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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였던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1953년 이승만 정부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였던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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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교사들 사이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한국사 과목을 부르는 별명이 있다. 바로 '국적 판별 시험'. 문제가 워낙 쉬워서 붙인 자조적 표현이다. 절대평가라 부담도 적고, 등급을 전형에 반영하는 대학도 드물어 수험생들은 대개 탐구 영역을 앞둔 쉬는 시간 정도로 여긴다.

한국사 시험을 쉽게 생각하는 이유는 또 있다. 나오는 문제가 매번 '뻔하다'는 것. 근현대사를 예로 들면, 3.1운동을 다루는 문제에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정답이고, 6.25 전쟁은 인천상륙작전이며, 6월 민주항쟁은 4.13 호헌조치나 직선제 개헌이 제시되는 게 불문율이다.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도 마찬가지다.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라는 문구가 제시되면,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성립된 신간회가 전국으로 확산시켰다는 내용이 어김없이 정답이다. 삽화가 들어가면 십중팔구는 댕기머리 여학생을 일본 학생이 희롱하는 장면이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광주라는 지역명이 공식적으로 명시된 사건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유일하다. 5.18의 경우,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지만, 공식 명칭은 5.18 민주화운동이다. 자칫 도도한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광주가 독점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어서다.

수능을 치르는 아이들뿐이랴. 장담하건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모두 알고 있다. 앞서 말한 정도의 수험용 지식은 삼척동자도 아는 필수 교양이다. 나아가 3.1운동이나 6.10 만세운동처럼 날짜가 명시되지 않은 사건임에도 일어난 날짜까지 대부분 알고 있다.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공식 지정된 날이다. 지난 2018년, 3.1운동, 6.10 만세운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3대 독립운동으로서 기념식이 국가 행사로 격상되었다. 11월 3일이면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앞다퉈 언론사의 카메라 기자들을 대동하고 광주를 찾는 이유다. 

동맹 휴학의 시대,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광주와 나주를 잇던 통학 기차의 출발점인 광주역이 있던 자리. 지금은 소방서가 자리하고 있다. 드물게 도로변 귀퉁이에 조그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마저 대형 현수막이 가리고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당시 광주와 나주를 잇던 통학 기차의 출발점인 광주역이 있던 자리. 지금은 소방서가 자리하고 있다. 드물게 도로변 귀퉁이에 조그만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그마저 대형 현수막이 가리고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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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다녀간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사적지를 뒤늦게 찾았다. 지난 주말(7일) 오후, 동네 마실 다니듯 걸어서 광주 도심을 거닐었다. 당시 사건이 벌어진 곳은 걸어서도 충분히 돌아볼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있다. 인구 140여만 명의 거대도시인 지금의 광주와 비교할 순 없다. 

당시 일본인 학생들과 무력 충돌한 곳의 기록은 남아 있지만, 정작 사적지임을 알려주는 표지는 눈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대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했던 학교마다 기념관과 기념탑을 교정에 세워두었을 뿐이다. 물론, 위치와 형태는 달라도 전시된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현재 기념탑이 세워진 학교는 광주제일고등학교와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광주교육대학교 등이다. 일제강점기 광주의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농업학교, 사범학교의 후신이다. 사실상 당시 한국인이 주로 다니던 광주의 상급학교 전부에 해당한다.

광주뿐이랴. 이듬해 봄 5월까지 전국의 194개 학교 5만4000명이 떨쳐 일어났다고 하니, 사실상 전국 각지의 모든 상급학교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알다시피, 광주학생독립운동이 확산된 데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던 신간회의 역할이 컸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일본인 학생이 다녔던 광주중학교 건물. 지금은 중앙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일본인 학생이 다녔던 광주중학교 건물. 지금은 중앙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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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일제강점기 우리 땅에 거주하던 일본인과 한국인이 다니는 학교가 달랐다. 일본인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6년제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한국인은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식민지 민중의 요구에도 한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하는 차별적 교육 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전국의 학생들은 민족 차별에 반대하며 수업 거부와 동맹 휴학의 방식으로 저항했고, 1929년에 이르러 대규모 항일 투쟁으로 불붙은 것이다. 교과서에는 간과하고 있지만, 1920년대는 '맹휴(동맹 휴학)의 시대'였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갑툭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명칭만으론 알 수 없는 1926년 6.10 만세운동 역시 '맹휴의 시대'에 벌어진 학생독립운동이다. 비록 전국적으로 확산되진 못했지만, 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명실공히 10대 후반의 학생들이었다. 현재 서울 중앙고등학교에서 해마다 6.10 만세운동 공식 행사를 열고 있는 이유다. 

실체만 존재하고 인물은 사라진 사건
 
11월 3일 당일 일본인 학생과 집단 무력 충돌이 벌어진 동문다리 입구의 모습. 표지석은커녕 복개가 되어 다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곳이 동문다리였다는 사실은 시장의 간판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11월 3일 당일 일본인 학생과 집단 무력 충돌이 벌어진 동문다리 입구의 모습. 표지석은커녕 복개가 되어 다리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이곳이 동문다리였다는 사실은 시장의 간판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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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광주학생독립운동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기까지 사연이 좀 기구하다. 1953년 정부가 '학생의 날'로 지정했다가, 1973년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한다는 명분으로 폐지되었다. 이후 1984년에 다시 같은 이름으로 부활했다가, 2006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로 개명됐다.

여기서 지정 연도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정부의 입맛에 따라 기념일의 존폐와 명칭이 좌지우지됐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이면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6.25 전쟁이 막 끝난 시점으로, 정부는 항일 독립운동을 어처구니없게도 반공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학생의 날'은 1956년 '반공 학생의 날'로 개명됐다. 애초 항일 정신보다 6.25 전쟁 당시 학도 의용군의 희생을 기릴 목적이 더 컸던 셈이다. 5.16 군사 정변 이후 반공을 국시로 표방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학생도, 독립도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또 1973년이면 서슬 퍼런 유신이 선포된 이듬해다. 전국의 모든 학교가 병영화하던 당시 '학생의 날'은 거추장스러운 기념일일 뿐이었다. 이미 정부는 학생회를 해체하고 대신 학도 호국단을 결성했으며, 학교에서 교련이라는 이름으로 군사훈련을 시키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박정희의 사망으로 유신 정권이 무너지자 학도 호국단을 폐지하고 학생회를 부활시키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다. 전두환 정권은 정통성의 취약함을 감추기 위해 교복 자율화, 야간 통행금지 해제와 함께 이를 수용했다. 12.12 군사 반란과 광주 학살로 권력을 찬탈한 자들 아닌가.

역대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조리돌림 당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건 노무현 정권에 와서다. 그러나 겨우 이름만 되찾았을 뿐 실질은 바뀐 게 거의 없다. 여기저기 큼지막한 기념물이 세워진 걸 제외하면 '학생의 날'로 불리던 시절과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사상적 기반, 주동 인물 등에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교과서에서조차 '댕기머리 성희롱'에 기인한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 편파적 처벌과 전국 확산 언급이 전부다. 마치 어린 학생들이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인 양 묘사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인물이 성희롱당한 여학생과 그 모습에 분개한 어린 남학생으로 귀결됐다. 정작 1920년대 동맹 휴학을 이끈 이와 당시 시위를 주도한 이, 사건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이는 배제된 형국이다. 실체만 존재하고 인물은 사라진 사건인 셈이다.

깊고도 넓은 분단의 모순
 
정부의 공식 기념식이 행해지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의 전경. 워낙 커서 가까이에선 사진에 담을 수 없다. 탑에 오르는 계단 입구에도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정부의 공식 기념식이 행해지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의 전경. 워낙 커서 가까이에선 사진에 담을 수 없다. 탑에 오르는 계단 입구에도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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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과 장석천. 장재성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결사체인 성진회와 독서회를 조직하고 시위를 주동한 인물이고, 장석천은 신간회의 청년 간부로서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사건을 전국화시킨 핵심 인물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들의 행적은커녕 이름조차 낯설어한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모르는 이가 없는데, 정작 그것을 주도한 인물은 아무도 모르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짧은 생애를 살다간 그들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다. 학창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했으며, 평생 사회주의자로 살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당시 사회주의는 식민지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사상' 또는 '신흥과학'으로 불리며 각광을 받았다. 1926년에 결성된 성진회나 해체된 뒤 학교마다 조직된 독서회도 실상 사회주의 공부 모임이었다.

엄밀하게 말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사회주의에 입각한 학생 주도의 항일 투쟁이었던 셈이다. 분단 정부의 수립과 6.25 전쟁 후 사회주의가 철저히 금기시되면서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뿐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주인공은 묻히고 껍데기만 남게 된 이유다. 

장석천은 그나마 정부가 주는 훈장이라도 받았고, 그의 유해도 국립 대전 현충원에 모셔졌으니 복 받았다 해야 할까. 장재성은 해방 후 38선 이북을 왕래하며 이적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6.25 전쟁 중 옥중에서 총살되었다. 훈장은커녕 유해조차 찾을 수 없는 지경이다. 

단지 둘의 차이라면, 조국의 해방을 봤느냐 여부다. 나이 서른셋에 혹독한 수감생활로 얻은 병으로 요절한 장석천과 달리, 장재성은 분단으로 치달은 해방 조국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장석천이 살아 있었다면, 거물급 사회주의자로 우뚝 섰을 거라는 데엔 이견이 없다. 

무명일지언정 동지였던 그들은 해방된 조국의 정부에 의해 남남이 됐다. 한 사람은 요절한 독립운동가로, 다른 한 사람은 '빨갱이'로 낙인찍히면서. 요컨대, 두 주동 인물에 관해 공부하지 않고선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모든 역사는 결국 인물사다. 

걸어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사적지를 돌아보며 새삼 깨닫게 된다. 으리으리한 기념물은 곳곳에 세워져 있지만, 정작 당시 자취가 서린 사적지에는 그 흔한 표지석이나 안내판 하나 설치돼 있지 않다는 게 안타깝다. 그래선지 그곳이 사적지라는 사실조차 아는 시민이 거의 없다. 

기념관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배경과 전개 과정, 영향 등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사회주의의 역할을 언급한 곳이 없다는 게 당혹스럽다. 또 추모관에 장재성의 영정을 놓아둘 거면, '빨갱이'라는 낙인은 지워야 옳지 않겠나. 이토록 분단의 모순은 깊고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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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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