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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아리도모도 쇼카 손주쿠 출신인데, 실제로 요시다 쇼인에게 배울 수 있었던 기간은 한달 남짓이었다. 처음에는 스기야마라는 친구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군인의 길을 선택하겠다며 거절했다. 하지만 요시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스스로를 요시다 쇼인의 제자라고 소개하고 있다.

1858년 조슈번에서 6명을 쿄토로 유학을 보낼 때, 요시다 쇼인의 추천으로 스기야마와 야마가타, 이토 히로부미 등 4명의 쇼카 손주쿠 출신이 선발되었다. 다시 확인하면 조슈번은 사쯔마번과 함께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에서 주도권을 잡으면서, 조슈번 출신이고 특히 동문과의 연대가 강했던 쇼카 손주크 출신과 주변 인물들에게 유력정치가가 되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기시 중앙공원에 설치된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1838~1922)
 하기시 중앙공원에 설치된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1838~1922)
ⓒ 하기시관광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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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유신 9년후에 일어난 1877년의 세이난(西南)전쟁은 유신후 신정부 최대의 위기로 손꼽는다. 세이난전쟁은 가고시마에서 신정부에 불만을 품고, 사학(私学)을 중심으로 한 무사들이 반기를 든 사건이다. 반군을 진압하는 신정부군 사령관인 야마가타는, 메이지유신의 공헌자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러한 무사들의 반란에 관여할 의도가 없더라도, 불만 무사들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옹위하면서 저항을 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메이지유신을 일으킬 때는 사쓰마와 조슈 동맹으로 막부를 타도한 동지였지만, 야마가타는 다른 각지의 불평 무사들과의 연대를 의식하면서, 가고시마로 후퇴한 사이고 다카모리한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준다. 가고시마에서 저항하는 사이고에게 자결하라는 통지를 보냈고, 부하가 가져온 옛 동지 사이고의 수급을 보면서, 오열하며 불경을 외웠다고 한다.

야마가타는 조슈번출신으로 이토 히로부미와 쌍벽을 이루는 인물인데, 이토가 암살당한후, 더욱 주목받는 정치가가 된다. 두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한 야마가타의 대외정책에서 나타나는 개념은 주권선(主権線)과 이익선(利益線)이라는 용어로 요약된다. 이익선이란, 북으로는 한반도로부터 남쪽으로는 중국의 푸젠성에 이르는 지역이 일본을 지키는 방위선이 되어야 한다는 당시 일본중심의 안전보장관이다. 북쪽은 러시아를 의식하고 있으며, 남쪽은 대만의 대안인 중국대륙을 의식한 결과다. 처음부터 이렇게 넓은 지역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0년 12월 야마가타 수상은 국회 시정방침연설 중에, 국가의 독립을 위해서는 영역으로서의 주권선을 지키고, 독립안위를 위해서는 이익선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이익선이란 조선을 가리키고 있다. 당시, 아시아에서는 영국의 진출과 시베리아 철도를 매개로 한 러시아의 남하가 지역 정세를 불안정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정세에 대해 일본은 청과 러시아와 함께 위기관리를 위해 조선반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야마가타가 주장하는 주권선이란 국가를 규정하는 국경을 의미하고, 이익선이란 국경에서 떨어진 지역에 있지만, 국가이익과 관련한 경계선을 의미한다. 연설에서 야마가타는 일본에게 이익선이란 조선반도에 있기 때문에 군비확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일전쟁 후에는 이를 더욱 굳히게 된다. 이러한 방위선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전후 한일병합으로 확보하게 되었다고 안심하게 된다. 야마가타의 이익선이라는 개념은 청일전쟁 후 50년간 일본은 대외전쟁에서 세력확장의 중심거점으로 인식하면서 전개한다.

주권선과 이익선, 군비확장

또한 이는 2차대전 패전으로 인해 단절된 개념이 아니라, 오늘날까지 일본의 안전보장개념에 투영되어, 한반도에서 남북 간의 대립이 지속하는 한 방파제 역할을 하는 한국을 통해 일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1901년 9월 수상 가쓰라 타로는 수상관저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야마가타를 초대했다. 모두 조슈번 출신인데, 이토의 외유를 송별하는 자리였다. 이토의 외유는 러일협상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일본정부는 러일협상과 함께 영일동맹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이토는 러일협상파였고, 동석한 이노우에도 이토에 동조하고 있었다. 야마가타는 영일동맹에 기울어져 있었다.

야마가타가 영일동맹을 추진하려 한 것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의 전략목표를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추진하려 할 때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던 영국과의 교섭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모두 영일동맹 중심으로 선회하게 된다.

야마가타와 이토 간의 인식의 차는 러시아와 조선에 대한 인식의 차로 나타난다.  이토는 러시아와의 협상을 통해 만주를 러시아에 양보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차지한다는 만한교환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야마가타는 러시아가 조선을 일본에 맡긴다는 협상에 응할리가 없다는 예측이었다. 1895년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에 의한 삼국간섭 이후, 그대로 두면 한반도 뿐만이 아니라, 대마도까지 쳐들어올 기세라면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일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조슈출신 인물소개, 사진 중앙이 야마가타 아리도모, 하기시 역사박물관
 조슈출신 인물소개, 사진 중앙이 야마가타 아리도모, 하기시 역사박물관
ⓒ 김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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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야마가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제도와 전열을 가다듬고, 군사력 증강에 힘을 기울인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사업가로부터 사들이고, 조선에서 전쟁을 위한 병참보급로를 확보하려고 했다.

야마가타가 원하는 영일동맹에 영국이 동조한 것은, 청일전쟁으로 밝혀진 일본의 군사력, 의화단 사건을 진압한 일본의 사태수습력을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쇼카 손주쿠 출신의 정치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적인 대외관에는 일본의 안전이 우선이고, 대외정책 특히, 조선정책을 국내문제를 다루는 듯한 태도롤 일관하고 있다. 야마가타의 주권선과 이익선이라는 개념이 한반도에 투사될 때, 이는 1세기 이상 오래 전에 화석화되어 사라진 개념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러 형태로 일본의 대외정책에 반영되고 있다.

오늘날 미중대결이 첨예화하는 가운데 일본이 주권선과 이익선을 확보한다는 야마가타의 방위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그 연장선에서 일본은 미국 측에 가담하기 쉬운 구조 속에 놓여 있다. 이러한 구조를 살펴보면, 미중이 무한대립하는 가운데 우리 의사와는 상관없이 한반도는 대만과 함께 국제화약고로 선택받기 쉬운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다시 한반도를 국제전쟁 놀이터로 제공하지 않으려면 한국의 군사력을 강화시켜야 하지만, 동시에 남북한 간의 합의와 이를 지키려는 지혜와 노력을 더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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