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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0월 25일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한 두 사람의 시선이 당시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87년 10월 25일 고려대 운동장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한 두 사람의 시선이 당시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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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당은 지도노선으로 '안정과 개혁'의 병행을 내걸고 다른 야당과 협력하면서 야권 주도의 국정운영을 통해 여러 가지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냈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부결을 주도하여 사법부 독립의 기틀을 마련하고, 1천만 농민의 염원인 양곡관리법의 개정에 이어 양심수 석방 촉구 결의안 등을 채택하였다.

한편 김대중 총재는 5월 18일 김영삼ㆍ김종필과 야3당 총재회담을 갖고 5개특위 구성에 합의, 이를 바탕으로 민정당이 제안한 2개 특위와 함께 7개의 국회특위를 구성하는 데 합의했다. 7개 특위는 다음과 같다.

△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위
△ 제5공화국의 정치권력형 비리 조사특위
△ 민주발전을 위한 법률개폐특위
△ 양대선거 부정조사특위
△ 지역감정해소특위
△ 통일정책특위
△ 올림픽특위

노태우정권 초기 여소야대 정국은, 그러니까 3당 합당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국회가 정치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 법률안은 여야 합의에 따라 수정하면서 98%가 만장일치로 처리하였다. 역대국회에서 여야가 합의와 토론의 절차를 통해 가장 많은 법률안을 통과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평민당이 이 시기에 가장 역점을 두었던 법률은 가족법개정과 지자제 실시였다. 당시 지자제는 5ㆍ16 때 사라진 이후 실종되고, 가족법은 여성 배우자는 재산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의 어머니들도 비슷한 실정이었다. 여성은 족보에도 오를 수 없는 차별을 받았다. 유교의 남성위주 가부장제 전통이 남긴 유산이었다. 가족법 개정에는 김총재의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

김대중 총재는 오래 전부터 가족법의 개정을 추구해 왔다. 1971년 대선 때는 공약으로 제시하고, 1983년 13대 대선의 공약이기도 했다. 국회 상임위 활동에서 역점을 두었다.

나는 1989년 봄에 이 법안을 5자회담(노대통령과 4당총재 -필자)에 내놓은 뒤 역설했다. 법안통과를 위해 협력을 요청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가족법을 개정하고 해방 이후 37년간 계속된 여성들의 불평등을 없애자. 세계 어디에 이렇게 뒤쳐진 법이 통용되는가? 우리 헌법에 비춰봐도 위헌이다"라고 역설했다. 여당대표 박준규 의원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며 찬성했다. 하지만 노대통령과 김영삼씨, 김종필씨가 반대하여 그 안건은 보류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전에 제출한 중간평가 문제와 나를 노린 공안사건 그리고 5공 청산들을 위한 문제들을 다뤘다. (주석 7)

국회의 가족법개정 작업이 여야 남성의원들의 반대와 무관심으로 계속 표류하자, 김 총재는 5공청산과 연계 마무리 조건으로 노태우 대통령과 협상하여 타결하였다. 김대중은 집권 뒤 여성부를 신설하고, 소속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공천후보 1번으로 여성을 추천하는 등 여권신장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1987년의 대선, 1988년 총선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민주화가 진척되고, 재야단체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통일논의가 확산되었다. 노태우 정부가 출범하면서 학생들은 '6ㆍ10 남북청년학생회담'을 주장하여 학생과 경찰이 충돌하는 가운데, 대통령은 7월 7일 이른바 '7ㆍ7선언'을 발표했다. 북한ㆍ중국ㆍ소련에 대한 개방정책을 뜻하는 6개항의 대북정책이었다. 김대중은 발표 전날 노태우의 초청으로 청와대에서 사전 통보를 받고 정부의 북방정책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다. 자신이 오래 전부터 제시해온 북방정책의 일부를 정부가 추진하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5공 청문회 때 증인(왼쪽부터 양정모 전 국제그룹회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5공 청문회 때 증인(왼쪽부터 양정모 전 국제그룹회장, 장세동 전 안기부장,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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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 11월 3일부터 5공특위가 가동되어 1차 청문회 등으로 이어졌다. 언론사상 최초의 TV생중계로 국민들의 열화와 같은 관심과 성원 속에 5공비리, 광주학살, 언론문제의 청문회가 열려 전두환 시대의 비리와 학정이 낱낱이 폭로되었다. 평민당 소속 의원들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김대중 총재는 11월 18일 광주특위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시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시켜 취한 것은 군부통치를 위한 정권탈취의 목적에서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일환으로 날조한 것이다.",

"광주항쟁 때 군인들이 아무 무기도 갖지 않은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발포한 것은 용서하기 어렵다. 집단살인과 다름없는 폭력이다. 시민들에게 발포명령을 누가 내렸는지가 가장 큰 문제이다. 그 발포책임자는 당시,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던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1988년 진행됐던 5공 청문회의 시청률은 올림픽 때보다 높은 56%까지도 기록했다.
 1988년 진행됐던 5공 청문회의 시청률은 올림픽 때보다 높은 56%까지도 기록했다.
ⓒ 동아일보 PDF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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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해재단청문회와 언론청문회도 열려서 전두환 친인척의 비리와 언론인 숙정ㆍ언론통폐합 등 5공정권의 폭압과 비리가 여과없이 폭로되었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ㆍ이해찬 등 이른바 '청문회스타'가 탄생하였다.


주석
7> 『김대중자서전(2)』, 22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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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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