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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아내는 이웃에 말동무가 생겨 심심찮은 시간을 보낸다. 버려진 듯 몇 년째 대문이 굳게 잠겨 있던 뒷집에 주인이 지난해 귀향했다. 주인은 아내보다 두 살 많은 또래였다. 알록달록 조그만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왔는데 '예삐'라 불렀고, 그래서 우리는 그녀를 '예삐엄마'라 불렀다.

그녀는 서울에서 살다 귀향했다. 읍내에서 여고를 나오고 어린 나이에 이 산골로 시집을 왔는데 농지가 많아 농사일에 매달려 살았다. 그러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 교육 걱정에 집을 뛰쳐나가다시피 서울로 갔다고 했다.

그 사이 시부모도 죽고, 몇 년 전에는 홀로 남아 농사일에 매달리던 바깥양반도 병으로 죽었다. 그 빈집으로 예삐엄마가 홀로 귀향한 것이다.

수십 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면 좀 쉬면서 다문다문 살련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얼굴만 뽀얬지 하는 일은 여느 여자 농부에 버금갔다. 집에선 열 통 넘게 벌을 키웠고, 집에 딸린 널찍한 텃밭엔 고추를 팔백 포기나 심었다.

그 많은 전답 한 평 팔지 않고 맨손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니 살아내기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억척스럽게 살았다는 예삐엄마의 서울생활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땅히 말동무가 없었던 아내는 더없이 좋아했다. 아침밥상을 물리기 바쁘게 뒷집으로 달려가 커피 한 잔 나누고 돌아와야 하루가 시작될 정도였다. 걸핏하면 우리 집으로 불러 우리 식구들과 밥상도 함께했다.

농사가 시작될 무렵 농협 퇴비 백 포대가 예삐엄마 텃밭에 도착했고, 퇴비 뿌리기는 힘든 일이라 내가 다 뿌려주었고, 예삐엄마는 옆집 두부박샌댁과 시끄러비아지매까지 불러 술상을 차렸고, 그렇게 어울려 봄날 하루가 온통 즐거웠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었다. 처음 이 산골마을에 들어올 때도 이웃이 있는 삶이 즐거울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굳이 마을 한복판 이웃들로 둘러싸인 이 빈집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막상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나누고 돕고 함께 즐기는 그런 이웃은 만날 수 없었다. 평생을 이 골짜기에서 살아온 터라 쉬 마음을 열지도 않았고, 특별히 대화할 거리도 마땅찮았다.

도시에서 살다 귀향한 예삐엄마는 귀농한 우리와 처지가 비슷했다. 이야기는 쉽게 섞였고, 대하기가 한결 편했다.

"아저씨. 우리 아래채 지붕에 방수포를 치는데 좀 거들어 주세요."

예삐엄마가 우리 집 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아래채 지붕이 많이 헐었더만 천막으로 덮는다고 될라나?"
"그렇게라도 해야 장마를 나지요."


예삐엄마를 따라 마당으로 들어서자 골목 안에 사는 서씨가 먼저 와 있었다. 아래채는 많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시멘트 기왓장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처마 끝으로 드러난 서까래도 썩어 있었다. 이 지붕을 넓적한 천막으로 덮어 씌운다고 했다.

내가 지붕으로 올라가고, 서씨와 예삐엄마가 마당에서 천막을 잡아당기며 얼기설기 줄을 쳤다. 태풍에 날아갈까 봐 경운기 폐타이어를 여기저기 얹어 눌러두었다. 작업을 하는 동안 두부박샌댁과 시끄러비아지매가 구경을 와 있었다.

일이 끝나고 툇마루에 모여앉아 고기를 구웠다.

"면사무소에 가보시지. 귀농인에게 빈집 수리비가 지원된다던데요."
"나는 귀농인으로 인정이 안 된대요. 그리고 아래채는 대상도 아니래요."
"어허 참.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에게 더 잘해줘야지. 그 참 야박하네."


시끄러비아지매가 예의 그 따발총 같은 목소리를 내질렀다.

귀향인 덕분에 숨통이 트이는데
 
전북 김제시 한 시골마을 앞 들판에서 수수가 익어가고 있다. 2021.9.16
 전북 김제시 한 시골마을 앞 들판에서 수수가 익어가고 있다. 2021.9.16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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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마을엔 귀향인이 늘고 있었다. 아랫담 박샌 네는 큰딸과 사위가 집을 새로 지어 들어와 박샌댁을 모시고 살기 시작했고, 전답 많은 대밭 집 김씨네도 작은아들이 귀향해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카페 뒷집도 아들 내외가 귀향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 있었다.

회관 앞집도 작은아들이 돌아와 노부모와 농사일을 하고, 골목 안집도 큰아들이 돌아왔고, 돌배나무 집도 막내아들이 돌아와 어머니를 돌보고, 길 건너 집도 중늙은이 아들 내외가 귀향하려고 주말마다 찾아와 집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누구도 행정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지원제도에 대해 잘 몰라서 면사무소나 군청을 찾아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특별히 도움이 될 만큼 알려진 정책도 없었다.

우리가 처음 귀농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귀농인에 대한 이런저런 보조사업을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몇 백만 원의 집수리비를 지원한다는 사실도 몇 년이 지나 자격을 상실한 뒤에야 알았다.

"그래도 면사무소에 한번 찾아가 보세요. 다문 얼마라도 집수리비가 지원되기는 할 건데."

여자 홀몸으로 많은 벌을 키우고, 팔백 포기 넘는 고추밭에서 여름내 씨름하던 모습을 봐왔다. 그런 처지에서 큰돈 들여 집을 수리해야 할 상황이 안타까웠다.

"에고. 그런데 자꾸 가봐야 뻔할 뻔자지요. 뭐."

예삐엄마는 일찌감치 포기한 상태였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위로에 지나지 않을 말이었음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귀향인을 위한 특별한 정책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행정은 귀촌인을 더 환영하는 듯했다. 다섯 가구 이상이 이주해 올 경우엔 택지개발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무상으로 해주기까지 한다. 상하수도와 전기통신시설, 이설도로까지 지원한다. 인구를 늘리기 위한 방편이라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특혜다.

귀향인에 대한 지원정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귀농인에 대한 지원정책 또한 보잘것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하면 귀촌인은 우대를 받는다. 귀촌인은 대개 퇴직해서 고액연금을 받거나, 도시에 남겨둔 부동산 임대수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형차 두 대 가지고 귀촌하면 세수 증대에 큰 효과가 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해댄다.

토지를 사고, 새 집을 지으면 거기에 부과되는 세수 항목이 한둘이 아니다. 토지를 사는 사람은 취득세를, 파는 사람은 양도소득세를 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거기에 따르는 농어촌특별세라든가 지방교육세, 인지세 등의 세금을 내야 한다. 토지용도변경과 건축물 신축에 따르는 세금 부과 항목도 여럿이다. 귀촌인이 늘어나면 이처럼 많은 세수를 확보하게 된다. 행정은 당연히 귀촌인을 우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부모가 사는 집으로 노부모의 논밭을 일구기 위해 귀향하는 사람은 이런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니 행정이 천덕꾸러기로 취급하는 거지. 행정이 보살펴 줘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거지.

귀농인도 거의 마찬가지 수준이다. 기껏해야 주거지 수리비 약간 보조하는데 그것도 빈집을 사서 귀농할 때고, 새 집을 지을 때는 그런 보조도 없다. 농기계 구입자금 일부 보조하고,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정도다. 농지구입자금 장기 저리 대출제도라도 있으면 오죽이나 좋을까. 오로지 세금 많이 내는 사람 편에 선 행정이라는 거지.

엊그제 예삐네는 위채 시멘트 기와를 걷어내고 기와무늬 강철지붕으로 바꿨다. 오래된 지붕이 비가 새기도 했거니와 색깔도 거무튀튀해 볼썽사나웠기 때문이다. 벌 키우고, 고추 따서 어찌어찌 모은 돈에, 도시 사는 아들 딸에게 손 벌려서 거기에 탁 털어 넣어 버렸다고 했다.

소멸 위기에 처한 농산촌은 귀촌인들보다 귀향인이 더 절실히 필요하다. 그들은 마을의 전통과 문화를 잘 알고 있고, 농사를 기본으로 여긴다. 지금 농산촌은 이들 귀향인이 있기에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

귀향한 골목안집 막내아들은 인공연골수술을 받은 옥점아지매 밭일을 다 해주었고, 아랫담 김씨 작은아들도 귀향하여 온갖 힘든 농사일을 해주고 다닌다. 이들 귀향인이 없었다면 다들 농사를 묵혔을 거였다.

특혜는 그런 귀향인들에게 줘야 한다. 노부모를 봉양하기 위한 귀향이라면 더욱 그렇다. 맘 편케 귀향할 수 있을 지원정책이 따르면 이런 귀향인이 더 늘지 않을까.

태그:#산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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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하다 경남 함양군 지리산 기슭으로 귀농하여 농부가 되었다.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틈틈이 시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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