 6월부터 1년간 휴업에 들어간다. 영업을 재개하고 경영진 등을 교체하지만, 사실상 일본이 주도하는 경제 및 일본인과 거래를 늘리며 그들 체제에 흡수되어 간다. 1909년에 이르러 한국 국책은행을 연상시킬 어떤 흔적도 남지 않는다. 그해 본점을 이전하고, 2년 후 이름마저 조선상업은행으로 바꿔 단다. 약탈적 식민자본주의에 강압적으로 끌려 들어간 서막이다.
 
1909년 1월 1일자로 고시된 백동화 무효 조치 고시문.
▲ 백동화 무효고시 1909년 1월 1일자로 고시된 백동화 무효 조치 고시문.
ⓒ 이영천(우리은행 은행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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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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