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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 1편 서울의 주요 길목, 일제가 공포심을 극대화 시킨 건물( http://omn.kr/1vjxe )에서 이어집니다. 

파놉티콘(Panopticon)은 단순히 건축물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파놉티콘이 내포하는 권력 행사 행태를 분석해 낸다. 그는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의 규율훈련과 일반적인 권력 운용 모델을 여기서 발견한다. 고도화된 하나의 통치 형태로서 파놉티콘은, 감시체제를 구축한 지배자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행사하는 권력 운용방식이라 통찰한다.

파놉티콘은 중앙 감시탑 주위를 수많은 감방이 둘러싼 모양새다. 감시탑은 어둡다. 반대로 감방은 무척 밝다. 감시탑 시선을 수감 방에선 알 수 없을 뿐더러, 소수 감시자가 수많은 죄수를 효율적으로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죄수들은 감시탑 권력에 무의식적으로 종속 관계를 내면화시킨다.

자신은 물론 다른 죄수를 서로 감시하는 '죄수이자 주체'가 된다는 강요된 메커니즘이 이 공간에 작동한다. 일상적 감시가 이뤄지는 현대를 사는 우리도, 어쩌면 모두 파놉티콘에 갇혀 있는지 모른다.
 
독립공원과 나란한 역사관. 본래 규모의 절반 수준임.
▲ 서대문형무소역사관 독립공원과 나란한 역사관. 본래 규모의 절반 수준임.
ⓒ 서대문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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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감옥으로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수탈은 토지조사로, 억압은 헌병경찰제를 통해 강화해 나간다. 무장투쟁을 하는 독립군은 만주로 옮겨가고, 국내에선 활발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된다. 일제가 이를 탄압하면서, 수많은 운동가가 무고하게 잡혀 투옥된다.

일제는 1913년 감옥 확장을 입안, 1915년 감옥 증·개축 기조를 아예 수감 인원을 크게 늘릴 수 있는 장기계획으로 전환 시킨다. 저항은 끊이지 않을 거란 전망이 배경이다. 그 시작이 서대문 감옥이다. 담장을 벽돌로 교체하고 3개 동 방사형 옥사 신축에 들어간다. 방사형 꼭짓점이 간수소로, 세 건물의 감시가 가능한 파놉티콘 구조다.
 
지도 남동측에 방사형 파놉티콘 구조로 신축된 옥사로 보아 1921년 서대문 형무소 모습으로 추정.
▲ 1921년 형무소 모습 지도 남동측에 방사형 파놉티콘 구조로 신축된 옥사로 보아 1921년 서대문 형무소 모습으로 추정.
ⓒ 서울역사박물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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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을 공사하던 와중에 3·1운동이 일어난다. 이때 수형자가 3075명으로 급증한다. 민족대표 33인은 물론 유관순 열사 등이 이때 잡혀간다. 담장 3면은 벽돌로 교체했으나, 1면은 여전히 나무판자다. 이곳을 부순다면 탈출도 가능한 상태다. 그해 12월에 완공된 방사형 옥사에 덧대어 증축한 미결수 전용감방이 1921년 완공된다.

일제는 아울러 근본적인 처방을 모색한다. 1922년 들어 1908년 지은 옥사 일부를 부수고, 증축 완료한 미결수 전용감방과 대칭형의 새 옥사 신축에 들어간다. 2층 건물의 이 옥사가 지금까지 남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핵심을 이룬다. 옥사는 길이 43.76m, 폭 10.9m, 바닥면적 476.98㎡, 연면적 1020.68㎡로 감방 수는 각 층 28개(총 56개) 규모다. 이 옥사 설계와 완공까지 1년 남짓 시간이 소요된다.
 
1923년 신축된 청사. 형무소 제반 업무가 이곳에서 이뤄짐. 지하는 공포의 공간이었음.
▲ 청사 1923년 신축된 청사. 형무소 제반 업무가 이곳에서 이뤄짐. 지하는 공포의 공간이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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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중앙간수소 및 기타 건물 신축이 이어진다. 이때 1908년 지은 건물이 모두 사라진다. 아울러 감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 총괄 본부 격인 청사도 건립된다. 청사는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연면적 1090㎡(바닥면적 466.23㎡) 규모다. 지하층은 문초와 고문실 등으로 사용되던 공포의 공간이다. 이밖에 부대시설로 취사장, 교회당, 간수실, 의무실과 병감(病監) 등이 만들어진다.
 
규모가 축소되어 남아 있는 여성 옥사.
▲ 여성 옥사 규모가 축소되어 남아 있는 여성 옥사.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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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여성을 수감 할 옥사도 별도로 만들어진다. 2개 동 여성 옥사에도 간수소, 공장, 교회당 등이 별도로 설치된다. 대한제국 말기 의병 전쟁과 1919년 만세운동을 겪으면서 서대문 감옥은 목조건물에서 붉은 벽돌의 조적조로 완전하게 탈바꿈한다. 1923년 5월 이름도 '서대문형무소'로 바뀐다.

사상범 격리
  
대칭의 방사형 파놉티콘 옥사와 공장 등이 주를 이룬 모습. 구치감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31년 이전 모습임.
▲ 1920년대 후반 서대문 형무소 대칭의 방사형 파놉티콘 옥사와 공장 등이 주를 이룬 모습. 구치감 건물이 없는 것으로 보아 1931년 이전 모습임.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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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만세운동은 독립운동의 획기적 전환점이었다. 왕정 복고운동이 새로운 민주 공화정 수립 형태로 전환한다.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곳곳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앞세운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무장투쟁과 함께 사상을 앞세워, 파쇼적인 군국주의를 표방하는 일제에 커다란 위협 세력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소위 사상범이 대량으로 양산된다.

일제는 사상범 격리에 특히 몰두한다. 1925년 제정한 '치안유지법'은 전적으로 사상범을 겨냥한 것으로 이는 대규모 '구치감' 신축으로 이어진다. 단순 범죄자와 사상범을 분리하려는 의도다. 1928년 기준, 분리 수감이 필요한 사상범이 1500여 명에 이른다. 이에 사상범 전용 옥사 신축이 제안되고, 1931년 남측 4400㎡ 부지에 2층 규모 구치감이 기공되어, 42만 원 비용을 들여 1935년 완공된다.
 
1935년 사상범을 독방에 수용하기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구치감 모형.
▲ 구치감 모형 1935년 사상범을 독방에 수용하기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구치감 모형.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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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구치감은 옥사 동 10개와 부속건물로, 조적조가 아닌 철근콘크리트다. 283개 감방 중 242개가 독방이다. 특히 독방 72개의 제4동은 '개전의 빛이 전혀 없는' 중대 사상범 전용 옥사다. 한 방에 많은 수의 사상범을 수감 하기 어려운 일제의 고민이 엿보이는 건물이다.
 
1935년 구치감 준공으로 1987년 까지 감시와 처벌이 일반화 되었던 서대문형무소 모형.
▲ 서대문형무소 모형 1935년 구치감 준공으로 1987년 까지 감시와 처벌이 일반화 되었던 서대문형무소 모형.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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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 감옥은 1908년 13000㎡ 500명 수용 규모에서, 이때 55000㎡ 2500명 수용이 가능한 시설로 변모한다. 청사 동 2개, 기결수 옥사 동 8개, 미결수 옥사 동 7개, 한센병자 동 1개, 공장 14개, 취사장 2개, 창고 6개, 병사와 망루 각각 6개, 격벽장(운동시설)2개, 사형장과 시구문을 갖춘 완결형의 대규모 감옥이 된다.

서대문형무소 체계는 일제가 의도한 통치의 주요 단면이다. 주로 사상범을 사회로부터 영구 격리하려는 의도가 짙게 배어 있다. 또한 전국 최대 수감자를 보유한 감옥으로 빈번한 사형집행이 일반화된 곳이기도 했다.

해방 이후
  
사형장 입구와 내부 모습.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던 본 나무도 죽고, 대신 어린 나무가 옛 모습을 재연하고 있음.
▲ 사형장 사형장 입구와 내부 모습.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어 간 수 많은 사람들에게 "통곡의 미루나무"로 불리던 본 나무도 죽고, 대신 어린 나무가 옛 모습을 재연하고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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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틀째인 8월 16일 독립운동가와 경제사범이 건국준비위원회 주도로 석방된다. 일반 사범은 사형수와 장기수가 주동, 17일 옥문을 부수고 출옥한다. 종적을 감춘 일본인 간수 대신, 소수 한국인 간수들이 무기고와 여성 옥사를 지킨다. 남성 수감자들이 모두 출옥하자 여성 수감자들을 출소시킨다. 18일부터 일본인 간수들이 미군사령부 명령으로 업무에 복귀한다.

미군정이 성립된 9월부터 감옥 사무도 점차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안정은 친일 분자의 재활용이었다. 서대문형무소도 마찬가지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를 기화로 친일파들이 대거 권력 전면에 등장한다. 이때부터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공산주의자로 몰려 잡혀간다. 1947년 노덕술에게 심문당한 김원봉이 대표적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선 1946년 가을 수감자들에 의한 파옥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정부수립 후 수감자가 대거 증가한다. 반공을 표방한 이승만이, 친일파를 앞세워 권력에 반기를 든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까지 공산주의자로 둔갑시켜 탄압한 결과다. 제주 4·3과 국회프락치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많은 민족주의자와 독립운동가들이 월북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사흘째, 서대문에 수용된 사상범 등 8782명 죄수가 석방된다. 반대로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남한의 지도자를 가두었고, 이들은 대부분 북한군 후퇴와 함께 납북되는 처지에 처한다. 서울이 수복되자 북한 부역자와 협력자들이 다시 대거 수감 된다. 민족의 비극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공간이 바로 서대문형무소였다.
 
정보기관에 의해 조작된 1965년 인혁당 사건 재판 모습.
▲ 1965년 인혁당 사건 정보기관에 의해 조작된 1965년 인혁당 사건 재판 모습.
ⓒ 이영천(역사관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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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내내 서대문은, 조봉암 등 반정부 인사들을 대중과 격리하는 장소였다. 1961년 '서울교도소'로 이름을 바꾼다. 박정희 정권은 교도소를 정치깡패와 이승만 정권 부역자 및 조용수 등 민족주의자들을 가두고 죽이는 장소로 썩 잘 활용한다. 해방되었어도 서대문형무소는 일제의 그것인 '반정부 및 사상범 전용 수용소'라는 이름과 얼굴을 지워내지 못한 것이다. 1967년엔 '서울구치소'가 되어 미결수를 전담 수용한다.

1970년대에는 더 극악한 장소로 변모한다. 공포정치 상징으로 서대문형무소가 다시 부각 된다. 수많은 사건 중 18시간 만에 8명을 사형시킨 제2차 인혁당재건위 사건이 대표적이다. 명실상부 '사법살인의 전당'이란 오명으로 자리매김한다. 박정희 독재 권력을 지켜내는 감금과 감시, 처형 정치의 최첨단 역할에 매우 충실한 공간이었다.

신군부 총칼도 전임자가 걸었던 길과 같아, 서대문형무소를 편하게 내버려 두진 않았다. 5·18과 야당 탄압, 87년 민주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민주 인사들이 형무소 문턱을 넘나들어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의 그것과 똑같은 길이었다.
 
주요 건축물 및 담장 등이 헐러 나간 서대문 형무소 모습.
▲ 1987년 직후 서대문형무소 모습 주요 건축물 및 담장 등이 헐러 나간 서대문 형무소 모습.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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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민주화와 함께 형무소는 의왕에 새로 마련된 서울구치소에 그 임무를 넘겨준다. 형무소는 전면 철거의 위기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이곳에 갇힌 아픈 기억을 간직한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몇몇 시설을 보존, 1998년 서대문형무소역사관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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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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