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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1월 15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대구 집회와 11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 유세. 노태우 후보는 돌이 날아올 것을 알고 미리 방탄유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1987년 11월 15일 평민당 김대중 총재의 대구 집회와 11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후보 광주 유세. 노태우 후보는 돌이 날아올 것을 알고 미리 방탄유리를 준비하기도 했다.
ⓒ MBC뉴스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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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후보는 87년 11월 29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유세를 가졌다. 대통령후보 중 처음으로 여의도 광장을 택해 유세한 것이다. 평민당은 당력을 집중하여 여의도 유세 준비에 나섰다.

이날 여의도 유세는 대단한 성황이었다. (12월 13일 보라매공원 유세 때는 더 많은 청중이 모였지만). 영하 10도보다 훨씬 더 떨어진 추위에도 불구하고 64만 평방미터의 여의도 광장과 부근 고수부지를 130만 이상의 시민이 가득 메웠다.

당시 <동아일보>는 "한파 속 선거사상 최대인파" 라고 보도했다. (그후 노태우후보의 여의도 유세와 비교해서 보는 이에 따라 말이 많았지만). 더구나 유세 후에도 수십 만 청중이 김후보의 오픈카를 따라 여의도에서 시청앞까지 보도로 행진하기도 했다. 도보행진은 3시간이나 걸렸다.

이날의 집회는 김후보 진영을 크게 고무시켰다. 승리감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후보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는지 그의 이날 연설은 매우 격정적이었다. 그를 비판한 사람들은 그의 선동가적인 기질이 가장 잘 드러난 연설이었다고 꼬집기도 했다. (주석 3)
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1987년 대선 당시 KBS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 유세장면엔 상당한 비중을 들였던 반면 평민당 김대중 후보에겐 인색했다.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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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여의도 집회에는 관권의 방해가 적지 않았다. TV에서는 전날 저녁부터 "29일은 영하 20도의 체감온도"라고, 유별나게 혹한의 날씨를 강조하고, 서울시에서는 각 구청 통반 별로 시민들을 유세장에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정부는 공무원과 국영기업 직원들에게 금족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이날 집회에는 130만 이상의 '자발적' 인파가 모여들어 여의도 일대가 평민당의 황색깃발로 뒤덮혔다.

연설이 끝나고 김후보의 오픈카를 따라 수만 명의 청중이 여의도에서 시청앞까지 도보로 행진하였다. 3시간이나 걸렸지만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민정당 후보의 집회 때에도 100만 이상의 인파가 모인 것으로 보도되었지만 상당수가 동원된 사람들이었다. 다음은 이날 김대중후보의 연설 중 몇 대목이다.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평민당 대선후보로 유세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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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민국의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의 역사에도 없는 대군중이 지금 여의도 양쪽은 물론이고 고수부지까지 꽉 메웠습니다.

여러분, 나는 여기서 선언합니다. 이번 선거는 오늘로써 김대중이가 승리했다, 김대중이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4천 2백만 민주주의를 원하는 국민이 승리했다! 여러분 기뻐합시다.

이제 우리의 승리를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이 승리를 막았다가는, 그런 자들의 운명은 제2의 이승만, 제2의 박정희의 운명을 당하고야 말 것이라고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렇게 지금 가장 고독하고 힘겨운 싸움을 하는 김대중이,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언론은 이 김대중이만 몰아붙이는 이 현실 이것을, 여러분이 방치하지 않고 이렇게 수백만의 인파가 나와서, 이렇게 격려해 주시니 나는 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지금 노태우씨는 부정선거를 전면적으로 획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죠? 어떻게 보면 참으로 슬프고 불쌍한 사람입니다. 한치 앞을 못보는 거요. 관권선거, 금력선거, 신문과 TV를 자기 사물화시킨 선거, 이렇게 해서 부정해서 노태우씨가 대통령 해먹을 것 같습니까? 부정선거를 즉각 중지해라. 만일 중지 안 했다가는 6월 투쟁에서 그 위대한 역량을 보인 우리 국민들이 반드시 본떼를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선언합니다.

나는 통일민주당에 제안합니다. 전국 10개 도청소재지를 김영삼총재와 내가 이렇게 여러분 앞에 나와서,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여러분의 심판을 받자는 것을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주석 4)

김대중 후보는 1971년의 대선과 같이 이번 선거에서도 전력투구했다. 후발 주자로서 여러가지 불리한 여건을 선거유세로 커버하고자 전국을 누볐다. 평민당의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후보와 유세반은 115회에 걸쳐 전국에서 유세를 벌였다. 산간오지의 일부를 빼고는 대부분 지역을 후보가 직접 찾아가 연설을 하였다.

평민당은 특히 호남권은 절대우세 지역으로 묶어 놓고 유권자가 많은 서울 등 수도권 지역을 집중공략하며, 그 밖의 중부지역은 김후보의 직접유세로 표를 확보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김후보는 중부권과 영ㆍ호남권을 지그재그로 다니며 유세를 벌이는 바람작전을 일으켰는데, 이는 늦은 창당으로 인한 조직가동의 후발성과 자금의 취약성 때문이었다. 이 바람을 김후보는 수도권으로 몰아 서울에서만 여의도(11월 29일)와 보라매공원(12월 13일)에서 1백만이 넘는 인파를 끌어 모았으며 수도권지역에서만 20여 회의 연설회를 가졌다.

민주회복과 서민층 대변을 주 이슈로 내세운 평민당은 광주사태 당시 ○○사단장이었던 정중웅씨를 영입, 광주사태를 집중거론, 노후보를 비난했으며 중반전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김영삼 후보도 공격, 야당간의 선거전도 격렬했다. (주석 5)


주석
3> 이낙연, <80년대 정치현장>, 66쪽. 동아일보사, 1989.
4> 앞의 책, 67~ 70쪽.
5> <동아연감>, 1988년, 59쪽, 동아일보사 발행.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평화민주당 연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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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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